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검은머리 기사왕 106화
“왜 그런 제안을 하셨습니까?”
독대를 함께 했던 고위 신관이 면사포 속 표정을 드러내며 의중을 물었다.
그러자 엘프 여왕은 노예가 입에 넣어주는 포도를 씹으며 대답했다.
“무엇을 말이냐.”
세계수 열매로 만든 엘릭서는 천금을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귀한 물건이다.
만약 협상 대상이 개인이었다면 눈에 불을 켜고 무조건 성사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수많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라면 그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릇 왕이란 한낱 개인의 영달보단 왕국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제가 본 기사왕은 타협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한낱 인간 한 명을 살리기 위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겠습니까?”
양국 간 동맹이 성사된다면 북방과 동부는 좋든 싫든 이 전쟁에 끼어들어야 한다.
대의도 명분도 없는 이 무의미한 분쟁을 위해 희생을 강요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정의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기사왕이 제 손으로 불의를 선택하겠는가?
신관은 이번 외교가 수없이 많은 선택지 중에 가장 어리석은 하책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하지만 엘프 여왕은 그런 당돌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불쾌해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흥미로운 눈동자를 빛내며 고위 신관을 향해 말해주었다.
“결국, 한낱 인간이지.”
열 달을 어렵게 태어나, 너무나 쉽게 죽는다. 툭하면 병들고 주어진 수명 또한 짧다.
채 100년도 살지 못하는 하등 생물. 인간들은 그렇게 도태될 종족이었다.
하지만 그런 오만하고 건방진 엘프 여왕조차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못했다.
바로 그런 열등한 종족 사이에서 태어난 위대한 별의 존재를 말이다.
“검성은 다르다.”
북방을 통일한 기사왕이 황금시대라는 커다란 청사진을 그렸다면 그것을 하나하나 채워놓은 것은 바로 검성이다.
비록 오러가 없다는 이유로 항상 저평가를 받아왔지만, 모든 뼈대와 기둥 뒤에는 그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보아라, 새로운 기사왕을 세우고 영웅을 결집한 자가 누구인지를.
한낱 인간으로 치부하기엔 그의 여정은 북방과 동부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엘릭서를 주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엘프 여왕이 제 입으로 그리 말한다면 검성이라는 존재는 빨리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엘프 여왕은 도리어 항아리 속 엘릭서를 꺼내며 조용히 읊조렸다.
“아니, 내가 원하는 건 혼란이다.”
이 작은 엘릭서는 혼란을 줄 것이다.
받아 마신다면 배신감을 느낀 인간들의 혼란을, 받아 마시지 않는다면 수명을 다해 죽을 검성 뒤에 혼란을 말이다.
스승을 살려야 하는 인간 눈투성이와 백성을 살려야 하는 국왕 눈투성이 중, 먼저 의지를 꺾을 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처음부터 동맹이 목적이 아니었던 엘프 여왕은 엘릭서를 소중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황홀한 눈빛으로 입구를 봉합한 뒤 항아리를 고위 신관에게 인계했다.
“이건 불멸왕 폐하께 진상해라.”
물론 어떤 선택을 하던 놈들에게 돌아갈 진품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교활함에 잔뜩 질려버린 고위 신관은 얌전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 *
“저 말이 사실이에요?”
“다 설명해주마.”
“······그럼 왜 제게 거짓말하셨어요?”
“진정해라.”
“왜 괜찮다고 했어요. 아무렇지 않다며요! 분명 다 치료했다고, 아픈 곳 하나 없다고 저한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나는 울음을 터트리는 눈투성이 앞에 더 이상 진실을 속일 수 없음을 직감했다.
여기서 더 거짓말을 해봤자, 상처받는 것은 혼란스러운 눈투성이뿐이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떠나면 제가 덜 슬퍼할 줄 알았어요? 미워요! 스승님이 밉다고요! 저, 저한테는! 저한테는!”
눈투성이는 처음으로 내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후회한다는 말과 함께 항상 안겨 오던 가슴팍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하지만 진심이 아님을 안다.
몸이 상하기라도 할까, 섣불리 싣지 않는 힘은 가슴을 더욱 아려오게 했다.
“제발.”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무력해질 만큼 느낄 만큼 비참한 일이었나.
나는 가슴을 치는 주먹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털썩.
결국, 제 감정과 발버둥을 이겨내지 못한 눈투성이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나는 서둘러 손을 뻗으려 했지만, 아이는 처음으로 손을 쳐냈다.
탁!
바닥에 주저앉은 눈투성이가 눈물이 가득한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입가를 천천히 열어 절대 나오지 말았어야 할 말이 내뱉었다.
“엘프와 동맹을 맺을 거예요.”
“눈투성이!”
겨우 엘릭서를 얻기 위해 숙적이나 다름없는 엘프 놈들과 동맹을 맺는다. 깜짝 놀란 나는 결국 언성을 높였다.
“놈들은 교활하다. 절대 엘릭서를 그냥 넘겨주지 않을 거야. 너를 꽤 내려는 함정일 걸 왜 모르는 것이냐!”
선악과를 노리는 뱀의 속삭임이다.
엘프는 약속을 지키지도 않을뿐더러, 독이 든 성배를 내밀며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엘릭서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눈물을 흘린 눈투성이는 듣기 싫다는 듯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비명과 함께 내뱉는 처절한 외침은 굳건했던 의지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나는 부러지는 검이 지어주었던 이름 대신 그 뒤에 짊어진 무거운 의무와 책무를 다시 한번 자각하게 해주었다.
“너를 따르는 이들을 생각해라, 기사왕.”
“- - - - - - -!!”
그러자 거짓말처럼 떨림이 멈추었다.
