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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13화 (113/181)

113화

검은머리 기사와 113화

끄아아아아악!

사념체와 의식이 끊긴 불멸왕은 평생 겪어본 적 없는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그 여파가 얼마나 큰지 공간을 넘어 연결된 본체까지 영향을 줄 정도였다.

속에서 날뛰는 오러, 비명과 함께 터져 나오는 핏물, 검게 썩어 들어가는 세계수.

푸른색으로 빛났던 성지 호수는 어느새 검은색 핏물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다.

겨우 검 한 자루였다. 오러도, 불꽃도 섞이지 않은 평범한 철검 한 자루로 무려 형체가 없는 사념체를 반으로 베어냈다.

반신이라 불리는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신과 가장 가까운 세계수라고 해도 그런 불가사의한 힘은 부여하지 못한다.

도대체 마지막 검을 휘두른 놈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마치 닿지 못한 무언가를 보는 것 같은 아득함에 불멸왕은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반신이 지닌 오만함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지고함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짓누른 호수 속 불멸왕은 수년간 감고 있던 눈을 조용히 떴다.

출렁, 쾅!

그 순간 오염된 성지 호수가 출렁였다. 뿌리 아래 호숫물은 모조리 기화되어 부활한 불멸왕을 향해 흡수되기 시작했다.

세계수가 평생을 걸쳐 만들어 낸 순수한 결정체이자 성지를 상징했던 푸른색 호수는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 것이다.

“불멸왕 폐하!”

“엘릭서를 내놓아라.”

홀로 성지를 지키고 있던 엘프 여왕이 서둘러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불멸왕을 향해 마지막으로 아껴둔 엘릭서를 진상했다.

꿀꺽꿀꺽!

봉인되어있던 뚜껑을 열고 주황빛으로 빛나는 내용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그러자 사념체 파괴로 인해 생겼던 내상과 오러 뒤틀림이 깔끔하게 치료되었다.

“하아······.”

역시 보다 많은 수명을 책임져 주는 세계수 열매다운 약효였다. 엘릭서 한 병을 전부 먹어 치우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은 불멸왕은 빈 병을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엘프 여왕이 물었다.

“예상보다 일찍 깨어나셨습니다, 불멸왕 폐하. 이루고자 하신 건······.”

“실패했다. 놈이 먼저 와 있더군.”

세계수를 제압할 수 있게 된 불멸왕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념체를 조종하는 일이었다.

후계를 무사히 세운 검성보다 앞서 ‘무언가’ 비기나 영약을 숨겨 놓은 게 분명한 기사왕의 묘를 파헤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고 유용하게 쓰였던 사념체마저 파괴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돼 버리고 말았다.

한낱 인간 하나다! 수년간 계획했던 대계는 인간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아까운 마지막 엘릭서마저 쓸데없이 소진하고 말았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불멸왕은 부상을 회복하며 계획했던 대멸종과 전쟁을 조금 앞당길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새로운 기사왕은?”

“······떠오르는 별입니다.”

“그럼 빛나기 전 잘라야겠군.”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인간의 잠재력을 우습게보았던 놈은 아직 빛을 내기 직전인 신성(星) 눈투성이를 죽이고자 했다.

불멸왕은 여왕을 향해 물었다.

“오크와의 전쟁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지난 침공처럼 엘릭서 동맹을 제안할까요, 폐하.”

하필 3황자라는 존재 때문에 엘프와 오크 간 쓸데없는 전쟁이 벌어졌다. 북방을 침공하기에 앞서 거슬리는 것을 치워야 했던 여왕은 과거와 똑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전 황제 오그르도 침을 흘리며 탐냈던 엘릭서다. 아마 욕심 많은 1황자라면 기다렸다는 듯 종전과 동맹을 맺을 것이다.

“동맹이라······.”

하지만 놈은 그 대안이 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긴 수면 끝에 더욱더 신과 가까워진 불멸왕은 무언가를 대가를 줘야 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됐다. 내가 나서지.”

