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검은머리 기사왕 103화
노스플롬에서 갓 상경한 젊은 청년은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왕궁 학자가 되겠다며 고향을 떠난 지 벌써 보름, 드디어 수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와······.”
북방 최고 도시라는 명성답게 수도 스노우가든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물론 북방인이 자랑이라고 여기는 아름다운 외관 또한 빼놓을 수가 없었다.
설원 위에 핀 한 떨기 꽃.
그 별칭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다음!”
오늘 하루도 수도 성문 앞에는 출입을 기다리는 사람과 마차가 행렬을 이뤘다.
그리고 줄을 서 있던 청년 또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검문을 받았다.
“노스플롬 출신인가?”
“네, 네! 맞습니다.”
왕국 가장 위쪽에 자리 잡은 노스플롬은 북방 최대 목재 생산지이자 질 좋은 가죽이 유통되기로 유명한 산림 도시다.
하지만 그보다 왕국 발현지로 더더욱 유명했는데, 지금도 촌장의 헌신을 잊지 않은 기사왕이 매년 신년 축사를 보내고 있었다.
무려 왕이 총애하는 도시 출신이다.
병사는 망설임 없이 통과도장을 찍으며 친절하게 덕담도 잊지 않았다.
“수도에 온 것을 환영하네.”
“감사합니다!”
이 순간만큼 기사왕을 위해 싸운 부모님이 자랑스러울 때가 없었다.
청년은 뿌듯한 웃음과 함께 거대한 성문 뒤로 보이는 스노우가든으로 들어섰다.
자 쌉니다, 싸요!
물건 좀 보고 가세요!
꺄하하하! 나 잡아봐라!
엄마! 엄마, 이것 좀 봐!
암흑기 마지막 전투라 일컫던 평원 전투가 끝이 나고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평화를 동반한 그 4년은 모든 전반에 걸쳐 풍요기를 불러왔다.
늘어난 식량 생산량, 인프라 건설, 약초학의 보급, 감소한 유아 사망률, 급격한 인구 성장, 동부 무역을 통해 살아난 경제.
뭐 하나 자세히 설명하기 입 아플 정도로 많은 변화가 북방을 찾아왔다.
하지만 현명한 왕과 재상은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왕국을 훌륭하게 발전시켰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이 이 광경을 본다면 무어라 말씀하실까?
수도 스노우가든은 수탈과 지배의 역사에서 완전히 벗어난 지 오래였다.
“어, 어! 잠시만요!”
다각, 다각, 다각!
히히 히힝!
수도를 구경하느라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깜짝 놀란 청년은 서둘러 도로를 지나가려는 공용마차 위에 올라탔다.
마차가 향하는 곳은 왕궁 대도서관! 오늘 그곳에선 앞으로 왕국을 위해 일해 줄 관리를 뽑는 중요한 시험이 있었다.
그리고 머나먼 노스플롬에서 걸어온 청년 또한 훌륭한 왕국 관리가 되고자 지원한 수많은 젊은 인재 중 하나였다
큰 꿈을 꾸는 것은 죄가 아니라 했던가.
비록 평범하게 태어난 필부이지만, 삶만큼은 뜻만큼이나 고결하고 싶었다.
그렇게 큰 꿈을 안고 상경한 젊은 청년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하얗게 눈이 내린 것 같은 아름다운 왕궁 풍경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 * *
챙!
손잡이를 역수를 틀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검날을 서둘러 막아낸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치 바람과 같은 검무를 이어갔다.
채양! 챙!
공격이 빠르면서도 무게는 묵직하다.
철저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변칙은 너무나 어지럽다.
자신이 그동안 배워온 모든 기술과 기교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아는 눈투성이.
매번 대련해주는 나조차 이제는 항상 긴장해야 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 - - - - -!!”
순간 마주한 두 눈이 번쩍인다.
변화를 눈치챈 나는 수시로 변화하는 동작과 자세를 통해 다음 수를 읽었다.
이건 속임수, 이건 보이지 않는 허수.
수많은 구분 동작 속 진짜를 찾는다.
후웅! 챙!
