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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05화 (105/181)

105화

검은머리 기사왕 105화

대륙 평화라는 명목으로 모인 회담은 당연히 1시간 만에 파토가 났다.

엘프 여왕과 3황자 간 대립으로 인해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교적 성과가 꼭 필요했던 1황자는 놈답지 않은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했고 회담을 결국 하루 더 연장했다.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와중에 또 거부는 하지 않는 엘프 여왕과 3황자.

회담에서 유일하게 발언이 없었던 우리는 그 자리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렇게 덧없는 시간이 지나 밤이 깊었다.

놈들이 각각 평원 밖 국경과 해안에 숙영지를 건설한 걸 확인한 수뇌부들은 휴식을 명령한 뒤 드디어 한자리에 모였다.

가장 먼저 눈투성이가 피곤을 호소했다.

“······머리가 아프네요.”

가뜩이나 적군 부대를 신경 써야 하는 마당에 각국 최고 실력자들이 내뿜는 오러와 기운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눈투성이와 리처드가 아무리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하더라도 괴물 그 자체인 놈들 앞에서는 아직 모자란 감이 있었다.

재상은 특별히 정신 회복에 좋은 약차를 그 둘에게 먹이며 오늘 밤만이라도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그래도 덕분에 많은 걸 알았다.”

하지만 전혀 성과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회담장에서 오고 간 욕설을 통해 유추했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현 대륙을 케이크처럼 잘라봤을 때 나오는 전력비는 정확히 4 : 4 : 2다.

당연히 엘프, 오크, 인간 순이며 예부터 크게 변하지 않는 객관적인 수치였다.

북방이 왜 그토록 백색 관문에 목을 매고 수복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내했는가.

8:2라는 불리한 싸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수성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인간의 몰락이 주목적이었던 과거와 세력 구도가 달랐다.

혜성처럼 등장한 3황자라는 존재가 엘프 왕국을 적으로 돌린 것이다.

3황자를 버릴 수 없는 1황자, 귀족과 왕족들 눈치를 봐야 하는 엘프 여왕.

아마 이번 전쟁은 한쪽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쉽게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건.

“······다시는 없을 기회다.”

대륙 2강이 맞붙은 상황에서 가장 이득을 볼 수 있는 세력이 어디겠는가.

바로 그동안 강대국들 사이에서 당하기만 했던 우리 북방과 동부였다.

“전쟁은 반드시 길어져야 한다.”

인간들에게 있어 가장 부족했던 것은 강력한 군대도, 물자도, 승리도 아닌 바로 문명과 역사를 발전시켜나갈 시간이었다.

겨우 4년 동안 이토록 튼튼히 초석을 쌓아왔는데, 더 오랜 평화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얼마나 찬란한 문명을 이룩할 수 있을까?

나는 선왕이 입을 열 때마다 언급했던 새로운 인간의 시대를 떠올리며 벅차오르는 숨과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웅성웅성.

“경들은 들으세요.”

그리고 긴 회의 끝에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구체적인 노선이 정해졌다.

고민을 끝낸 눈투성이와 리처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왕좌에서 일어났다.

“저희에게는 숙원이 있었습니다. 선왕을 죽이고 왕국을 멸망시켰던 저 악적들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오랜 염원이었죠.”

“당연히 이 염원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치욕 또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전쟁이 아닙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군대를 끌고 가 놈들의 숙영지를 습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복수지 왕국과 백성들이 원하는 평화가 아니었다.

“동토를 녹일 때입니다.”

오랫동안 얼어있던 동토를 녹이고 그 위에 찬란한 문명을 꽃피울 때다.

엄숙한 선언 앞에 의자에서 일어난 모든 영웅이 기꺼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뜻대로 하소서, 폐하.”

그 어떤 세력도 돕지 않는다. 또한,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울 게 두지 않을 것이다.

가장 긴 전쟁을 목표로 한 우리는 그렇게 늦은 밤 회의를 마무리하려 했다.

다각, 다각, 다각!

길을 비켜라!

펄럭!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하지만 그 순간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웅성거림과 함께 천막 문이 열렸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관문 방어를 담당하는 지휘관이었다.

“조금 전 관문 앞으로 찾아온 엘프 사절단이 폐하 두 분과 독대를 청하고 있습니다.”

감히 한낱 사절단이 약속 없이 찾아온 건 고사하고 무려 왕과 독대를 청하고 있다.

과거, 엘프 사절단과 있었던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 눈투성이는 단호히 거절했다.

“받지 않겠다고 전하세요.”

하지만 관문 지휘관은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그는 천막 밖 이들이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엘프 여왕이 직접 왔습니다.”

* * *

‘여차하면 신호 보내줘. 여왕이고 나발이고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줄 테니까.’

빠르게 소집된 기병대는 언제든지 출진할 수 있도록 완전 무장을 끝냈다.

그리고 장거리 저격이 가능한 검은 화살 또한 관문 위에서 상황을 대비했다.

엘프 여왕이 약속한 인원이 오직 셋.

기사왕 눈투성이와 동부왕 리처드, 그리고 끝내 동행으로 결정된 나는 관문 앞 타오르는 등불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그러자 곰방대로 무언가를 피우고 있는 엘프 여왕과 함께 얼굴을 면사로 가린 신관 두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대로 무장은 하지 않았다.

주변에 아무런 함정도 없음을 확인한 나는 왕들과 함께 등불 앞으로 다가갔다.

