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검은머리 기사왕 112화
최후의 결전이 끝이 나고 기사왕은 죽음을, 불멸왕은 영원한 잠을 앞두었다.
위대한 기사왕이 동귀어진한 끝에 반신이라 불리던 불멸왕을 물리친 것이다.
‘참으로 기이하구나. 필멸자의 몸으로 불멸자를 베다니, 너는 도대체 누구냐.’
불멸왕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프와 함께 태어난 자신은 영원한 왕이었으며 동시에 신과 가장 가까운 자였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벤 것은 대륙을 지배한 오크 황제도, 수많은 엘프 반역자도 아닌 불과 한 세기도 살지 못한 인간이었다.
‘대답해라!’
도대체 그 누가 신의 운명을 결정지으려 하는가. 울부짖는 불멸왕 앞에 침묵을 지키던 기사왕은 마지막 웃음을 보였다.
‘나는 북방의 후손이다. 수명은 유한하나 유산은 무한하고, 기사왕은 죽으나 이어진 신념은 끊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 이름 없는 자 중 하나로 죽을 것이다.’
‘착각하지 마라! 두 번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기사왕! 반드시 다시 나타나 네가 이루고 원한 모든 것을 파멸로 몰고 가 주마!’
‘어리석구나, 불멸한 자야. 한낱 이방인도 위대한 기사가 될 수 있고 작은 아이도 고귀한 왕이 될 수 있다. 오직 증오만이 가득한 너는 이 또한 알지 못하리라.’
기사왕은 끔찍한 저주 앞에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품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평생 잊을 수 없는 유언을 남겼다.
‘후계를 찾아다오, 종자야.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려 할 때 나를 찾아와라.’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불멸왕 - - - - - -!!!!”
사슴과 함께 거센 눈발을 뿌리친 나는 절벽 위로 거센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태풍과 같은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며 하늘 사이로 뇌운이 번쩍였다.
파스스스스스!
콰르르릉!
나무와 풀숲이 미친 듯이 흔들린다. 변화를 눈치챈 새들은 사방으로 도망쳤고 먹구름은 마치 심연 속 수면처럼 일렁인다.
배교자의 등장에 성역을 품은 고산과 어머니 북방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것을 피부로 느낀 나는 고삐를 한차례 내리쳤다.
푸르륵!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조금만 더!”
잔뜩 열이 오른 검은 코가 속력을 더한다. 경사를 그대로 뛰어올라 가파른 길을 달리자 거센 바람이 걸음을 위태롭게 했다.
하지만 기행과 가까운 능력을 무게 중심을 잡은 나는 마지막 길을 주파했고 어느새 절벽 바로 앞을 앞두고 있었다.
놈이 내뿜는 사념이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왔다. 놈 또한 내가 다가온다는 것을 아는지 빠른 속도로 접근해 왔다.
펄럭! 화르륵!
나는 고삐를 놓고 짐을 버렸다. 그리고 오직 기름과 횃불만을 챙긴 채 요동치는 기류 사이에서 예민한 감각을 일깨웠다.
“- - - - - - -!!”
바로 근처다. 사념의 접근을 눈치챈 나는 목이 꿰뚫리기 직전 몸을 최대한 비틀었다.
그러자 급소 바로 옆으로 뾰족한 검은색 나뭇가지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화르르륵!
끼이이이이익!
목에 생채기가 났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검과 횃불을 휘둘렀다.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검은색 형체가 일렁였다.
다각, 다각, 치지지직!
콰르르르릉!
하늘로 흩어지는 놈을 재빨리 쫓아갔다. 동시에 절벽 위 고원이 모습을 드러냈고 뇌운 사이로 번개가 내리쳤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발, 마치 해가 진 저녁처럼 어두워진 세상. 조그마하던 사념체는 어느새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푸르륵!
“······사람들에게 돌아가.”
감히 현실이라는 규정으로 설명하기 힘든 사념체 덩어리 앞에 용감한 검은 코마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푸륵!
“빨리!”
안장에서 내려온 나는 미련 없이 고삐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검은 코는 한동안 주저하더니 이내 고민 끝에 기수를 돌렸다.
다각, 다각!
이제 절벽 위는 놈과 나뿐이다. 나는 생명체의 본능을 끝없이 시험하는 사념체 앞에 의지를 담은 검을 단호히 겨누었다.
파스스스스스, 치지직.
