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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07화 (107/181)

107화

검은머리 기사왕 107화

깡! 깡! 깡!

화르륵!

북방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왕립 대장간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오늘도 수많은 대장장이가 망치를 들었다.

마치 눈처럼 녹아내리는 쇳물과 두드릴 때마다 떨어져 나가는 무수한 불순물.

나는 뜨거운 열기 속, 강철이 재탄생하는 과정을 넋 놓고 지켜보았다.

인간도 저리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원 없이 휘두르는 검이 되어 운명마저 가를 수 있을 터인데.

나는 어느덧 완성되어가는 또 한 자루의 검을 마지막으로 대장간 중심이자 가장 큰 태고 불 화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이!”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한 인물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오랜 친우이자, 믿음직한 조력자, 4년이 지나도 여전한 붉은 강철이었다.

“오랜만이다!”

“더 젊어진 모양이다, 강철.”

“하하! 너도 결혼해서 애 낳아라! 하루하루가 정말 젊어지는 기분이니까!”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사랑을 찾은 붉은 강철은 3년 전 첫 아이를 보았다.

다행히 노산에도 불구하고 산모는 무사했으며 아이 또한 튼튼한 우량아였다.

붉은 강철은 이제 왕국은 물론이고 한 가정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런 친우와 오랜만에 오른손을 맞잡으며 반가운 해후를 나누었다.

“소식은 들었다.”

“······음.”

관직에서 물러나 가정과 대장간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붉은 강철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번 소식은 들었는지 조금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 최선을 다한 만큼 빨리 지나간 모양이야.”

“많이 부족했다.”

“자책하지 마라, 부러지는 검. 원래 변화에는 고통이라는 게 따르는 법이야.”

수많은 파괴와 창조를 지켜봐 온 붉은 강철은 이 또한 과정이라 위로했다.

그리고 나는 현명함이 담긴 그 한마디에 친우와 잡았던 손을 조용히 놓았다.

“고맙다.”

떠나기 전 인사는 거기서 끝이었다.

굳이 긴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붉은 강철과 나는 많은 것을 주고받았다.

“바깥 안뜰에 들고 갈 검을 준비해뒀다. 회색 늑대가 길을 들이고 있으니, 인사도 할 겸 꼭 받아서 가지고 가.”

대장간 업무와 가정으로 바쁠 텐데 언제 내가 쓸 검을 만들어두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와 함께 열기로 가득한 대장간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바깥 안뜰로 통하는 복도를 지나가자 언제 땀을 흘렸냐는 듯 차가운 북방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이건 검이 만들어낸 바람이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안뜰에는 회색 늑대가 마음껏 겨울 검무를 추고 있었다.

사박, 사박!

부웅 - -! 츠즈즈즉!

콧대 높게 태어난 명검도 최고의 허스칼 앞에선 온순한 양 한 마리가 될 뿐이다.

내가 가져가게 될 검에 작은 열기를 더해준 회색 늑대는 어느덧 검무를 멈추었다.

“완벽한 검은 아니다. 하지만 쉽게 부러지지도, 쉽게 녹슬지도 않지. 붉은 강철이 너를 떠올리며 만든 모양이야.”

“하하, 명검은 아니겠군.”

“아니, 명(明)검이다.”

숨과 함께 눈을 감은 회색 늑대는 슬피 우는 검을 조용히 진정시켰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검은색 가죽 검집에 검을 넣어준 뒤 내게 내밀었다.

“받아라.”

손잡이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었다.

나는 마치 그 온기와 악수하듯 검은색 검집을 왼쪽 허리춤에 매달았다.

내 체구에 딱 맞춘 적당한 길이와 무게, 거슬리지 않는 무게중심은 험난한 여정을 염두에 둔 붉은 강철의 안배 같았다.

그리고 내가 검을 챙기는 것을 끝으로 떠날 준비를 끝내자, 두 눈을 감고 있던 회색 늑대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꼭 가야 하나?”

“찾고 싶은 것이 있다.”

“재상을 조금만 더 믿어다오. 분명 치료할 방법을 찾겠다고 약조했는데······.”

“그걸 원하는 게 아니야.”

정해진 죽음은 겸허하다. 나는 언제든지 그 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죽음이 아무리 재촉할지라도 이 한 가지 갈증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 - - - - - -.”

