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검은머리 기사왕 101화
헬레나와 동부 까마귀들은 ‘이쪽’ 방면에서 무척이나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아니, 이날만을 기다리며 날을 갈았을 테니 어쩌면 유일한 적임자일지도 몰랐다.
부상이 심했던 리처드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총 4일.
그사이 부지런히 움직인 헬레나는 간신 반절을 죽이고 반절을 억류해내었다.
물론 그 외에도 폐허가 된 왕궁으로 들어가 유실되어선 안 되는 역사적 자료와 중요한 왕가 문서들을 전부 확보해주었고,
그동안 전 재상 그레고즈와 간신들이 벌였던 모든 패악질을 자료와 증언으로 남겨 앞으로 있을 왕권 강화에 힘을 더해주었다.
하지만 모든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헬레나는 어딘가 씁쓸한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시선을 피해 진영으로 몰래 들여온 마차 안 한 구의 시신 때문이었다.
‘빌헬름 2세.’
그를 발견할 곳은 차가운 겨울바람만이 불어오던 싸늘한 왕궁 테라스였다.
병환이 깊다 못해 결국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임종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무능한 왕실과 국왕을 증오했었던 헬레나가 빌헬름 2세의 시신을 수습해 준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 모든 시작과 끝을 만든 원흉을 궁내부 끄나풀들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헬레나는 내게 보여준 것은 골든 테일이라 불리는 한 악독한 독초였다.
‘아귀 광산에서만 자생하는 독초에요. 복용자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끝내 광인으로 만들죠. 놈들이 쭉 복용하게 했어요.’
사실 처음부터 의문은 있었다.
내 기억 속 빌헬름 2세는 몸이 유약할지언정 백성을 위하지 않는 왕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사왕 사후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는데 역시 급격한 변화에는 전 재상 그레고즈라는 원흉이 있었다.
나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이런 흑막이 숨겨져 있었다는 충격보다 정신을 차린 리처드에게 어찌 말해줘야 하는지가 더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존경했던 아버지에게 커다란 배신감을 느끼며 무능하다 폭언을 내뱉었던 리처드.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복잡한 감정과 더불어 커다란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숨겨야 할까요?’
‘······아니.’
하지만 나는 고민 끝에 정신을 차린 리처드에게 직접 진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이 비참하게 죽은 선왕에게도 앞으로 왕이 될 리처드에게도 필요한 일이었다.
‘모든 건 역사 속에 묻어라.’
평원 근처 깊은 숲에 깨끗한 흰색 천으로 만든 묘소가 하나 세워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직 리처드와 로날드 그리고 나만이 출입을 허가받았다.
‘아버지.’
시신을 앞두고 뱉은 첫마디 말은 부른지 너무나 오래된 아버지라는 단어였다.
리처드는 그 생소함에 결국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원망, 야속함, 죄책감, 슬픔, 모든 것이 섞인 감정을 담백하게 잘라낼 수 있을까.
지금은 그저 되돌릴 수 없는 과거와 기억 속 희미한 추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훌훌 털어낸다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리처드는 가슴속에 조용히 슬픔을 묻고, 국왕이자 친부였던 그를 보내주었다.
왕은 오롯이 이겨내야 한다.
인간 리처드를 위해 하루라는 시간을 양보한 녀석은 다음 날 국왕 리처드가 되어 병사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수도로 떠나기 전 처리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좋든 싫든 반드시 리처드 손으로 해야 하는 오욕과 역사의 청산이었다.
‘그레고즈.’
모든 패악을 저지른 원흉답게 전 재상 그레고즈는 이미 도망칠 구멍 여러 개와 망명 루트까지 만들어둔 상태였다.
하지만 때마침 움직여준 북방군으로 인해 놈은 봉쇄된 협곡 앞에서 헬레나와 동부 까마귀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끼이이익! 덜컹!
쿨럭, 쿨럭!
얼굴을 보아하니 기억 속 놈이 맞다.
재갈을 풀어준 나는 놈이 개소리를 지껄이기 직전 뺨을 한 대 후렸다.
짜악!
“······그레고즈.”
그러자 바닥에 튀기는 피와 함께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처드가 다가왔다.