검은색 사념체가 일렁인다. 뼈대를 이루고 있던 뿌리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뒤틀렸고 덮여있던 나뭇잎은 재배열되었다.
그렇게 형태가 바뀌었다. 놈은 더 이상 형용할 수 없는 망령이 아닌 무언가를 똑같이 옮긴 것 같은 지성체를 옮겨 왔다.
일렁이는 사념 속에 드러난 얼굴. 비록 반쪽뿐인 형체였지만, 놈은 초월적인 공간 거슬러온 반신 불멸왕이 분명했다.
[늙고 병들었구나.]
불멸왕은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몸체를 짓누르며 내게 의식을 보내 왔다.
그것은 목소리도, 언어도, 문장도 아닌 의사 전달을 위한 의지 그 자체였다.
[마지막, 여기로 올 줄 알았다.]
“그 입 닥쳐라!”
놈 또한 기사왕의 마지막 유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잠으로 인해 새로운 후계 탄생을 막지 못했을 뿐 그 더러운 야욕을 여전히 북방을 넘보고 있었다.
파스스스스스 - - -.
치지지지직!
[선왕의 묘로 나를 안내해라, 자비를 베풀어 종의 멸종만큼은 행하지 않으마.]
나는 사념 너머 영혼을 노려보았다. 안타깝게도 불멸왕은 부활하기 직전이었으며 그 힘 또한 더욱 강대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기서 막아야 한다. 선왕의 묘를 찾고 있는 불멸왕 앞에 나는 검과 횃불을 똑바로 겨누었다. 어둠 속 타오르는 불꽃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치지지직, 쾅!
채앵! 챙!
[어리석다.]
놈이 보내는 의식에 짙은 노이즈가 끼며 수많은 나뭇가지가 나를 향해 뻗어 왔다.
그러나 이미 자세를 취하고 있던 나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냈다.
서걱! 쾅!
바람이 날카롭다. 분명 막았음에도 생기는 생채기는 사념체를 끌어낸 ‘격’이 한낱 생명체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후우우우웅- - -! 파바바박!
공격은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더욱 거세진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예상한 경로는 하나둘 빗나가며 나를 몰아붙였다.
무한히 재생되는 사념과 한계가 있는 인간의 싸움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나는 위기를 수없이 넘겨온 경험을 믿었다.
푹!
화르르륵!
어깻죽지를 내주었다. 그리고 뼈를 취하고자 나뭇가지를 쳐낸 뒤 맹렬하게 타오르는 횃불로 일렁이는 본체를 지졌다.
끼이이이익!
불시에 일격을 맞은 사념체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지막 기름을 횃불과 검날에 뿌렸다. 검은 마치 오러가 깃들 듯 불꽃이 일어났다.
화르르륵, 서걱!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전과는 다른 감촉이 손끝을 타고 흐르며 검은색 액체와 나뭇잎을 떨어져나오게 했다.
일격이 제대로 통했다. 한차례 사념을 부르르 떤 불멸왕은 모습을 나타냈다, 숨기기를 반복하며 결국 불쾌함을 표한다.
[······끝까지 귀찮게 구는구나.]
“본모습을 드러내라!”
기세가 분노로 바뀐다. 비명을 지르는 검은색 사념 뒤로 이제는 검처럼 날카로워진 가시나무들이 끝없이 쏟아졌다.
챙! 챙! 쾅!
끄으윽.
노쇠하고 병든 몸이 한계를 알려 온다. 하지만 나는 밀리면 밀릴수록 투지를 드러내며 불멸왕의 사념체와 온몸으로 격돌했다.
막는다. 피한다. 당하고, 찌른다. 나는 마치 그동안 쌓아 온 모든 업을 조각하듯 적과 스스로의 잔여물을 미친 듯이 깎아냈다.
“- - - - - - - -!!”
그러자 더 이상 귀를 어지럽히는 노이즈도 목 끝까지 차오른 숨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아지경, 나는 검과 하늘 아래 서 있었다.
계속 검을 휘두를 것이다. 거리도, 자세도, 균형도 이제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한다.
그동안 이룩했던 21가지 형을 넘어 또 다른 경지가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끼이이익!
날아오는 모든 공격을 쳐냈다. 동시에 내 몸은 공간을 미끄러졌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각에서 검을 찌르고 들어갔다.
[··················!!]
