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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11화 (111/181)

111화

검은머리 기사왕 111화

걱정과는 달리 밤사이 습격은 없었다.

처음으로 제 몸이 베이게 된 망령 놈이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덕분에 우리는 부상병들과 마을 주민들을 치료하고 무너졌던 바리케이드를 다시 세우며 상황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고산을 돌아다니는 놈을 피해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는 조사관을 조용히 따라 나가 솔직한 생각을 듣고자 했다.

“어찌할 생각인가?”

“일단 토벌은 불가능합니다.”

날붙이는커녕 오러조차 통하지 않는 놈을 도대체 어떤 수로 토벌한단 말인가.

불을 붙일 기름과 병사라도 넉넉하면 모를까, 당장 먹을 식량부터 걱정이었다.

“후퇴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우리야 휙 떠나 버리면 그만이지만, 저들은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 아닌가.

조사관은 노스플롬 보호 아래 있는 저들을 끝까지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해가 떠 있는 오전 시간을 이용해 고산 마을 주민들과 다친 병사들을 후방으로 옮기는 일뿐이다.

후우.

오랜 역사를 지켜온 고산 마을이 고작 저 한 놈 때문에 풍비박산이 나 버리다니.

한숨을 내쉰 조사관은 이번 일을 어찌 보고해야 할지 고민하며 내게 물었다.

“경께서는 어찌하시렵니까?”

“일단 자네들을 도와야지.”

원래 이번 여정은 선왕의 묘를 돌아다니며 심신을 단련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적어도 기사로서 도리는 지켜야 했다.

이들을 돕고 나서 움직여도 여지는 충분할 것이다. 나는 놈을 잠시나마 베었던 손끝 감촉을 기억하며 조사관을 향해 말했다.

“영주에겐 잘 말해 주게.”

“······설마 여기 계실 생각입니까?”

“놈을 저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소식을 접할 노스플롬 영주는 아마 병력을 추가로 동원해 놈을 토벌하려 할 것이다.

이곳은 단순한 마을이 아닌 많은 순례자가 방문하는 성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노스플롬에서 출발할 지원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놈이 노리는 것이 선왕의 묘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경.”

주민들을 구한 것만으로 조사관과 노스플롬 병사들은 그 의무를 다했다.

나는 함께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하는 조사관을 조용히 다독인 뒤 걸음을 옮겼다.

* * *

폭풍 전야와도 같은 밤이 또 한 번 지나 다음 날 이른 아침이 찾아왔다.

다행히 겨울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떠 있는 해는 무척이나 밝았다.

오늘이 고산을 빠져나갈 유일한 적기였다.

철저하게 준비를 끝낸 우리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무너진 정문을 빠져나왔다.

“자, 다들 부지런히 따라오세요!”

“대열에서 벗어나면 큰일 납니다!”

조사관은 주민들의 체력을 최대한 아끼고자 아이와 노인은 사슴 위에 태웠고 가지고 갈 물자와 짐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리고 언제든지 놈의 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양측에 무장한 병사들을 동행시켜 항상 사방을 살피도록 당부했다.

행렬 분위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햇살이 안심되기도 했고 늠름한 노스플롬 병사들이 횃불과 함께 항상 곁을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다각, 다각, 다각.

이대로만 가면 아무런 걱정이 없다.

순조로운 출발에 안심한 나는 한동안 대열 후방을 맴돌다 다시 사슴을 몰았다.

부스럭.

그러자 안장 뒤에서 무언가 종이를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부터 표정이 좋지 않던 검은 화살이 또 ‘그것’을 살피고 있던 모양이다.

“또 보고 있어?”

“으응······.”

검은 화살이 들고 있는 ‘그것’의 정체는 바로 놈에게서 얻은 잔여물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낙엽처럼 말라비틀어진 갈색 나뭇잎이라고 봐도 좋았다.

