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검은머리 기사왕 109화
‘다, 다들 부탁하길래 따라왔어.’
도대체 누구 발상인가 싶어 추궁했더니 범인은 눈투성이를 포함한 동료 전부였다.
혼자 떠난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몰래 검은 화살을 동행하게 한 것이다.
진실을 듣게 된 순간에는 당연히 어이가 없었다. 아니, 시간이 지나고 나니 동료들에게 처음 화라는 게 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해안 요새 방어와 더불어 국방에 큰 축을 담당해왔던 검은 화살이다.
아무리 내가 걱정된다고 해도 사령관급인 그녀를 빼 오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었다.
당연히 돌려보내야 하는 게 맞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어쩔 줄 몰라 헤매는 그녀에게 당장 수도로 복귀하라고 말했다.
‘흑.’
하지만 설득은 끝내 실패했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그녀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절대 방해 안 할게, 응?’
하필 함께하지 못한 시간과 지키지 못한 약속이 너무 많았던 검은 화살이었다.
여기서 억지로 돌려보낸다면 정말 검은 숲에 틀어박혀 영영 안 나올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게 결국 과거의 업보다.
나는 반나절이 넘는 고민 끝에 그녀의 두 번째 동행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푸르륵!
언제 울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뛰어오는 검은 화살. 졸지에 두 사람을 태우게 된 검은 코는 투레질과 함께 신경질을 부렸다.
‘무사히 다녀오세요, 기사님.’
그렇게 시끄러웠던 하루가 지나 어제보다 더 추운 겨울날이 찾아왔다.
새벽 일찍 일어난 우리는 잡화점에서 물건을 받은 뒤 그대로 내성으로 향했다.
다각, 다각, 다각.
“징수관이 사라진 건 확실히 수상하네. 병사들을 동행했을 텐데 말이야.”
“······도망친 건 아닐 거야.”
원래라면 바로 노스플롬을 빠져나와 고산 마을에서 길잡이를 찾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목적지였던 그곳에 이변이 생겼다고 하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영주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겠다.
여관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붉은 강철이 직접 설계하고 건설한 도시 내성을 향해 걸어갔다.
“정지! 무슨 용무입니까?”
노스플롬을 관리하는 영주와 파견된 병사들이 기거하는 도시 내성이다.
복장이 가벼웠던 초병과는 달리 중무장한 허스칼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영주를 뵙고자 왔다.”
왕권이 절대적인 북방 왕국에서의 영주는 반쯤 파견 관료라고 봐도 좋았다.
덕분에 알현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절차를 걸쳐 누구나 만날 수 있었다.
툭.
“급한 일이라고 전해라.”
물론 그런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리니 신분을 증명하는 게 더 편했다.
나는 검은 화살이 가지고 온 금박 인장을 꺼내 허스칼을 향해 보여주었다.
“조,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무려 수도 대신들과 사령관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금색 사슴뿔 인장이다.
깜짝 놀란 허스칼은 절도 있는 경례와 함께 서둘러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인장을 가지고 와서 다행이다.
자기 덕인 것을 잘 아는 검은 화살은 흐흥 새침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같이 오기를 잘했지?”
“······그러게.”
* * *
“장소가 변변치 않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준비를 해뒀어야 했는데.”
“괘념치 마십시오.”
왕국 모든 영주는 재상의 깐깐한 기준을 통과해 선별된 엘리트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노스플롬 영주 ‘바람 부는 언덕’ 또한 유능한 자였다.
검소하기 짝이 없는 집무실과 초라한 아침 식사만 보아도 청렴함이 보이지 않는가.
부끄럽고 켕기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우리 앞에서도 주눅들 일이 없는 것이다.
첫 만남치고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우리는 그렇게 거친 호밀빵과 싸구려 포도주를 나눠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고산 마을로 향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소문도 들으셨겠군요.”
“어쩌다 보니.”
“저희도 마침 조사관을 파견해 볼 생각이었거든요. 아예 소식이 끊긴지라······.”
실종된 징수관과 관련된 문제는 노스플롬 영주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혼란을 우려해 기밀을 유지했을 뿐이지 손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혹시 짐작 가시는 게 있습니까?”
“음, 그게 문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짐작 가는 부분이 없습니다.”
꾸준한 야만인 토벌과 치안 유지로 인해 북방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한 상태다.
하지만 그런 마당에 징수관이 실종되다니, 영주 입장으로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일단 병사는 차출해뒀습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출발하겠군요.”
이 왕국은 오직 북방인을 위해 세워진 나라다. 아무리 오지 마을이라 할지라도 왕국 영향권 아래 있는 백성들이라면 무조건 품에 안고 지켜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정신을 잊지 않은 노스플롬 영주는 기꺼이 영지 병사와 조사관을 차출해 고산 마을로 파견하고자 했다.
우리로서는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의중을 제대로 파악한 나는 서류를 들고 오는 노스플롬 영주를 향해 부탁했다.
“저희가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음, 진상을 파악하고 가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혹시 위험할지도·········, 아!”
혹시 모를 상황을 우려한 노스플롬 영주는 정중하게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우리가 누군지를 잊고 있었는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두 분이 함께해주신다면 저야 안심입니다. 조사관에게는 제가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 * *
북방 영토에 속하는 백색 관문과 수도 스노우가든도 분명 추운 지역이 맞다.
하지만 이곳 노스플롬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요, 태양 앞의 촛불이었다.
영주에게 듣자 하니 올해는 유난히 날씨가 추워 수확과 첫눈이 빨랐다고 했던가.