왕의 재목과 타고난 핏줄이 눈투성이를 잠시 기사왕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절대 흔들려서는 안 된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눈투성이의 양쪽 어깨를 꽉 잡아주며 끝까지 설득했다.
“그동안 잘 해왔다. 나와 선왕이 하지 못한 일을 네가 꿋꿋이 해낸 거야. ”
나는 아이에게서 큰 꿈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감히 품을 수 없는 드높은 이상이었으며 동시에 얼어붙은 동토를 녹일 수 있는 커다란 태양이었다.
“흔들리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척박했던 북방 위에 새로운 세상을 여는 거야.”
“그 세상에는······.”
흘러내린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눈투성이가 끝내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황혼을 앞둔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을 조용히 내뱉었다.
“스승님이 없잖아요.”
* * *
후웅, 서걱!
스웅, 후웅! 훙!
상념을 지우고자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둘러보아도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다.
허억, 헉.
언제 이렇게 숨이 차올랐지?
허탈함을 느낀 나는 시선을 돌려 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 - - - - - -.”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겨우 이 정도 움직임도 이겨내지 못해 삐거덕거리는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 돌아보고 나서야 보이는구나.
모두에게 주어졌던 공평한 시간은 이방인인 나에게도 피해가지 않고 찾아왔다.
‘부러지는 검은 늙고 병들었다.’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꿈을 꾸느라 연약해졌던 내 마음은 현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계속되리라 생각했나.
모든 것을 인정하게 된 순간 나는 들고 있던 미련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쨍그랑!
미련은 바로 검이었다.
항상 나와 함께 하던 검이 사라지자, 지독하리만큼 추운 고독함이 찾아왔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하지만 그런 침묵도 잠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수풀 사이로 누군가 걸어왔다.
바로 내가 갈아입을 의복과 물을 챙겨주기 위해 온 재상 기억하는 새였다.
“검성, 저예요.”
“······회담은.”
“무사히 끝났어요.”
엘프 여왕은 동맹 제안을 끝으로 바다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처음부터 독대가 목적이었기에 굳이 회담을 이어갈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 귀쟁이 새끼들이!’
당연히 엘프 여왕이 없는 회담은 더 이상 이어갈 이유가 없어졌고 3황자는 분노와 함께 자리를 파토 내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정말 전쟁뿐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멍청한 두 황자는 서둘러 부대를 이끌고 엘프 왕국과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선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로선 아쉬울 게 없었다.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었고 의도치 않게 평화를 보장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든 군대가 돌아간 것을 확인한 다음 날 오후, 온종일 숙소에서 칩거하고 있던 눈투성이가 폭탄 발언을 했다.
‘엘프와 동맹을 맺겠어요.’
‘폐하!’
수뇌부들은 당연히 혼란이 빠졌다.
갑자기 엘프와 동맹을 맺겠다는 두 국왕의 선언을 물론이고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돼버렸기 때문이다.
엘릭서로 검성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는가. 놈들이 준 약이 진품일 확률은? 만약 동맹해야 한다면 기한은 얼마인가!
중요 관료들이 전부 모인 회의에는 온갖 안건들이 줄을 이어 나왔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갑론을박이 끊이지를 않았다.
물론 그중에 반대하는 관료는 없었다.
무려 두 국왕이 이를 원하고 검성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누가 앞을 막아서겠는가.
그렇게 이틀 동안 이어진 회의 결론은 끝내 엘프와의 동맹으로 기우는 듯했다.
하지만 최종 재가로 올라간 서류에 붉은색 직인이 찍히는 일은 결단코 없었다.
‘불가.’
‘불가.’
‘불가.’
부러지는 검, 기억하는 새, 회색 늑대.
북방 왕국의 기둥이자 개국공신인 그 셋이 반대표를 던지며 모든 것을 무산시켰다.
항상 충성으로 눈투성이를 따르던 재상과 원수 그리고 기사단장이 처음으로 왕의 뜻을 거역하며 설득에 나선 것이다.
‘·········다들 물러가세요.’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그들이 정면으로 언쟁을 벌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심신이 지쳐버린 눈투성이는 조용한 축객령과 함께 칩거에 들어갔다.
속이 얼마나 상했으면 그랬을까.
기억하는 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움받는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은 정말 몰랐네요. 가슴이 너무 아파요.”
“면목이 없다.”
그녀와 회색 늑대를 끌어들인 것은 나다.
그나마 오래 살았고 많은 죽음을 보아온 동료들이기에 설득이 더 쉬웠다.
물론 동료들이라고 반발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평생을 꿈꿔온 간절함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힘을 보태주었다.
덕분에 일단 급한 불은 껐다.
나는 그제야 물로 목을 축이며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정말 가시게요?”
“잠시 다녀올 뿐이다.”
내가 왕국에 남아있으면 동맹과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 언급될 것이다.
그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는 내가 잠시 떠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폐하께서 슬퍼하시겠네요.”
“극복해낼 거다. 내 제자니까.”
죽음은 막을 수 없다.
한 시대를 살아온 나 또한 이 땅 위에 스러진 선조와 영웅들처럼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시간이 허락해준다면 나는 이루지 못했던 마지막 창공을 날고 싶었다.
베지 못했던 것을 베기 위해, 부러지는 검이 마지막 수련을 떠날 차례가 왔다.
“목적지라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선왕의 묘를 보고 올 거다.”
이방인이 처음으로 눈을 떴던 고산이자 선대 기사왕이 묻힌 북방의 태산.
최종 목적지는 여정의 시작과 끝이 전부 담겨있는 백색 성지가 될 것이다.
“······가시기 전에 친우분들을 뵙고 가세요. 제게 언질을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고맙다.”
기억하는 새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꼭 해답을 찾아 돌아오세요.”
철새도 둥지가 있을진대,
이방인의 안식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