특이한 점이라고는 처음 본다는 것뿐? 마치 만드라고라 같던 놈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 치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검은 화살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놈의 불길한 나뭇잎을 지켜보지 못해 안달일까. 나는 그녀에게 솔직히 물었다.

“뭐라도 느껴져?”

“······아니, 너무 익숙해서 그래.”

“익숙하다고?”

“사실 이게 익숙하면 안 되는 거거든.”

익숙한데, 익숙하면 안 된다라. 나는 검은 화살의 모호한 대답을 곱씹었다.

그러자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한 그녀가 한숨과 함께 나뭇잎을 집어넣었다.

“분명 기억 속에는 있어. 근데 딱 떠오르지 않아. 어렸을 때 본 것 같은데······.”

평소 행실이 가볍고 장난기가 많기는 해도 그녀가 허튼소리를 하는 편은 아니다.

나는 어쩌면 근본적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의문 여러 개를 무심결에 떠올려 보았다.

‘고향.’ ‘나뭇잎.’ ‘익숙함.’

하프 엘프인 검은 화살은 필연적으로 엘프 왕국이 있는 서부에서 태어났다.

당연히 추방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부 생태 속에서 나고 자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 먼 북방 오지에서 어린 시절 보았던 나뭇잎을 우연히 발견했다니,

툰드라 지대가 대부분인 고산 특성상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기이한 일이었다.

‘비현실적인.’ ‘불규칙한.’ ‘비이상적인.’

분명 연관성이 있다. 모이기 시작한 로직 속에 무언가를 떠올린 나는 치명적인 진실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엘프?’

‘놈이 선왕의 묘를 노리고 있다.’

쿠르르르릉, 쾅!

“길이 막혔다!”

하지만 그 순간 대열 선두 바로 옆 거대한 고목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병사들은 당연히 깜짝 놀랐다. 주민들 또한 갑작스러운 눈사태에 겁에 질렸다.

고목이 혼자 넘어질 리가 있겠는가. 길은 하필 깎아져 내라는 길은 외길이었고 뒤돌아가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뒤로 되돌아간다! 빨리! 빨리!”

당연히 수상함을 느낀 조사관은 병사들을 재촉하며 행렬 선두를 바꾸었다.

유일한 길이 막혔으니 왔던 곳을 되돌아가 다른 우회로를 찾아보려 한 것이다.

쿠르르르르르르릉 - - - -!!

하지만 이미 되돌아가기에는 늦었다.

앞에서부터 시작된 변화를 시작으로 또 다른 눈사태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쿠르르르르릉!

꺄아아아아악!

엄마!

규모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눈사태는 눈사태다. 아무런 대비조차 못 했던 행렬 가운데 사람들은 그대로 힘없이 쓸려나갔다.

“손을 잡으세요!”

“안, 안 돼!”

잘 유지되던 대열이 중앙부터 무너졌다.

순간 패닉이 온 조사관은 할 말을 잃었고 병사들 또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푸르륵!

나는 재빨리 고삐를 당겨 휘청거리는 검은 코를 통제했다. 그리고 움직임이 자유로운 검은 화살을 안장 아래로 내려 주었다.

“검은 화살! 사람들을 도와!”

“응!”

다행히 흰 뿔 사슴들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 주고 있다. 밧줄로 서로를 연결해 버틴다면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무언가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바로 이 인위적인 눈사태를 만든 원흉의 제대로 된 위치를 알기 위해서였다.

“- - - - - - - -.”

찌르르 울리는 신경, 당겨오는 목덜미. 그대로 검을 뽑은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절벽 위에는 뿌리와 풀로 이루어진 형태가 신기루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끼이이이이익.

여전히 형태가 흐린 상태다. 생명체에게서 느껴지는 기척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사념 뭉치만은 놈이 외부의 존재라는 걸 알려 주었다.

