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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04화 (104/181)

104화

검은머리 기사왕 104화

1황자는 호랑이가 낳은 개다.

1황자는 황제의 재목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그 떡잎을 보았던 오크 대신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떠들고는 했다.

하지만 웃기게도 현 대륙 패권을 쥐고 있는 세력은 명실상부 1황자였다.

아무리 4년이나 걸렸다고 한들 2황자를 이긴 건 결국 1황자라는 것이다.

황제를 닮지 못한 무능함이 안타까워 하늘이 도와주기라도 한 것일까.

1황자가 하는 일에는 전부 행운이 따랐고 위협은 항상 놈을 빗겨나갔다.

‘내게는 천운이 함께한다.’

가장 위협적인 적을 해치웠으니 이제는 위대한 제국을 바로 세우는 일만이 남았다.

기세등등해진 1황자는 이제 그 칼끝을 북방과 동부를 향해 돌리려 했다.

‘전쟁입니다, 폐하!’

하지만 순탄한 행보는 거기까지였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장소와 인물이 자신에게 불이 붙은 기름을 뿌리고 말았다.

바로 엘프 왕국과 크고 작은 전쟁을 벌여왔던 3황자가 기어코 역린을 넘어 귀쟁이 놈들의 성역을 건드리고 만 것이다.

‘엘프 왕족 살인.’

아무리 먼 방계라고 해도 왕족은 왕족이다. 고귀한 핏줄을 죽였다는 건 한낱 엘프 귀족을 건드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말마따나 철저한 계급 사회인 엘프 왕국 근간을 뒤흔들어 버린 사건인데, 어떤 지배자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당연히 여왕과 귀족들은 분개했고 공동의 적 앞에 앙금은 잠시 내려놨다.

불멸왕 사후 긴 잠에 빠져있던 엘프 왕국이 드디어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킨 것이다.

‘멍청한 놈!’

1황자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패권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여 일단 완충 역할로 세워두었던 3황자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잠에서 깨어난 잠룡 앞에 한낱 군벌 세력 따위가 얼마나 버텨주겠는가.

3황자가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1황자 자신일 게 분명했다.

이건 더 이상 남 일이 아니다.

소모된 국력이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무조건 허락을 받아와라.’

1황자는 일단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미끼로 엘프 여왕을 끌어들였고 북방과 동부에도 사절단을 보냈다.

물론 이번 도움을 대가로 3황자가 복속된 것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얼떨결에 내전을 종식한 1황자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오크가 모인 그레이트 홀.

두툼하던 턱살이 많이 빠진 1황자는 3황자를 향해 허탈하게 물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동생아. 굳이 엘프 왕족을 죽인 이유가 뭐냐.”

“아름다워서 박제하고 싶었습니다.”

“······너도 참 미친놈이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3황자는 황제의 뛰어난 무력을 물려받는 대신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끔찍한 불치병을 얻고 말았다.

이 또한 운명의 아이러니였다.

* * *

‘평화.’ ‘회의.’

이 대륙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태초 불을 피울 때부터 인간을 죽여왔던 종족끼리 무슨 평화를 논한단 말인가,

백이면 백 우리를 끌어내기 위한 속셈이거나 함정을 동반할 미끼일 게 분명했다.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눈투성이는 그렇게 서한과 제안을 가뿐히 무시했다.

하지만 1황자는 모든 예상을 뒤엎고 또 한 번 외교 사절단을 보내왔다.

인간을 한낱 벌레로만 보던 놈이 무려 제안이 아닌 부탁을 해온 것이다.

‘평화를 위한 결단을 소망함.’

몇 번을 다시 읽어봐도 같았다.

1황자는 마치 함정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듯 모든 장소와 조건을 적대 세력인 우리가 결정하도록 했다

역사 속 유례가 없었던 파격적 행보다.

이쯤 되자 우리는 놈의 속내보다는 왜 그토록 회담을 원하는지가 더 궁금했다.

1황자가 평화주의자라서?

아니, 놈이 병신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안다.

설마 싸울 이유가 없어서?

이 또한 대륙 패권을 잡기 위해선 지속적인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결국, 원인은 외부적인 변화다.