한동안 마주한 눈동자에서 수많은 감정이 오고 갔다. 그리고 끝내 먼저 고개를 돌린 사람은 바로 회색 늑대였다.

“······네가 그리 선택했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겠지. 부디 몸조심해라, 부러지는 검.”

“고맙다.”

북방 최고의 허스칼이 있었기에 언제나 등을 맡기며 싸워올 수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왕국을 부탁한다는 짧은 대답과 함께 안뜰을 빠져나왔다.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그러자 출구 옆으로 필요한 짐을 안장에 실은 흰 뿔 사슴이 살금살금 다가왔다.

영리한 녀석, 기다렸구나. 검은 코를 쓰다듬은 나는 그대로 안장 위에 올라탔다.

다각, 다각, 다각

쭉 도로를 걸으며 바라본 스노우가든은 여전히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무엇하나 바뀌지 않고, 평화가 가져다준 따뜻한 행복을 만끽한 채 말이다.

그래, 겨우 하나 덜어낸다고 바뀌지 않는다. 세상 속 작은 한 줌이었던 나는 그대로 사슴을 몰아 수도를 빠져나왔다.

* * *

다각! 다각! 다각!

마침 겨울이라 통행량이 적다.

덕분에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게 된 나는 한산한 길을 마음껏 달렸다.

“후우······.”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달릴 수만은 없었다. 나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배경 삼아 머릿속 계획을 천천히 정리한다.

‘태초, 그리고 산.’

고산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온갖 위험이 상주한다.

그러니 빠르게 다녀올 생각일랑은 일찍이 접고 철저한 준비를 해둬야 했다.

일단 북쪽에 있는 거점 중 가장 크고 친숙한 노스플롬으로 향한다.

거기서 제대로 된 월동 장비와 보존 식량을 구한 뒤 계속해서 북쪽으로 올라갈 것이다.

내 기억상으로는 분명 고산 근처에도 터를 이루며 사는 북방인이 있다.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에게서도 도움을 받아야 했다.

1년 내내 내리는 눈으로 인해 수시로 지형이 변한다는 고산의 만년설.

나는 제발 어머니 북방이 별로서 인도해주기를 기도하며 다시 고삐를 쥐었다.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하지만 그 순간 열심히 길을 달리던 사슴이 거친 투레질과 함께 걸음을 멈췄다.

본능이 예민한 까만 코는 무언가가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 - - - - - -.”

흰 뿔 사슴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우두머리, 하얀 바람이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면 녀석에게 인정을 받은 주인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소리다.

“눈투성이.”

흩날리는 검은 머리, 눈물로 젖은 눈가, 그 얼굴을 확인한 나는 안장에서 내려 기다리고 있던 아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

언성을 높였었던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나와 만나주지 않은 눈투성이다.

하지만 속에 품은 감정은 결코 원망은 아니었는지, 얼굴에는 슬픔만이 가득했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나는 빠르게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때가 떠올라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은 없잖아요.’

되돌리지 못할 실수를 범했다.

나는 그동안 겪어왔던 모든 경험을 다 전수해줬으면서도 단 한 가지, 세상 아래 홀로 서는 법을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스승님.”

“그래.”

스르릉.

길을 막은 눈투성이는 검을 뽑았다.

비록 그날처럼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지만, 얼굴에는 의지가 가득했다.

“······여긴 지나가실 수 없어요.”

그래, 끝내 막으려고 왔구나.

왕궁에 틀어박혀 울기만 하던 눈투성이는 떠나려는 나를 막고자 검을 뽑았다.

쏴아아아 - - - -.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길게 자란 풀들은 파도만큼 흔들렸고 그 위에 내린 흰 눈은 물거품처럼 일그러졌다.

세상에는 오직 둘 만남은 기분이다.

왕이 되고자 맹세했던 첫 번째 겨울처럼 스승과 제자는 흘러간 시간 위에 섰다.

스릉.

나아가야 하는 자와, 막아야만 하는 자.

더 이상 물릴 수 없음을 자각한 나는 마찬가지로 무거운 검을 뽑았다.

그러자 주변 기류가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하며 아릿한 감각이 목덜미를 찔렀다.

그동안 안배를 두었던 대련과는 다르게 눈투성이는 진심이 된 것이다.

츠즈즈즈즉.

왕의 검 끝에 오러가 맺힌다.

