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검은머리 기사왕 102화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흰 뿔 사슴 한 마리가 길고 길었던 비명의 협곡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러자 흰색과 초록색이 묘한 균형을 이룬 드넓은 평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겨우 협곡 하나를 빠져나왔을 뿐인데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입김이 다르다.
서둘러 옷을 추린 나는 투레질하며 달리는 사슴을 다시 한번 재촉했다.
“이랴!”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오랜만에 눈을 밟게 된 흰 뿔 사슴은 경쾌한 발굽과 함께 평원을 질주했다.
그러자 깜짝 놀란 검은 화살이 양팔로 내 허리를 꽉 붙잡으며 외쳤다.
“너,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야?”
“꽉 잡아!”
북방군은 약속대로 비명의 협곡으로 들어오려는 2황자 군대를 막아섰을 것이다.
하지만 은근히 호전적인 눈투성이 특성상 정말 충돌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합류해 전력이 되어주어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나와 검은 화살은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하며 바삐 관문으로 말을 몰았다.
다각, 다각, 다각.
그리고 약 2~3시간가량을 더 달리자 평원이 서서히 끝을 보였다.
저 멀리 언덕 아래로 눈이 소복하게 쌓인 백색 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양측 진영 간 치열한 격전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꽤 여유로운 진을 친 채 현장을 정리하는 북방군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북방군 단독으로 2황자 군대를 밀어냈다고? 그것도 성벽이 없는 평원에서?
북방으로 복귀하자마자 치열한 전쟁을 생각했던 나는 터덜터덜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자 멀리서부터 나를 발견한 북방군 초병이 바삐 진으로 복귀하더니 이내 내부에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다각, 다각!
서로가 아군인 것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대로 흰 뿔 사슴을 몰아 깃발이 펄럭이는 숙영지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혹시 부러지는 검경이십니까!”
“그렇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망루 위에서 내 신분을 확인한 북방군 부장이 서둘러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진입로를 막고 있던 바리케이드들이 치워지며 내부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만나 봬서 영광이었습니다!”
“무사히 복귀하십시오, 경!”
다들 일사불란 움직이는 것이 제대로 된 정예병의 기운을 풀풀 풍겼다.
나는 경례를 올리는 수많은 병사를 향해 고개를 숙여주며 다시 사슴을 몰았다.
검은 화살이 내 허리를 쿡 쑤셨다.
“널 존경하네.”
“······다들 할 일을 할 뿐이야.”
“부끄러워하기는.”
충실하게 이행해온 의무에 대한 존경을 받는 것은 그 무엇보다 보람찬 일이다.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숨기며 숙영지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빨리빨리 안 움직여! 집에 안 갈 거야?”
“신병들 어디 갔어? 이 새끼들 빠져서!”
숙영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교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는지 부상자들 숫자는 상당히 적었고 분위기 또한 관문으로 철수하기 직전이었다.
크흠.
이럴 줄 알았으면 정말 동부 관광지라도 한 바퀴 둘러보고 올 걸 그랬나.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나는 어색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스승님!”
그 순간 다급한 보폭과 함께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사왕이 직접 숙영지로 행차한 것이다.
왕이 지켜야 할 체통이고 뭐고 허둥지둥 달려와 스승님이라 외치는 눈투성이.
안장에서 내리자마자 안겨 오는 녀석 탓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찍을뻔했다.
“병사들이 봅니다, 폐하.”
“히히.”
하지만 다행히도 기분 좋게 웃은 눈투성이는 금세 자세를 바르게 했다.
나는 그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었고 이내 품속에서 리처드의 친필 서한을 건넸다.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했습니다, 폐하.”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경. 이건 리처드 왕이 보내주신 서한인가요?”
“네, 폐하. 동부 왕께선 이른 시일 안에 사절단을 보내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동부와 북방은 이제 한배를 탄 운명 공동체이자, 피를 나눈 혈맹이나 다름없다.