새벽부터 불어오는 눈발과 매서운 겨울바람은 우리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추, 추추추워!”
“호들갑은.”
“진짜 춥다니까!”
덕분에 추위에 약한 검은 화살은 내 등에 찰싹 달라붙어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
그나마 조사단과 함께라서 다행이지 혼자 왔으면 정말 큰일 날뻔했다.
“하하, 괜찮으십니까? 이정도면 따뜻한 편인데 산에선 각오 좀 하셔야겠습니다.”
“다들 타고난 북방인이군.”
“저희야 뭐, 이게 업이고 일상이죠. 다들 노스플롬 출신이라 익숙합니다.”
조사관을 포함한 총 10명은 전부 노스플롬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다.
덕분에 친해지는 데는 반나절이 걸리지 않아 고된 행군이 지겹지가 않았다.
“다들 자기들이 가겠다고 난리였습니다. 거기서 추리고 추린 녀석들이니,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부려먹으십시오.”
“낯부끄럽다.”
“경은 언제든지 그러셔도 됩니다.”
첫 화전민 정착지와 늑대 마을 주민들이 전부 합쳐져 만들어진 노스플롬이다.
그 당사자들과 후손들인 만큼 기사왕과 나를 도왔다는 자긍심이 대단했다.
오죽하면 반응을 본 영주가 다음 부임지로 어떻겠냐는 권유까지 해왔겠는가.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가슴 한편을 채우는 뿌듯함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푸륵!
고산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흙바닥은 보이지 않았고 차가운 동토만이 끝없이 이어졌다.
휘이이이이잉- - - -!
수시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멈추고 이동하기를 반복하는 행렬.
한 줄로 나란히 이동하는 사슴들 뿔에는 어느덧 눈이 소복하게 쌓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대가 높아질수록, 산세가 더 험해질수록 짙은 먹구름은 사라졌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치고 간다. 동시에 우리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와······!”
하얀 세상과 하얀 하늘이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능선이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태고의 땅, 이곳이 바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산맥이었다.
“다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오기도 합니다. 북방 어머니를 향한 순례길이죠.”
눈이 덮인 길 이곳저곳에는 귀여운 눈사람들이 안전한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북방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 방문한 북방 순례자들이 손수 만들어 둔 것이다.
눈이 녹지 않는 동토에서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삶을 기다리는 눈사람들이다.
문득 그리움을 느낀 내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자, 검은 화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지? 고향 말이야.”
“그래.”
이방인인 나에게도 고향이 있을 것이다.
물론 사라진 기억과 함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장소가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두 번째 고향인 고산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유조차 모른 채 방랑하던 야인의 삶과 기사왕을 만나 시작된 종자의 삶.
두 가지 인연이 공존하는 부러지는 검의 성지에서 나는 당당히 허리를 폈다.
“아들을 자랑스러워할 거야.”
“누가?”
“어머니 북방이.”
어머니 북방이시여, 당신의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넉살 좋은 위로에 웃음을 터트린 나는 어느새 눈이 그친 하늘을 바라봤다.
* * *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곧 도착합니다.”
노련한 조사관과 병사들 덕분에 아무런 걱정 없이 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길을 따라 걸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조사관이 오래된 이정표를 발견했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도 사람이 살아? 농사는 짓지도 못할 것 같은데······.”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척박함 속에 생명을 찾고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살지.”
고산 마을은 정말 오지 중 오지다.
만약 선대 기사왕의 탄생 설화가 아니었다면 마을은 여전히 왕국 영향권에서 벗어나 아는 사람만 아는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산을 찾아온 순례자들에게 있어 이보다 고마운 사람들은 없었다.
왜냐하면, 유난히 신실한 고산 마을은 훌륭한 중간 휴식처였기 때문이다.
기억 속 주민들만 해도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아직 잘 지내고 있을까.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과거의 자취를 느끼며 부지런히 사슴을 몰았다.
푸르륵!
“- - - - - - -?”
하지만 그 순간 잘 걸어가던 선두 병사가 깜짝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당연히 뒤따라오던 우리 또한 빠르게 정지했으며 대열은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조사관님!”
병사들 표정이 심상치 않다.
표정을 굳힌 조사관은 바삐 사슴을 몰아 선두를 향해 달려갔고 길 바로 앞에서 행렬을 멈추게 한 원인을 찾아냈다.
“젠장! 모든 주변 경계해!”
길 한가운데에는 파괴된 마차와 함께 흰 뿔 사슴시체가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병사들은 서둘러 무기를 꺼내 들었고 나와 검은 화살 또한 검을 뽑았다.
스르릉!
고산 마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실종된 마차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도착하기 전 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미 한 차례 격랑이 지나갔는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주변 숲과 길.
나는 조심스럽게 사슴을 몰아 조사관이 있는 선두를 향해 걸어갔다.
“······시체가 없습니다.”
길에는 파괴된 마차와 함께 얼어붙은 사슴 사체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디에도 징수관과 병사들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특히 무언가에 물어 뜯긴듯한 사슴들의 상처, 날짐승이나 늑대라고 하기에는 목을 뜯는 자상 크기가 너무나 커다랬다.
“쉽게 당할 이들이 아닙니다.”
“징수관이 살아있을 수도 있나?”
“그러기를 바래야죠. 일단 병사들을 데리고 마을부터 살펴봐야겠습니다.”
영리한 흰 뿔 사슴을 탄 북방 기병은 한낱 짐승한테 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무언가 강한 의문을 느낀 조사관과 나는 다시 병사들을 추려 고산 마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