그것은 응집이라는 단계를 넘은 완벽한 오러 발현이었으며 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저런 경지까지 올랐는가.

눈투성이는 진심으로 스승인 나를 막고자 가진 역량을 총동원했다.

부풀어 오른 숨, 멈추는 바람.

그리고 기사왕이 온다.

채애앵!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번 방어로 검날은 물론이고 쥐고 있는 손잡이까지 중심이 뒤틀렸다.

아마 붉은 강철이 만든 검이 아니었다면 방금 일격으로 부러졌을 것이다.

회색 늑대를 떠올리게 하는 오러 앞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사각을 노렸다.

챙!

하지만 너무나 쉽게 막혔다.

마치 짐승처럼 공격에 반응한 눈투성이는 공중제비를 돌아 바닥에 착지했다.

스승이라고 봐주고 있었구나.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결연한 의지를 눈투성이 얼굴에 한 아름 맺혀 있었다.

스으으으.

여기서 손속을 둔다면 모욕이다.

검 손잡이를 다시 고쳐 잡은 나는 작게 뜬 입술 사이로 숨을 들이켰다.

늙고 병들어도 감각은 여전하다.

침체되어있던 퇴적물들은 한순간 일으켜내자 흔들렸던 팔이 제대로 움직였다.

챙! 채앵! 챙!

많은 검을 나눴기에 작은 버릇, 움직임, 패턴까지도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착각이라는 건 이번 공격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탁!

바닥을 박차고 뛰어 몸을 날렸다.

그리고 허수, 허수, 또 한 번 허수를 섞어 불필요한 움직임을 끌어냈다.

후웅, 통! 툭!

변칙적인 공격이 끝없이 이어진다.

오른손, 왼손, 검을 쥔 손은 수시로 바뀌었고 중심축 또한 변화무쌍하다.

물론 오러를 잊은 것은 아니다.

나는 최대한 검이 닿지 않는 회피를 통해 검날, 검집, 검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익······!”

술의 다양성이 큰 장기라고 생각했던 눈투성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것 같은 착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눈물을 털어낸 눈투성이는 처절한 고함과 함께 오러를 끝까지 쥐어짰다.

쾅! 치지지직!

투기가 뿜어져 나온다. 저돌적인 돌진은 위협적이었고 검 끝은 날카로웠다.

나는 손잡이 가드를 맞대 밀어내는 것으로 그 저돌적인 돌진을 막아내려고 했다.

탱!

비틀!

하지만 눈투성이는 중심이 흔들렸음에도 불구하고 기합과 함께 달려들었다.

그리고 오러가 맺힌 검으로 상단으로 취한 뒤 모든 수를 담아 휘둘렀다.

신기루처럼 선이 여러 개로 나뉜다.

맹렬한 오러는 한순간 완성 단계까지 근접했고 속도 또한 무척이나 빨랐다.

“- - - - - - - -.”

내가 알려주지 않은 검술이다.

막을 수 없는 위기를 직면한 눈투성이는 기어코 즉흥적인 검술을 찾아낸 것이다.

툭.

훌륭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다.

날아오는 오러를 정면으로 마주한 나는 심장을 겨눴던 검을 그대로 내렸다.

“아······!”

그러자 눈투성이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수천 개 장면으로 잘리는 장면 사이로 맑은 눈물이 겨울바람을 타고 휘날렸다.

매번 이렇게 우는구나. 그날도,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모든 것이 내게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후웅!

검날이 급소 바로 옆을 지나갔다.

내가 미련 없이 검을 놓았듯, 눈투성이는 처음부터 스승을 벨 생각이 없었다.

땡그랑!

눈투성이는 들고 있던 눈을 놓쳤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후회와 아픔으로 점철된 두 눈을 파르르 떨었다.

“······왜 막지 않으셨어요?”

“빠르고 강했다.”

나는 검을 내려놓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눈투성이가 된 눈투성이를 천천히 일으켜 꽉 끌어안아 주었다.

“내가 진 거지.”

방금 검을 통해 알려주었다

보내주는 법과 홀로 서는 법,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음을 말이다.

엉엉 울음을 터트린 눈투성이는 결국 품에 안겨 왔고 이내 서러운 눈물이 아닌 보내주기 위한 미련을 흘려냈다.

나는 말 없이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해주리라 다짐했던 갈림길의 추억을 눈투성이를 향해 말했다.

“넌 내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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