그와 동시에 목을 노린 검이 날아왔다.
검도를 먼저 예상했던 나는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냈고 이내 검날을 강하게 후려친다.
깡!
눈투성이가 손잡이를 놓쳤다.
허공으로 날아간 검은 그대로 두어 바퀴를 돌아 텅 빈 연무장 바닥에 떨어졌다.
“아······!”
쨍그랑!
작은 탄식과 함께 대련이 끝이 났다.
하지만 승리와는 별개로 내 오른팔 옷깃이 어느새 깊게 베어져 있었다.
언제 당했는지도 몰랐다.
그동안 성장해온 눈투성이가 기어코 내가 읽지 못한 수를 날린 것이다.
아마 조금만 더 깊었다면 내 팔은 물론이고 목까지 노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상상을 뛰어넘는 성장 속도 앞에 감히 한계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피, 피! 피나잖아요!”
울상을 지은 눈투성이가 빠르게 달려왔다.
그리고 온갖 호들갑을 떨며 옷깃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설마 벨 수 있을 줄 몰랐던 모양이다.
나는 결국 눈물까지 보이는 눈투성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괜찮다.”
항상 어리기만 할 것 같았던 아이는 어느새 키가 이만큼이나 자란 숙녀가 되었다.
그리고 꽃을 피운 용모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엘프와 비교해도 흠잡을 것이 없었다.
물론 겉모습뿐이겠는가?
4년 동안 학문, 행정, 예술, 역사, 검술, 오러 등을 열심히 수련해온 눈투성이는 지덕체를 전부 갖춘 훌륭한 군주로 성장했다.
오죽하면 백성들 사이에서 눈투성이가 선왕을 뛰어넘을 거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나는 4년 동안 열심히 노력해온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동시에 대견했다.
“가자.”
정성스러운 지혈이 끝났다.
팔에 묶인 손수건을 본 나는 시무룩한 눈투성이와 함께 연무장 밖으로 나섰다.
“국무회의 일정이 급하게 잡혔네요?”
“회색 늑대가 아침 일찍 돌아왔더구나. 아마 그거랑 관련된 것 같다.”
원래라면 내일로 예정된 국무회의다.
하지만 재상이 급히 알현을 요청한 것을 보아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나와 눈투성이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복도를 가로질러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왕궁 알현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다들 각자 맡은 책무를 다하느라 도통한 자리에 모일 시간이 드물었다.
그렇다 보니 국무회의는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 - - - - - -.”
하지만 평소 화기애애했던 국무회의는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했다.
왜냐하면, 백색 관문을 책임지는 회색 늑대가 가지고 온 두 가지 소식 때문이었다.
“2황자 목이 잘렸다.”
평원 전투 패배 이후 가뜩이나 불리하던 2황자는 철저히 벼랑 끝에 몰렸다.
설상가상 빈틈으로 노린 1황자가 인해 방어선까지 뚫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쌓아온 인재와 실력은 어디 가지 않는지 불리한 상황 속에서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더 버텨냈다.
당연히 우리로서는 호재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힘이 약해진 2황자는 다른 적대 세력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남는 물자와 식량이라도 몰래 보내줄 걸 그랬다.
우리는 놈의 죽음을 다른 의미로 안타까워하며 지옥으로 떨어지길 기도해주었다.
문제는 오랜 내전 끝에 1황자가 드디어 2황자 세력을 집어삼켰다는 것이다.
지도 위 영토가 다시 그려질 테니 이제 접경지는 2황자가 아닌 1황자였다.
“다음 목표는 우리겠군요.”
“······아마 그럴 거다.”
침공해 올 확률이 높았다.
4년간 평화를 유지해 온 북방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올 테면 오라죠.”
하지만 기사왕 눈투성이는 걱정하는 기색은커녕 도리어 호승심을 드러냈다.
북방과 동부는 이제는 오크 앞에 빌빌거렸던 약소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상님?”
“충분합니다, 폐하.”
4년 동안 내정에 집중한 북방왕국은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군사 부문에서는 과한 군비를 지적받을 정도로 질적 증강을 추구했다.