“후우.”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엘프 여왕은 털어낸 곰방대와 함께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나른한 눈동자로 우리를 한차례 훑어본 뒤 붉게 물든 입술을 열었다.

“반가운 얼굴이군.”

수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늙기는커녕 가증스러운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는 아름다운 가면 뒤로 역겨움을 감추고 있는 여왕을 향해 기운을 발산했다.

츠즈즈즉!

“폐하 앞이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 오러로 눈투성이와 리처드를 조용히 압박하는 엘프 여왕이다.

발산 한 번으로 그 기세를 지워버린 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경고했다.

“············.”

“그러니 용건만 말해라.”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면 회담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독대를 청하는 것으로 보아 1황자가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지.”

엘프 여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뿜은 연기와 함께 곰방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동맹을 요구하러 왔다.”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존재는 바로 1황자의 후방을 위협하는 우리였으니까.

하지만 설마 사과 한마디 없이 이런 뻔뻔한 요구를 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연히 눈투성이는 격노했고 리처드 또한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뻔뻔한······!”

“너무 날을 세우지 않았으면 좋겠군, 기사왕이여. 국익을 위한 외교 자리에 한낱 감정은 조금 사치스럽지 않은가.”

여전히 거만한 태도를 거두지 않은 엘프 여왕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작게 불타오르는 등불 앞으로 다가와 우리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진심과 태도는 언제든지 연기할 수 있지. 짐이 너희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한들, 그것이 진짜라고 믿기는 하겠는가?”

“······잘 알고 있어서 다행이네요, 여왕. 이 자리에서 당장 죽이지 않은 걸 고맙게 여기세요.”

이미 학살을 자행해 온 순간부터 엘프와 인간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서로의 피가 아니라면 이 묵은 원한을 풀 수 있는 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해라, 아이야. 너희 인간들의 원한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침략자였고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이지. 동맹이 쉽게 성사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엘프 여왕은 겨우 이런 도발을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듯 요사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폭언을 내뱉는 눈투성이와 눈을 마주치며 방울뱀처럼 속삭였다.

“모든 외교에는 대가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짐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지. 동맹을 위한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

면사포를 쓴 엘프 신관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작은 항아리를 가져왔다.

그곳에는 투명한 물이 담겨 있었고 또한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찰랑.

엘프 여왕은 그 빛을 꺼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등불 앞으로 가져오며 유리병 속에 담긴 액체를 찰랑였다.

마치 이 세상 모든 숭고함을 담은 것 같은 아름다운 액체와 신비한 유리병.

그곳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고대 엘프 언어들이 어지럽게 쓰여 있었다.

“엘릭서다.”

“- - - - - - -!!”

“세계수 열매를 농축해 만든 영약이지.”

세계수 열매, 모든 질병은 치료함을 물론이고 수명을 늘려준다는 전설 속 약재.

그것을 농축해 만든 엘릭서는 또 다른 목숨이라고 봐도 좋을 영약이었다.

“여왕인 나조차 몇 개 얻을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다. 특히 다른 종족이 얻었다는 건 수천 년 역사 중 유례가 없는 일이지.”

“······이건 무슨 의미죠?”

“짐은 큰 걸 바라지 않는다, 인간의 왕들이여. 관문에서 빠져나와 1황자를 끊임없이 괴롭혀다오. 만약 동맹이 성사된다면 지금 당장 이 엘릭서를 넘겨주겠다.”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물건이다.

당장 눈투성이가 마시기만 해도 그동안 생긴 상처와 흉터는 물론이고 차후 200살은 넘게 살아갈 수명을 얻게 된다.

퉤!

하지만 그런 한낱 욕심 따위로는 강한 신념을 지닌 눈투성이를 유혹할 수 없었다.

미간을 찡그린 녀석은 마치 더러운 것을 봤다는 듯 바닥에 침을 뱉었다.

“스승님 말이 정말 맞았네요. 귀쟁이들은 그저 오래 살기만을 원하는 구차한 종족이라고요. 품위를 지키세요, 여왕.”

아무리 세계수 열매를 먹고 마시고 발라도 흉내 낼 수 없는 품격과 밝은 기운이다.

스스로 빛을 내는 눈투성이 앞에 여왕은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후회할 짓을 하는구나.”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너를 말하는 게 아니다, 기사왕.”

하지만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눈투성이도, 리처드도 아닌 바로 부러지는 검인 내가 서 있었다.

화르륵!

타오르는 붉은 등불 사이로 엘프 여왕이 두 눈을 푸른색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그 푸른색 눈동자는 분명 내면과 뒤로 보이는 운명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검성. 그동안 받아낸 오러로 속이 만신창이가 되었어.”

“············.”

“내게 보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부디 후회하지 않은 선택을 했으면 좋겠구나.”

그 말을 끝으로 웃음을 지운 엘프 여왕은 엘릭서를 다시 항아리 안에 보관했다.

그리고 용건은 이게 끝이라는 듯 마지막까지 악마의 속삭임을 내뱉었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찾아오라. 자비로운 엘프는 시간을 늦게 셀 줄 아는 법이지. 그토록 찾던 어머니가 너희와 함께하길.”

강하게 타오르던 등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천천히 어둠 속에 잦아들었다.

그리고 내가 잦아드는 등불 속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떨리는 눈동자였다.

“스, 스승님······.”

리처드는 고개를 숙인 지 오래고 눈투성이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담한 심정이 엄습해 온 나는 마치 꺼져버린 등불처럼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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