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검은머리 기사왕 108화
백 마디 말보다 진실한 것이 있다.
우리에게는 휘둘렀던 검이 그러했고 춤을 추듯 어울렸던 한 폭의 무가 그러했다.
쌓아둔 게 없는데 앙금이라고 있겠는가.
눈물로서 모든 것을 털어낸 눈투성이는 드디어 나를 보내 줄 준비를 끝냈다.
‘기다릴게요, 스승님.’
제자는 끝까지 기다리겠노라 말했다. 스승은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눈투성이는 내 손아래 공손히 몸을 숙이며 달려왔던 길로 돌아갔다.
아이는 남쪽으로, 나는 북쪽으로.
항상 두 가지 발자국이 찍혔던 길은 잠시 갈림길이 되어 두 개로 나뉘었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고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맞잡았던 온기는 가시지 않는다.
나는 홀가분한 가슴을 가득 채운 따뜻함과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달렸다.
다닥! 다각! 다각!
푸르륵!
그리고 눈이 쌓여가는 길을 따라 얼마를 더 달렸을까, 마침 이른 새벽 떠오르는 여명과 함께 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스플롬.’
나와 눈투성이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자 북방 왕국의 시작을 알린 장소.
이제는 어엿한 도시로 발전한 노스플롬은 거대한 산 아래 잠이 들어있었다.
다각, 다각.
마침 겨울이라 한참 이뤄졌던 농사도, 벌목도 전부 휴식기에 들어섰다.
나는 수확이 끝난 보리밭을 가로질러 굳게 닫힌 성문을 향해 사슴을 몰았다.
“정지! 기수 정지!”
그러자 성벽에서 주변을 감시하던 한 부지런한 초병이 나를 불러세웠다.
왕국 최후방이라 경계가 허술할 법도 한데 반응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성문이 열리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 근처에서 추위라도 피하고 있으세요!”
해가 늦게 뜨는 겨울이라 그런지 성문을 여는 시각이 평소보다 늦다.
나는 친절한 초병을 향해 고개를 까닥 숙여준 뒤 안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푸르륵.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검은 코의 목덜미를 살살 간지럽혀준다.
그러자 녀석은 뜨거운 콧김을 훅 내뱉으며 노스플롬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래, 너도 알아보는구나.”
북방 왕국을 도와주고 있는 흰 뿔 사슴들은 모두 이 노스플롬에서 왔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으니 이 드넓은 숲과 평원이 고향인 것이다.
그걸 또 알아보는 영리한 녀석, 나는 촉촉 말랑한 검은 코를 쓰다듬어준 뒤 모닥불을 피우기 위한 땔감을 모으려 했다.
“혹시 수도에서 오신 분입니까?”
하지만 그 순간 머리 바로 위 성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문이 열리는 시간을 알려준 친절한 초병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습니다.”
“혹시 새로 부임하신 기사님은······.”
“아뇨, 이방인입니다.”
눈썰미가 상당히 좋은 그는 내가 차고 있는 검과 안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물음과 함께 한동안 고민하더니 이내 성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디 가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리세요!”
한참 경계를 서던 초병들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노스플롬 성문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끼이이익!
얼떨결에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고삐를 잡아당긴 나는 검은 코와 함께 열린 성문을 지나쳤고 이내 이쪽으로 다가오는 친절한 초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괜히 미안하게······.”
“하하, 아닙니다. 5분에서 10분 정도는 저희 재량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밖에서 나돌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얼어 죽을 수 있는 게 북방 겨울이다.
그것을 우려한 초병은 융통성을 발휘해 일찍 성문을 열어준 것이다.
“혹시 퇴역 기사십니까?”
아, 그래서 부임한 기사냐고 물었나. 흰머리, 흉터 가득한 얼굴, 기사단 안장과 허리에 걸린 검집 한 자루. 한눈에 보아도 퇴역 기사라고 생각할만한 차림새였다.
“따지고 보면······?”
“정말 영광입니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결국, 멋쩍게 웃어버린 나는 경례 후 손을 내미는 초병과 악수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온 노스플롬을 한 바퀴 둘러보고자 그에게 물었다.
“혹시 근처에 괜찮은 잡화점이 있나? 튼튼한 월동 장비를 구하고 싶은데.”
“튼튼한 월동 장비라······. 아! 제가 아는 곳이 있으니 그쪽으로 찾아가 보십시오. 물수제비가 알려줬다고 하면 잘해줄 겁니다.”
성문과는 그리 멀지 않은 위치다.
덕분에 많은 시간과 체력을 아낄 수 있게 된 나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푸르륵!
그리고 안장 위로 올라타자 검은 코가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여명을 지난 햇살은 정겨운 노스플롬을 잠에서 깨우고 있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기사님! 어머니 북방이 항상 함께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 * *
수도만큼은 아니지만, 노스플롬 또한 무역과 상업이 번영한 도시였다.
풍부한 산림에서 생산된 목재와 질이 좋은 가죽은 북방 최고로 쳐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도시 내부 시가지는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상인들과 노동자들이 잔뜩 붐비고 있었다.
분명 몇 년 전만 해도 거친 풀과 나무들만이 자라는 척박한 땅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살게 되었을까.
문득 그리운 추억과 먼저 어머니 북방 곁으로 떠나간 촌장을 떠올린 나는 희미한 웃음과 함께 잡화점을 문을 열었다.
딸랑, 딸랑.
“어서 오세요.”
잡화점은 노련한 기운을 풍기는 한 중년 남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록 작고 낡았지만 있을 것을 다 있어 보이는 내부 풍경을 보며 나는 물었다.