과연 이것이 왕의 친정인가, 신의 재림인가. 본인이 직접 나서겠다고 선언한 불멸왕은 검게 변한 세계수를 향해 다가갔다.

푹!

그리고 두꺼운 뿌리 속에 거침없이 손을 찔러 넣어 본인과 함께 잠들어 있던 명검이자 신검 ‘잿빛 줄기’를 꺼내 들었다.

츠즈즈즈즉!

불멸왕의 오러가 솟구친다. 그 오러는 단순히 검과 전신을 넘어 대기로 뻗어나갔고 잔잔하던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수련과 수없이 많은 엘릭서를 흡수하여 살아있는 신이 된 불멸왕. 놈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내려다봤다.

“아아······!”

그래, 이거다. 이것이 자신이 세계수 대신 불멸왕을 모신 이유였다. 저 끝이 보이지 않는 오러를 보라. 저 빛은 엘프 종족을 더 높은 세상을 이끌고 갈 구도자의 빛이다.

마치 경련하듯 몸을 떤 엘프 여왕은 불멸왕 앞에 온몸을 수그렸다. 그리고 발등에 입을 맞추며 새로운 신의 탄생을 축복했다.

* * *

다각! 다각! 다각!

촤아악!

“안돼! 안된다고!”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검은 화살이 급히 달려온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차가운 눈 위에 쓰러진 부러지는 검을 향해 달려가 황급히 옷깃을 붙들었다.

“피, 피가······!”

당장 즉사할 급소만 면했다 뿐이지, 온몸 대부분이 관통당한 상태다.

이렇게 내버려둔다면 쇼크는 물론이고 당장 과다 출혈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을은커녕 오로지 눈뿐인 이 첩첩산중에 치료사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엉엉 울음을 터트린 검은 화살은 막막함으로 눈앞이 하얗게 물들고 말았다.

“······검은 화살.”

그 순간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부러지는 검이 입술을 달싹였다.

당연히 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민한 귀를 기울였다.

그래, 위기 속에서도 항상 방법을 찾던 남자다. 이번에도 분명 거짓말처럼 모든 걸 극복하고 굳건한 등을 보여 줄 것이다.

“선왕의 묘로·········.”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자신을 선왕의 묘로 데려가 달라는 마지막 부탁이었다.

드디어 운명을 받아들인 그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반쪽짜리 엘프의 핏줄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검은 화살은 그의 영혼 너머에서 짙게 그을린 죽음의 기운을 발견한다.

눈가가 나비처럼 파르르 떨린다. 눈물은 하염없이 떨어졌고 이별을 직감한 심장은 미친 듯이 울음을 터트린다.

꾸욱.

하지만 검은 화살은 몰려오는 슬픔과 절망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부러지는 검의 거칠고 차가운 두 손을 꽉 붙잡아 주었다.

“·········나만 믿어. 알았지? 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데려다줄게.”

확답을 들은 검성이 그제야 두 눈을 감았다. 검은 화살은 몸을 꼭 끌어안으며 피와 상처로 물든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평생을 그에게 어리광만 부리며 지냈다. 이제는 자신이 겨울 나비가 되어 이방인이 꿈꿔왔던 마지막 춘몽을 들어줄 것이다.

다각, 다각!

검은 화살은 부러지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가온 검은 코 안장 위에 앉히며 자신이 직접 고삐를 움켜쥐었다.

선왕의 묘가 있는 산맥 위치는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다. 최대한 빨리 가기 위해서는 위험한 산길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불어오는 바람과 거센 눈발 속 각오를 되새긴 검은 화살은 슬픔을 기꺼이 떨쳐내며 두 손으로 쥔 고삐를 힘껏 흔들었다.

푸르륵! 푸르륵! 푸륵!

짜악! 짝!

“빨리! 검, 검은 코! 지금 뭐 하는 거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을 여기까지 안내한 영리한 검은 코는 거세게 저항하며 출발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앞발을 들어 올리며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거칠게 투레질한다. 끔뻑거리는 순진한 눈망울은 사념체가 사라졌던 절벽 위 무언가를 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어······?”