이미 모든 감정을 묻고 온 녀석의 눈동자는 오직 싸늘함만이 가득했다.
퉤!
바닥에 부서진 이빨을 내뱉은 그레고즈는 큭큭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리처드. 정말 오랜만이구나. 이렇게 만날 줄 알았으면 진즉에 죽여버렸을 텐데, 기회는 내 쪽에서 놓치고 있었어.”
“- - - - - - - -.”
“의외로 분노하지 않는군. 그새 왕 흉내라도 내보려는 것이냐? 네 아비도 네놈도 그렇게 무르게 사니까 이리된 거다.”
놈은 이미 목숨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탈출마저 실패한 마당에 체념 말고는 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 알량한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었는지 끝까지 간사한 뱀의 혀를 놀리며 선왕은 물론이고 리처드를 모욕했다.
악랄함, 비겁함, 소심함, 역겨움.
도대체 저 작고 늙은 몸뚱이로 얼마나 더 많은 악을 품어야 만족하겠는가.
자신이 저지른 모든 잘못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실행하고자 했던 인두겁 앞에 나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리처드는 그 어떠한 동요 없이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도리어 놈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패자는 말이 없지. 역사란 게 원래 그런 거다. 부디 동부도 똑같은 역사를 맞이하기를 간절히 빌어주마.”
죽음을 직감한 그레고즈가 눈을 감았다.
그러자 리처드는 그대로 한발 물러나 뽑아낸 검을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서걱!
“끄아아아아악!!”
하지만 리처드가 벤 것은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목이 아닌 눈꺼풀이었다.
그동안 수련한 검을 섬세하게 움직여 오직 두 눈만을 가져간 것이다.
“눈과 혀를 뽑아라. 듣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게 목숨만 붙여두어라.”
“끄으윽, 끄아악!”
“산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야 할 거다, 그레고즈. 부디 이보다 오래 살아 역사로 기록될 동부를 지켜봐라.”
쉽게 죽여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놈에게 끝나지 않을 고통을 선사한 리처드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그레고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피 냄새가 진동하는 산송장의 관짝을 미련 없이 빠져나왔다.
어깨가 가벼워 보였다, 발걸음은 당당했다.
쥐고 있던 것을 놓은 리처드는 비로소 가벼운 몸으로 활공을 준비했다.
* * *
왕위를 계승한 빌헬름 2세의 외아들이다.
지엄한 기사왕이 이를 보증했고 북방의 검성이 직접 그 옆을 보좌했다.
또한, 비겁한 침략자를 동부에서 몰아냈으니 왕국을 지키는 방패요, 적을 무찌르는 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누가 새로운 왕을 의심하는가.
정통, 명분, 실력, 그 무엇하나 감히 걸고넘어질 수 없는 새로운 왕권이 탄생했다.
‘동부왕 리처드.’
정비를 끝낸 동부군은 아무도 막지 못하는 길을 걸어 수도로 향했다.
그 모습은 마치 동부가 빛처럼 찬란했던 황금시대를 재현하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의문은 없었다. 피난을 떠났던 백성들은 동부군이 행군한 길을 그대로 따라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간신들의 강압 때문에 해산해야만 했던 구 동부군과 퇴역 장군들은 새로운 왕 아래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멈춰있던 상식이 되돌아왔다.
종식되는 혼란 속에 병자는 치료받았으며 망자는 뒤늦게나마 양지에 묻힌다.
기적처럼 상봉한 가족들과 병사들 손에 거둬지는 불쌍한 전쟁고아들.
서로를 돕기 시작한 동부는 비로소 다시 일어날 힘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왕의 귀환.’
그리고 혼란을 수습하며 행군한 지 총 보름하고 이틀이 더 지났을 때쯤 왕과 군대는 드디어 수도 두피디아에 도착했다.
당연히 왕의 행차를 막는 이는 없었고 감히 찬탈이라 욕할 자도 없었다.
이 모든 건 오직 불의를 바꾸고자 나선 리처드가 이룬 오롯한 결과물이었다.
혼란은 빠르게 종식되었다.
강력한 왕권으로 무장한 리처드는 서둘러 피해 복구 지시와 함께 간신들이 착복한 재산을 전부 국가에 귀속했다.