반나절 넘게 머리를 맞댄 우리는 한가지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귀쟁이들과 뭔가 있나 보군.”

지금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변수는 오직 엘프뿐이다.

양측이 맞붙는 무언가가 아니라면 1황자가 이리 조급할 이유가 없었다.

“전쟁이든 뭐든 썩 달가운 상황은 아닐 거다. 전선이 두 개로 나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놈도 알고 있을 테니까.”

오크 제국과 국력이 비슷한 엘프 왕국이다.

1황자는 자신 가진 모든 것을 걸어도 모자랄 판에 전선을 두 개로 나눌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리를 회유하려는 목적이 컸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평화를 운운하는 1황자 놈이 참으로 역겨운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엘프 여왕은 왜요? 서로 마주 보는 게 썩 달가운 일은 아닐 텐데.”

하지만 아직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바로 직인까지 찍어가며 참석하려 하는 엘프 여왕의 이해되지 않는 행보였다.

“그래, 굳이 참석할 이유가 없지.”

개전 원인이 무엇이든 국론을 통합한 엘프는 잘 싸우면 그만이다.

어차피 사방이 적인 놈들에게 있어 군주끼리 모이는 회담은 의미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결국 고개를 돌려 왕좌에 앉은 기사왕의 결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눈투성이가 입을 열었다.

“둘 다 야비하고, 비겁하고, 비열한 족속들이죠. 저는 놈들을 믿고 싶지 않아요.”

“맞습니다, 폐하.”

“하지만 정세가 급변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 우리도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얼어붙는다.

그것을 경험으로 보고 배운 기사왕 눈투성이는 단호한 목소리로 명했다.

“이렇게 답변하세요. 그렇게 평화를 원한다면 해주겠다. 대신 회담이 열릴 장소는 백색 관문 앞이라는 걸 명심해라.”

우리로서는 아쉬운 것 없는 회담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눈투성이는 북방이라는 맹수 앞으로 적들을 초대했다.

이 얼마나 품격있고 당당한가.

회색 늑대는 웃음을 터트리며 좋아했고 재상 또한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호위 규모는 최소, 회담 장소는 관문.

왕의 친필로 쓰인 서한은 부들부들 떠는 오크 사절단과 함께 잘 전달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또 한 달이 지나, 군주들 전원이 참석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 * *

쿵! 쿵! 쿵! 쿵!

척! 척! 척! 척!

완전 무장을 끝낸 북방군이 거대한 북소리와 함께 백색 관문으로 진군한다.

물론 리처드 왕이 이끄는 동부군 또한 약속한 시각에 맞춰 평원으로 빠져나왔다.

당장이라도 진격할 기세로 관문 앞 평원을 빼곡하게 메운 강철 동맹군.

많은 부분이 부족했던 옛 모습은 어디 가고 오직 정예군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 전쟁은 없었다.

수많은 동맹군을 일정 거리 뒤에 대기시킨 눈투성이와 영웅들은 평원 한가운데 놓인 회담장을 찾아 열심히 사슴을 몰았다.

“기사왕 폐하!”

다각! 다각! 다각!

그러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편지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던 리처드 왕과 일행들이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가장 먼저 말을 몰고 달려온 것이다.

얼굴을 마주하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이제 동맹국의 왕이 된 눈투성이와 리처드는 서로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그동안 격조하셨나요, 리처드 왕?”

“형제들을 그리워하면서 지냈습니다. 이렇게 다시 뵈니 정말 기쁘네요.”

눈투성이가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듯, 리처드 또한 듬직한 사내가 되어있었다.

겨우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다들 왜 이리 빨리 크는지 모르겠다.

나는 빠르게 안장에서 내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리처드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안장에서 내린 녀석은 옛 호칭을 잊지 않고 외치며 달려왔다.

“단장님!”

서로를 마주한 우리는 기사단 시절 그래왔듯 손을 맞잡은 뒤 어깨를 부딪쳤다.

리처드는 체통 따위는 진즉에 잊었는지 어느덧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날 왜 그냥 가셨습니까! 저희가 보답 할 수 있는 기회는 주셨어야죠!”