그리고 얼떨결에 고개를 돌린 검은 화살 또한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로 반쪽짜리 엘프의 피가 강하게 반응하고 있는 조그만 뿌리 조각을 말이다.

다각, 다각.

검은 코는 기다렸다는 듯 잔망스러운 발걸음을 돌려 뿌리 앞에 자세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눈을 녹이고 있는 뿌리 조각을 손에 쥐었다.

느껴진다. 모든 것을 소진하고 남은 미세한 생명력이다. 하지만 그 속은 마치 남아 있는 희망처럼 무언가를 태동하고 있었다.

* * *

“올해 겨울은 유독 춥네요.”

“좋은 봄이 오려나 봐요.”

그날 갈림길에서 스승을 보낸 눈투성이는 더욱 성숙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 했듯 아이 또한 아픔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 것이다.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돌아온 눈투성이는 가장 먼저 재상과 회색 늑대를 불러 정식으로 사과했다.

아무리 오해가 쌓였다고 한들 자신이 너무 섣불렀던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재상과 회색 늑대는 흐뭇하게 웃으며 사과를 받아들였고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한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덕분에 잠시 소원했던 사이는 더욱 돈독해질 수 있었고 살얼음처럼 얼어 있던 왕궁 분위기 또한 사르르 녹아내렸다.

‘경들에게도 면목이 없어요.’

기사왕의 빈자리로 인해 한참 중단되었던 국정 운영이 바삐 돌아가기 시작했다.

왕의 노기 앞에 혼란스러웠던 관료들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감히 기사왕이 직접 사과를 해 오는데, 고개를 흔들 관료가 어디 있겠는가.

감동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의욕을 불태우며 왕국을 발전시켜 나갔다.

아직 어린 나이라 방황할 법도 한데, 빠르게 그것을 뉘우치고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려는 현명한 기사왕.

재상은 그런 눈투성이를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며 꽃잎이 든 찻물을 따라 주었다.

찻잔 안에는 눈투성이를 닮은 하얀색 꽃이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라면 귀엽다고 좋아했을 눈투성이는 찻잔이 아닌 창밖 너무 까마득한 하늘과 고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보이는 법이다. 눈동자에서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읽은 재상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손을 잡아 주었다.

“스승님이 그리우세요?”

“······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은데 눈을 뜨면 너무 멀리 있네요.”

광활한 북방은 한 폭의 풍경이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전부 담을 수 없다.

그리고 그리움 또한 그리했고 닿지 못하는 아련함 또한 그리 야속했다.

재상은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만큼은 신하로서가 아닌 다른 세월을 살아온 어른으로서 아이를 위로하고 싶었다.

조용히 옆에 앉은 기억하는 새는 힘 없이 기대오는 눈투성이를 안아 주며 품 안에 머리를 기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평소 입버릇처럼 자랑해 오던 검성 말대로 조그맣던 아이 눈투성이는 어느새 다 품 안에 안을 수 없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기억하는 새는 말 없이 흑요석처럼 빛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조용히 눈을 감은 눈투성이는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며 읊조렸다.

“어느 날은 제가 이렇게 물었어요. 스승님, 세상은 너무나 큰데 저는 너무 작네요. 이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랬더니······.”

“큰 꿈을 꾸는 건 죄가 아니라 하셨죠?”

“어? 어떻게 아셨어요?”

“선왕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그리고선 종자인 그에게 이름을 내려 주셨죠.”

아, 스승은 그대로 내게 말해 주었구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린 눈투성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보이는 북방을 바라보았다.

“무슨 꿈을 꾸셨을까요?”

“글쎄요, 좋은 꿈이 아니었을까요.”

좋은 꿈,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던 눈투성이는 수마가 몰려옴을 느꼈다.

그리고 서서히 내려가는 눈꺼풀 사이로 보인 것은 흰 나비를 닮은 흰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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