내부가 완전히 다져지는 즉시 양측 사절단이 오고 갈 테니, 의미가 퇴색되었던 강철 동맹은 이른 시일 내로 재건될 것이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왕자 리처드를 기억한 눈투성이는 서한을 조심스럽게 챙긴 뒤 무릎 꿇은 나를 일으켜주었다.
“경이 아니었다면 이루지 못했겠죠. 저희와 북방 모두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졌어요.”
북방 수복, 관문 탈환, 동맹 재건.
정말 멀게만 느껴졌던 염원들이 어느덧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로써 선왕과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나는 그리웠던 그 날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 - - - -.”
그러자 환하게 웃고 있는 눈투성이 뒤로 전부 한자리에 모인 일행들과 사열한 북방군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여정은 어떠했는가?’
마침 계절은 겨울이고 진눈깨비가 내린다.
그 어느 때보다 뭉클한 감정을 느낀 나는 그들에게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기뻐 보이는구나, 종자야.’
기다리고 있는 이들과 돌아가야 할 장소가 있는 지금, 나는 평생을 바라만 보았던 인생의 능선을 처음으로 넘게 되었다.
따뜻한 겨울이었다.
* * *
“빌어먹을 년! 으아아아!”
미친 듯이 말을 몰던 2황자는 먹구름이 낀 하늘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목이 쉴 정도로 욕지기를 뱉어도 치욕과 분노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황, 황자님 고정하시지요. 상처가······.”
“입 닥쳐!”
동부를 점거하기 위해 출진했던 평원 전투에서 북방군 놈들에게 패배했다.
단 한 번의 반격조차 가하지 못한 채 겁쟁이처럼 전장에서 도망친 것이다.
아무리 급히 징집한 병력이라지만, 이런 졸전과 패배가 말이 되는가?
2황자는 합리화조차 못 할 완벽한 패배 앞에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북방군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특히 왕이 직접 친정한 첫 번째 진격은 전의가 거의 광기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질적으로 앞서는가? 아니다.
자신이 자랑하던 인재들은 회색 늑대 앞에 한낱 표적지였으며 그동안 우위였던 기병 전력 또한 이제는 거의 비등해졌다.
여기서 끝이겠는가?
아니!
물자가 풍부한 동부와 동맹을 맺은 북방 왕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전선이 두 개로 나뉜 자신은 점점 쇠퇴할 것이 뻔했다.
좁은 땅, 한정된 병력, 부족한 물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갉아 먹힌 2황자는 결국 최후의 판단을 내려야 했다.
“······쿠르만! 토토리노! 너희는 즉시 길을 따라 3황자 영토로 향해라!”
“3황자님 말입니까?”
“그래, 가서 내 서신을 전해라.”
그동안 유지되던 세력이 불균형해진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외교뿐이다.
오만하되 멍청하지는 않았던 2황자는 현실을 수긍하고 잠시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1황자라면 항상 난색을 보이던 동생 라키만. 지금은 비록 세계수 열매라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지만, 제대로 설득만 한다면 분명 작은 도움이라도 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폐하!”
2황자는 명령을 받고 떠나가는 두 신하를 바라보며 애써 고통을 참았다.
그리고 찌릿한 목덜미가 점점 안정되어감을 느끼며 다시 고삐를 당기려 했다.
“폐하!!”
다각! 다각! 다각!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이 도착해야 할 거점 방향에서 한 기수가 급히 달려왔다.
제발 아니라고 해라, 제발 내가 생각한 게 아니라고 해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2황자는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서부 전선이 뚫렸습니다! 1황자가 전군을 이끌고 현재 진군 중입니다!”
“컥!”
“폐하!”
자리를 비운 사이 서부 전선이 뚫렸다.
눈앞이 하얗게 흐려진 2황자는 온몸을 부르르 떨다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 * *
또각, 또각, 또각.
터벅, 터벅, 터벅.