마치 안개를 베는 것 같았던 희미한 감각이 이제는 뚜렷하다. 그제야 동요하기 시작한 놈은 미친 듯이 사념을 떨었고 끝내 붉은색 오러를 무리하게 일으켰다.
채앵!
치지지직.
그 순간 내 몸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것은 오러와 부딪힌 반동이었으며 나라는 그릇이 깨져 버리는 비참한 결과였다.
끄으윽.
오장육부가 뒤틀린다. 굳건하던 정신은 거세게 흔들렸고 시야 또한 한겨울 눈보라처럼 흐려졌다. 무언가 울컥 올라옴을 느낀 나는 검은색 피를 토해냈다.
쿨럭!
[······그래, 검 한 자루로 하늘과 닿았다. 이 내가 너를 검성이라 인정하마.]
오만을 뒤집어쓴 사념이 다가와 조용히 속삭여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실을 뒤집어쓴 절망이며 동시에 마지막 최후였다.
[하지만 그뿐인가? 네놈들이 말한 이어진 신념이? 이 약해 빠진 몸뚱이로!]
촤자자작!
푸욱!
날카로운 가시가 그대로 복부를 관통한다. 뒤이어 수많은 나뭇가지가 관통당한 내 몸을 들어 올려 절벽 쪽으로 던져 버렸다.
쿵! 털썩.
흘러내리는 핏물과 함께 힘이 빠진다. 불이 꺼진 횃불은 눈 속에 파묻혔고 내 몸 또한 차가운 눈 바닥에 떨어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뜨거웠던 투기는 점차 식어 갔다. 하지만 나는 절벽 바닥을 필사적으로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주르르륵!
“아아아아아 - - - -!!”
피가 분수처럼 흐른다. 최후까지 쥐어짠 고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 번쩍이는 시야, 끊어지길 반복하는 정신, 나는 끝내 놓치지 않은 검을 들어 올렸다.
콰르르르르릉!
검은색 적운이 번개를 몰고 온다. 성난 고산이 바람을 일으켰다. 인생이라는 풍랑의 끝에서 나는 여전히 방황 중이었다.
나는 이방인이요, 피가 섞이지 않는 형제다. 그렇기에 여기서 자리 잡지 못한 날개를 접고자 했다. 하지만 어머니 북방이시여 지켜보소서 내가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이게 정해진 운명이다.]
몸이 움직인다.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주마등 사이 마지막 걸음을 디뎠다.
나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았고 무뎌진 검 끝으로 놈에게 겨눈 채 앞으로 달렸다.
[바람조차 너를 돕지 않는군.]
훅.
사념체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불이 바람과 함께 꺼져 버렸다. 불멸왕은 오만한 웃음을 지으며 마지막 공격을 가해왔다.
치지지지지지직!
피하지 않으면 죽음이다. 마지막 경고를 알린 감각은 불과 함께 꺼져 버렸고 수많은 나뭇가지가 내 심장과 목을 노렸다.
[뭐······?]
하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내 시선은 이미 찔러야 하는 불멸왕의 사념체가 아닌 그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 - - - - - - -!!]
다시 돌아온 말발굽 소리와 함께 안장에 탄 검은 화살이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촉 끝에는 오러가 아닌 기름과 함께 타오르는 불꽃이 맺혀 있었다.
“부러지는 검 - - - - -!!!”
투웅!
시위를 떠난 화살이 어둠을 갈랐다. 빛줄기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든 화살은 불멸왕이 볼 수 없는 사각을 지나 그대로 꽂혔다.
푹!
끼이이이이익!!
순간 가시들이 불타오르는 종이처럼 수그러든다. 또한, 화살을 맞은 사념체는 이제 한계라는 듯 불멸왕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나는 불이 맺히지 않는 검을 들어 올려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감각이 만들어 낸 마지막 점, 그 점을 향해 힘껏 검을 내질렀다.
‘얼마나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살 건지가 중요할 뿐이다.’
‘부러지는 검! 그게 네 이름이다.’
서걱!
오러는 없다. 오직 철로 만든 검뿐이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형체가 없는 사념체는 베였고 그 뒤에 보이는 의식을 찔렀다.
[쿨럭! 이, 이 무슨······!]
부러지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그동안 휘둘렀던 검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열등감, 고통, 인내, 초연, 이 모든 것이 지독한 갈증과 함께 사라졌다.
이제는 한계를 베고자 할 뿐이다.
나는 오러가 베지 못하는 것을 베었다.
서걱!
사념체가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