어둠은 본 모습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었을 뿐이었구나. 빛이 드러나는 장소에 당당히 선 놈은 그 역겨운 존재를 드러냈다.

까드드득!

오직 기사왕의 마지막 전투를 지켜보았던 나만이 정체를 알아볼 수 있다.

끝없이 움직이는 뿌리와 풀들이 형태를 이룬 놈의 진정한 본모습을 말이다.

“불멸왕.”

영원히 잠들었다고 생각한 불멸왕이 사념체를 통해 마수를 뻗어 오고 있었다.

빠르게 검을 뽑은 나는 그대로 사슴을 몰아 절벽 위 놈을 향해 달려갔다.

* * *

“아아아아아, 제발! 제발, 그만!”

“불멸왕이시여어어! 제발 세계수를!”

오직 기도하는 소리만이 들리던 세계수 뿌리 속 성역은 엘프 신관들이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비명으로 가득 찼다.

신관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의 어머니이자 주신인 세계수가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이, 이 무슨!”

신을 믿고 있었던, 믿지 않았던 세계수의 비명은 모든 엘프가 들을 수 있다.

당연히 고위 신관 또한 살려 달라는 간절한 외침을 듣고 성지로 달려왔다.

“아아아······!”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피를 토하는 신관들과 성지 한가운데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불멸왕의 호수였다.

막아야 한다. 왕께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수를 통제하고 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고위 신관은 불멸왕이 잠든 호수를 향해 재빨리 뛰어가려 했다.

“멈춰라.”

“······여왕님?”

그 순간 엘프 여왕이 앞을 막았다. 수도로 돌아간 줄 알았던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지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털썩.

불길함을 느낀 고위 신관은 차가운 엘프 여왕 발아래 힘없이 엎드렸다.

그리고 오른손을 부들부들 떨며 세계수를 통제하는 불멸왕을 가리켰다.

“지, 지금 불멸왕께서 하시려는 일은 배교입니다! 어찌 막지 않고 지켜만 보시는지요, 폐하! 이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동안 자행해 온 신성 모독도 모두 참았다. 오랜 규율을 어기고 세계수 열매를 빼돌린 것 또한 기꺼이 눈을 감아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엘프라는 종족이 바뀌었어도 세계수라는 근원을 이용하고 통제하려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소리를 지른 고위 신관은 자신을 막는 엘프 여왕을 뿌리치며 숨겨 두었던 검을 겨누려고 했다.

푹!

“아······.”

하지만 먼저 검을 휘두른 것은 처음부터 신관을 죽일 생각이었던 엘프 여왕이었다.

단칼에 심장을 꿰뚫은 그녀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시체를 치웠다.

“어리석구나, 아이야.”

이미 또 다른 씨앗은 심어졌다. 그것은 신이라 불리는 한낱 나무가 아닌 살아 있고 숨을 쉬는 엘프 신 그 자체다.

“그 너머를 보지 못했구나.”

불멸한 자를 왜 왕이라고 하는가, 불멸하며 태초 한 존재는 죽지 않는 신이다.

피 묻은 검을 조용히 내려놓은 엘프 여왕은 경건한 마음으로 입을 벌렸다.

“나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수년간 바라만 보아야 했던 성지 호수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 곧 잠에서 깨어날 위대한 불멸왕을 바라보았다.

“긴 세월을 넘어 영원이 되는 그 순간을.”

기사왕이 찔렀던 상처는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잘려 나갔던 팔 또한 재생되었고 자잘한 흉터는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죽음에서 깨어날 듯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불멸왕의 사념, 황홀함을 느낀 엘프 여왕은 무릎을 꿇었다.

‘끼이이이익!’

검은 망령이 내뱉었던 울음소리는 세계수의 비명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것은 위협을 위한 울부짖음이 아닌 살려 달라는 가녀린 신호였다.

푸른 호수 속 눈을 감은 불멸왕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세계수를 통해 버려낸 사념이 드디어 놈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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