세계수 뿌리로 향하는 깊은 동굴, 빛 한점 없는 통로를 오직 촛불 하나로 밝힌 엘프 여왕과 고위 신관은 나란히 걸었다.
“······직접 오는 건 오랜만이군.”
“가끔 오시지요. 좋은 기운이 가득합니다.”
“헛소리하지 마라, 신관.”
세계수와 그 뿌리 안은 한때 엘프의 성지라고 불릴 만큼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긴 세월이 지난 지금은 오직 신실한 신관들만이 찾아오는 장소로 전락했다.
듣자 하니 순례자들도 발길이 끊겼다지?
엘프 여왕은 시무룩 고개를 숙이는 고위 신관을 향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들은? 아직도 설득 중인가?”
“······다들 난색을 보이십니다. 북방이 당장 보이는 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3황자 놈이 급하다 이건가?”
“아무래도 그 이유가 가장 크죠······.”
엘프 왕국과 대수림 국경을 맞댄 3황자는 특이한 성향을 지닌 오크였다.
바로 아름다운 엘프를 동경하고 찬란한 서부 문화를 진심으로 선망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동경은 삐뚤어진 성욕과 욕심으로 점철되었다.
엘프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모든 엘프를 지배하고 싶다는 방향으로 바뀐 것이다.
수시로 수림을 침략해 수많은 엘프를 자신의 노예로 삼은 3황자.
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세계수와 불멸의 상징인 열매까지 탐내고 있었다.
당연히 엘프로선 미칠 노릇이었다.
얼굴이 생기다 만 흉측한 오크가 평화로운 자신들을 수시로 귀찮게 하니 말이다.
결국, 여왕과 귀족은 상의 끝에 각 상비군과 가문에서 병력을 차출했고
차출 전력 상당수가 대수림에서 3황자와 불편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후······.”
아무래도 평화가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귀족들 도움을 깔끔하게 포기한 엘프 여왕은 근 수년 만에 이뤄질 군비 증강을 다시 한번 계획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했습니다.”
“더럽게 넓군.”
“여왕님, 여기선 제발 언행을······.”
세계수 뿌리 아래 성지에는 수많은 신관이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 여왕은 그러거나 말거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코웃음을 쳤다.
세계수는 신이 아니다.
그저 큰 에너지를 지닌 돌연변이 고목이며 열매를 생산하는 생체 기계다.
그 비틀어진 진실을 아주 오래전 깨달은 엘프 여왕은 거만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급히 뒤따라온 고위 신관이 품속에 소중히 챙겨온 유리병을 꺼내주었다.
“총 3개 분량입니다.”
“충분하다.”
귀족들 몰래 착복한 세계수 열매를 하나하나 모아 농축한 명약 엘릭서.
사파이어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엘릭서를 감상한 여왕은 이내 한쪽 무릎을 꿇었다.
“- - - - - - - -.”
세계수 뿌리가 닿은 성지 아래에는 영원히 순결한 지하 호수가 흐른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은 엘프 여왕은 그 호수에 엘릭서를 흘려보냈다.
쪼르르륵.
사파이어와 만난 호수가 빛을 낸다.
성스러운 변화에 신관들은 일제히 넙죽 엎드렸고 고위 신관 또한 성호를 그렸다.
하지만 오직 엘프 여왕만큼은 그 호수 끝에 보이는 한 인물을 뚫어지라 노려보았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있는 한 남성 엘프.
“왕이시여.”
기사왕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치료하고자 동면에 든 그 엘프는 바로 시조이자 살아있는 신격인 불멸왕이었다.
오늘로써 엘릭서 또 하나, 그동안 불멸왕의 부활을 위해 힘써왔던 엘프 여왕은 황홀함이 섞인 웃음과 함께 눈을 감았다.
새 시대가 멀지 않았다. 그날이 오면 오직 자신과 엘프를 위한 세상이 열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