“저쪽에서 추천을 받고 왔는데, 혹시 괜찮은 월동 장비를 구할 수 있습니까.”
조금 무심해 보였던 중년 남성은 물수제비라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아하니 퇴역 기사시군요.”
“······그렇게 티 납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희는 알아봅니다. 특히 물수제비 녀석은 아버지가 북방군 출신이라 더 반가웠을 겁니다.”
“그럼 설마 당신도······.”
“예, 노스플롬 출신이죠. 스프링 로드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싸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잡화점 주인은 오른쪽 팔 대신 의수를 끼고 있었다.
기사왕을 위해 종군하던 중 팔을 잃고 결국 고향인 노스플롬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경.”
“- - - - - -!!”
같은 전장에서 싸운 병사 중 하나였다.
앞으로 내민 왼손을 빠르게 낚아챈 나는 반갑게 웃으며 어깨를 부딪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움직일 수 없는 남성의 오른쪽 의수를 보고 나니 차마 웃음으로는 감출 수 없는 감정이 물밀 듯 몰려왔다.
“정말 면목이 없다. 충분한 보상이······.”
“하하, 아닙니다! 재상님이 전부 챙겨주셨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잡화점도 받은 보상금으로 차린 곳입니다.”
재상은 역시 내가 신경 쓰지 못한 이런 부분까지 전부 챙겨주고 있었다.
그나마 아픈 가슴을 달랜 나는 참전 병사였던 남성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어디 여행이라도 가십니까? 전쟁도 다 끝난 마당에 월동 장비를······.”
“음, 북쪽에 볼일이 있어 가는 중이다. 아마 고산을 오를 것 같아서 말이야.”
“한겨울 고산이면 만만치 않겠군요. 왜 가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하나하나 철저하게 챙겨서 내일 오전까지 준비해두겠습니다.”
준비가 소홀해서 걱정이 컸는데 다행히 제대로 된 적임자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치를 값보다 훨씬 많은 은화 주머니를 꺼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경.”
“음?”
하지만 그 순간 한참 물건을 찾던 남성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누가 듣기라도 할까,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요즘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고 있습니다.”
“소문?”
“고산 아래에도 북방인 마을이 있지 않습니까?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거기로 향한 관료들이 돌아오지를 않는답니다.”
내가 최종 목적지로 생각한 고산 근방 마을들은 엄연한 북방 왕국의 영토이다.
당연히 영향권 아래 두어 보호하고 관료를 파견해 세금을 걷어왔다.
하지만 올해는 무슨 일인지, 마을로 향한 징수관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물론 파견한 병사들 또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국왕이 준엄하고 왕국이 평화로운 와중에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노스플롬 영주는 아마 자기 선에서 끝내려 한 모양인데 소문이라는 게 원래 빨랐다.
“그래서 혹시 몰라 말씀드렸습니다. 경도 그쪽으로 가시지 않는 게······.”
“알려줘서 고맙다. 그래도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는 없지.”
혹시 아직 북방에 남은 오크 잔당들이나 다시 준동한 야만인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마침 고산으로 향하는 여정 중 사건을 알게 되었으니 적어도 진상은 알아야 한다.
그저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던 나는 중년 남성과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노스플롬 근처 정세를 알아내었다.
짤랑짤랑!
“너, 너무 많습니다!”
“내 작은 성의다.”
나는 가지고 온 은화 주머니 대부분을 털어 책상 위를 돈으로 가득 채웠다.
원래 복수는 날카로운 칼로 은혜는 빛나는 은화로 갚아야 면목이 사는 법이었다.
비록 내일 이후로는 더 이상 보지 못하겠지만, 앞으로 찾아올 여생, 새로운 인연과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랬다.
“그럼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
“네, 준비해두겠습니다.”
준비는 내일 끝난다고 했던가. 그렇게 기분 좋은 해우를 끝마친 나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잡화점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쨍그랑!
히히히히힝!
하지만 문을 반쯤 연 그 순간 사슴이 날뛰는 거친 투레질과 함께 한 여성이 내지르는 비명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꺄아악! 놔! 이거 놓으라고 이 망아지야!”
잠시 밖에 세워둔 사슴 검은 코다.
깜짝 놀란 나는 잡화점을 뛰쳐나오며 거세게 날뛰는 검은 코를 향해 달려갔다.
“워! 워워! 진정해!”
흥분한 녀석이 날뛰면 아무리 병사를 동원해도 인명 피해는 막을 수 없다.
황급히 고삐를 쥔 나는 무언가를 물고 흔드는 검은 코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으기약!”
“?”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흥분한 줄 알았던 검은 코는 생각보다 멀쩡했고 대신 엄청 신이 나 보였다.
연신 얼굴과 머리카락을 가리려는 정체불명 여성과 그런 그녀에게 왜 자신을 모른 척하냐는 듯 옷깃을 툭툭 당기는 검은 코.
얼떨결에 고삐를 놓은 나는 설마 진짜겠냐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버둥거리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씨익! 씩!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가 벗겨진다.
그러자 얼굴이 사슴 침으로 범벅이 된 한 하프 엘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까무잡잡한 피부, 뾰족한 귀, 등에 메고 있는 엘프 활과 날카로운 화살들.
순간 어이가 없어진 나는 친우이자 옛 영웅인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검은 화살?”
“이익······!”
검은 화살은 내가 엘릭서를 거부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수도와 멀리 떨어진 이 노스플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따라온 거냐?”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검은 화살이 결국 붉게 물든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다.
그리고 그 모습에 의기양양해진 검은 코는 목을 곧게 펴며 투레질했다.
푸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