숙련되지 않은 북방군은 없다.
지휘관들과 부장들 또한 하나 같이 유능한 인물들이었으며 보급품과 병장기 또한 썩어날 만큼 쌓아둔 상태였다.
그렇다고 동부가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리처드는 즉위 초기부터 비명의 협곡을 틀어막을 관문 건설을 명령했고 증축된 지는 벌써 1년이나 지난 상태였다.
1황자 놈이 과연 겨우 2~3시간 거리인 두 관문을 상대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까?
장담컨대 오만한 아비가 그랬듯 놈 또한 오크 제국의 운명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다.”
하지만 가져온 소식은 또 있었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회색 늑대는 품속에서 황금색 서신 한 통을 꺼냈다.
“1황자가 관문으로 외교 사절을 보내왔었다. 물어보니 동부도 같다더군.”
1황자가 북방과 동부에 사절을 보냈다.
단순 전쟁을 위한 선전 포고가 아닌 서신을 전달할 외교 사절을 보낸 것이다.
재상은 급히 1황자가 보낸 황금빛 서신을 왕좌에 앉은 왕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한참 내용을 읽어내린 눈투성이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평화를 위한 대륙 회의를 하자네요?”
“미친 소리를.”
대륙을 이 꼴로 만든 게 누구인데 감히 뻔뻔하게 평화를 입에 담는가.
일행들은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내며 1황자 부모가 홀수인 것을 욕했다.
“그런데 내용이 조금 특이하네요.”
“······폐하, 저도 읽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하지만 그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공손히 서신을 받은 재상 기억하는 새는 서신을 빠른 속도로 읽어내리며 말했다.
“왕들이 전부 참가하는 회의에요. 엘프 여왕과 3황자는 벌써 직인을 찍었네요······?”
“위조 가능성은.”
“저도 믿기지 않지만, 진짜가 맞아요. 똑같은 직인을 2장씩 받아온 모양이에요.”
그동안 평화로웠던 북방과는 반대로 대륙 서쪽은 엘프 왕국과 3황자가 벌이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인해 시끄러웠다.
귀쟁이에 미치다 못해 정신을 놓은 3황자 엘프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역린인 귀족 엘프까지 건드린 것이다.
그런데 그 둘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고?
순간 직인 위조를 의심할 만큼 의중을 알 수 없는 기이한 행보들이었다.
따져봐야 할 수가 너무 많았다.
한동안 말이 없어진 우리 사이로 곰곰이 생각하던 눈투성이가 입을 열었다.
“일단 거절하는 게 옳아요. 리처드 왕에게도 그렇게 전해주세요.”
당연한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놈들과 대륙 평화를 논의하겠는가.
눈투성이는 어림도 없다는 듯 거절 의사를 밝히며 왕좌에서 일어났다.
“곧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4년간 지켜온 평화가 그립겠지만, 저는 백성을 위해 언제든 싸울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명하십시오, 폐하!”
“회색 늑대 경은 오늘부터 최고 경계 상태를 유지하세요. 그리고 재상님은 스승님과 함께 현 상황을 파악해주세요.”
현명한 판단이고 빠른 대처다.
나와 영웅들은 기꺼이 고개를 숙이며 기사왕의 준엄한 명령을 받들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관문을 넘어 동부 왕국까지 전해졌고 리처드 또한 강한 지지를 보내오며 준전시 상태를 발효했다.
하지만 정확히 보름 뒤 백색 관문에는 엄청난 보물과 함께 한 무리가 도착했다.
이번에도 찾아온 1황자 사절단이 수정된 제안을 가지고 온 것이다.
‘회의 장소와 동행할 수 있는 호위병 규모는 오직 북방왕국이 결정함.’
‘결의안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왕국은 북방, 동부와 1년 불가침 조약을 맺을 것.’
‘부디 기사왕과 동부왕이 평화를 위한 결단을 내려주기를 소망함.’
모든 것이 백지화되었다.
회색 늑대는 사절을 돌려보낸 즉시 수도로 복귀했고 한참 정보를 모으던 나와 재상은 하던 일을 멈춘 채 왕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