식량은 굶주린 자들에게 돌아갔다.
억압되었던 노예는 해방되었으며 노동자들은 수탈이 아닌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서 진심을 읽은 선왕의 마지막 충신들은 기꺼이 복직을 청했고 왕국을 위해 일하고자 했다.
그래, 동부는 처음부터 깨진 유리가 아닌 녹슨 강철이었을 뿐이다.
굳건한 왕을 중심으로 뭉친 강철의 저력은 정상화를 향한 신호탄을 쏴 올렸다.
그렇게 북방보다는 조금 덜 추운 겨울이 지나,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더 지나갔다.
드디어 수도 두피디아에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리처드 왕의 즉위식이 열렸다.
와아아아아 - - - - - -!!
수도가 함성으로 물들었다.
하늘에는 형형색색 종잇조각들이 흩날렸고 자발적으로 나선 수도 시민들은 왕이 지나갔던 길을 꽃으로 물들였다.
하하하하!
리처드 폐하 만세!
군중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축복과 왕을 향한 찬사! 웃음소리는 귀를 즐겁게 간지럽혔고 맛있는 음식 냄새는 코를 찔렀다.
오늘만큼은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동안 구슬땀을 흘리며 살아왔던 동부인들은 진심으로 이 축제를 즐겼다.
댕 - - - -!
하지만 저 멀리 왕궁에서 엄숙한 종소리가 들려온 순간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시간은 어느덧 석양이 걸린 늦은 오후, 드디어 뒤늦은 즉위식이 시작되려는 것이다.
웃고 떠들던 동부인들은 거짓말처럼 의복을 바르게 한 뒤 종소리가 들려온 왕궁을 향해 하나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감히 폭력과 압제로는 뺏어올 수 없는 진정한 민중의 존경이었다.
왕궁 주변에는 어느덧 즉위식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동부인들로 가득했다.
왕궁으로 향하는 대로에는 긴 파이크를 든 동부군이 사열했고 이제는 근위병이 된 동부 까마귀들이 왕의 곁을 지켰다.
댕 - - - - - -!
마지막 종이 길게 울렸다.
그러자 왕궁 앞으로 갈색 갑주를 입은 리처드가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터벅, 터벅, 터벅.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예를 표했다.
그러자 리처드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눈동자로 세상을 훑은 뒤 선조들이 밟아온 위대한 성묘와 동상을 지나쳤다.
왕자에서 왕으로, 시작에서 끝으로. 리처드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끝에는 왕관을 양손에 떠받친 로날드가 젖은 눈동자로 기립해있었다.
“선조들 아래 무릎을 꿇은 자, 선왕의 뒤를 기꺼이 이으려는 자, 백성들을 지키고 왕실을 수호할 자,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
“위대한 선조들의 후손, 빌헬름 2세의 아들, 백성의 방패, 왕실의 검! 그리고 동부에서 나고 죽을 리처드입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렸던 왕관을 쓰고 맹세하라. 그리하면 동부의 왕이 되리라.”
“맹세, 그리고 또 맹세합니다.”
로날드는 하늘 위로 왕관을 들었다.
그러자 쇳물에서 다시 태어난 강철 왕관이 황혼을 받아 황금처럼 빛이 났다.
아, 그리하여 황금시대라 불렀는가.
동부왕 머리 위에 왕관을 올려놓은 로날드는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강철 왕관이 제 주인을 찾았다.”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와아아아아아 - - - -!!
무거웠던 침묵이 깨졌다.
왕관을 쓴 리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제야 함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모두가 기뻐하는 마지막 날, 나와 검은 화살은 대중들 속에 있었다.
조용히 팔짱을 낀 그녀가 내게 물었다.
“인사 안 하고 가려고?”
“우린 북방으로 돌아가야지.”
“리처드가 많이 섭섭해할 텐데.”
희미하게 웃은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팔짱을 낀 검은 화살과 함께 천천히 민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언젠가는 또 만나겠지.”
만남은 길고 이별은 빠를수록 좋다.
길었던 여정을 끝낸 이방인은 즉위식을 마지막으로 수도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한 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는 축복과 함께 막을 내렸고 이제 위대한 동부왕 리처드가 써 내려갈 서사시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