“충분히 보답받았다.”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리처드는 훌륭한 왕이 되었다

전쟁이 남긴 피해를 고스란히 복구한 것도 모자라 동부를 부국으로 만든 것이다.

오죽하면 모든 황금과 강철은 비명의 협곡을 지나야 한다는 말이 있겠는가.

북방은 든든한 혈맹을 바로 옆에 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답을 받았다.

“음.”

마침 익숙한 얼굴들도 보인다.

나는 이제는 곧 왕후가 될 헬레나와 기사단장 로날드와 눈인사를 나눈 뒤 반가웠던 리처드와의 해후를 마무리했다.

이제 회담장으로 갈 차례다.

다시 안장 위에 올라탄 우리는 회담 장소에 도착할 동안 정보를 나누었다.

“어젯밤 소돔 서쪽 앞바다에서 엘프 대선단을 발견했습니다. 아마 이른 새벽 건너편 본토 항구에 상륙했을 겁니다.”

“남쪽 바다를 빙 돌아왔나 보군.”

마침 북방 세작들도 중앙 대륙에서 오크 군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다.

이로써 1황자와 3황자 그리고 엘프 여왕이 오는 것이 전부 확인되었다.

설마 이곳까지 직접 행차할 줄이야.

그동안 조금 반신반의하고 있던 우리는 계속해서 평원을 향해 나아갔다.

“왔다.”

그리고 약속한 장소가 가까워지자 예민한 감각이 조심스러운 경고를 보내왔다.

가까운 곳에 상당한 실력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온 것이다.

“- - - - - - - -.”

평원 한가운데 놓은 원형 탁자.

그곳에는 호위병들과 100m 떨어진 각국 왕들과 수뇌부들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다녀오십시오, 폐하.”

회담 탁자까지 올 수 있는 인원은 군주를 포함해서 총 셋. 눈투성이는 나와 재상, 리처드는 헬레나와 로날드를 동행했다.

사박, 사박, 사박.

그렇게 안장에서 내린 북방과 동부 일행들은 모두의 시선이 모인 회담 탁자를 향해 걸어가 대륙회의 참석을 알렸다.

“참석해주어서 고맙소, 동부왕과 기사왕.”

“흠.”

“············.”

가장 먼저 입을 연 자는 화려한 황금 갑옷과 장식으로 치장한 1황자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거만한 3황자와 함께 엘프 여왕이 혼자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당연히 서로를 향한 인사는 없었다.

눈투성이와 리처드는 그대로 의자를 당겨 앉았고 나는 그 뒤에 기립하며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오른손을 내렸다.

혹여나 허튼짓을 시도한다면 다 함께 지옥으로 동귀어진하는 것이다.

나는 주변에 넘실거리는 기운을 살의로 찍어누르며 놈들을 하나하나 노려봤다.

크흠, 큼.

만나자마자 나누는 시선이 살벌하다.

곤혹스러움을 느낀 1황자는 작은 헛기침과 함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짐의 부덕으로 인해 군왕 간 골이 깊어진 것 같소. 부디 이 자리에서 서로 오해를 풀고 평화로 향하는 계기가······.”

“입 닥치고 전선에서 군대나 치워라, 1황자. 네놈 눈은 단춧구멍인가. 분명 약조한 사실이 있는데 왜 지키지 않지?”

“무, 무어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끼어든 엘프 여왕이 망설임 없이 폭언과 욕설을 내뱉었다.

당연히 1황자는 얼굴 붉혔고 정곡이 찔린 3황자는 표정을 무섭게 일그러트렸다.

“이 미친 귀쟁이 새끼가!”

역시 양측 간 전쟁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

나는 표정으로 드러날 뻔한 흥미로움을 애써 숨기며 조용히 재상과 눈을 마주쳤다.

‘좋은 기회에요.’

‘동감한다. 최대한 시간을 끌자.’

“······귀쟁이? 네놈이 진정 미쳤구나. 오늘 그 쓸모없는 하물을 잘라 다시는 못 놀리게 해주마.”

2:2구도였던 기사왕 시절과는 다르게 여러 적대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나는 이 또한 어머니 북방이 주신 기회임을 자각하며 머릿속 판을 다시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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