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검은머리 기사왕 100화
매번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라고 떠들어대던 간신들은 더 이상 한자리에 모이지 않았다.
아니, 자신들이 벌인 패악으로 모든 것이 파탄이 나버린 마당에 한낱 신분이고 친분이고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레드스킨이 침공했다는 소식이 가장 먼저 내뺀 것은 정작 그레고즈였고 간신들은 뒤늦게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재산이었다.
돈이 있어야 위험한 국경을 넘고 어디 가서 자리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은가.
“이, 이익! 더 실어! 더!”
거의 실성하기 직전인 간신 마르크는 마차에 보석이 잔뜩 담긴 궤짝을 하나라도 더 싣고자 필사적으로 짐을 밀었다.
“아이고, 주인님!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사모님이랑 따님도 타셔야죠!”
하지만 사람이 탈 자리도 모자란 마당에 커다란 궤짝을 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마부는 노예 인생 처음으로 주인에게 반항했다.
“빨리 안타고 뭐해!”
그러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간신 마르크가 아내와 하나뿐인 딸을 향해 신경질을 내며 짐으로 가득한 마차를 가리켰다.
으아아앙!
생소한 부친의 모습에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딸과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아내.
평소 자상하던 가장은 어디 가고 오직 욕심으로 추악해진 인간만이 남아있었다.
“······당신이나 가요.”
“뭐, 뭐?”
유명한 대부호 가문에서 시집을 온 아내는 결코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다.
울기 시작한 딸을 끌어안은 그녀는 남편을 향해 서슬 퍼런 얼굴로 외쳤다.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 이거 전부 다 당신이랑 어울리는 머저리들 때문이잖아요!”
동부 왕국을 좌지우지하던 전 재상 그레고즈와 간신 무리는 이미 나라를 말아먹은 역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나마 생각이 있는 부호 가문들은 그들과 빠르게 연을 끊었고 그녀의 친정 또한 어젯밤 몰래 연락을 취해왔었다.
정체라도 들키는 순간 분노한 민중들에게 돌과 쓰레기를 맞아 죽을 게 뻔한데, 무엇을 믿고 그를 따라간단 말인가.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은 딸이라도 지키고자 이 자리에서 결별을 선언했다.
그러자 두 눈을 시뻘겋게 물들인 간신 마르크는 입에 거품을 문 채 소리쳤다.
“여태 내 덕에 잘 먹고 잘살던 년이 뭐? 머저리? 오냐! 어디 한번 그 머저리 없이 잘살아 봐라. 다시는 눈에 띄지 마!”
피붙이에게마저 폭언을 내뱉은 마르크는 결국 빈자리에 나머지 궤짝을 실었다.
그리고 욕망으로 핏발선 두 눈을 번뜩이며 혼란스러워하는 마부를 발로 찼다.
“안가고 뭐해!”
“예, 예!”
찰싹!
히히힝!
국경만 넘어가면 된다.
여태 수많은 재물을 받아온 2황자라면 분명 자신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는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인 재물들을 꼭 끌어안으며 수도 두피디아를 가로지르는 마차에 몸을 맡겼다.
꺄아아아악!
화르륵!
수도는 아비규환이었다.
수많은 피난민 행렬은 물론이고 분노한 시민들로 인해 귀족들은 맞아 죽고 있었다.
어쩌면 전부 자신들의 업보이지 않을까.
마차 틈으로 그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한 마르크는 짙은 후회를 느꼈다.
꿀꺽.
하지만 그 후회도 결국 찰나일 뿐, 오직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목구멍으로 차오른다.
마르크는 마차를 모는 마부 등을 다시 한번 걷어차며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저, 저쪽 길! 저기로 빠져!”
지금 피난민 행렬이 즐비한 정문으로 갔다가는 탈출은커녕 맞아 죽는다.
그걸 진즉에 대비한 통로가 따로 있으니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덜컹, 덜컹, 덜컹!
히히히힝!
재빨리 고삐를 당겨 샛길로 빠지는 마부.
그제야 안심한 마르크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산, 지위, 가문,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던가.
잘못된 선택 한 번으로 전부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과거가 너무 후회스러웠다.
마르크는 몰려오는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수도 풍경이 한시라도 빨리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덜컹! 끼이익!
푸르륵!
하지만 그 순간 잘나가던 마차가 갑자기 급제동을 걸며 자리에 멈춰 섰다.
말들은 깜짝 놀라 울부짖었고 무게를 이기지 못한 마차 바퀴는 옆으로 뒤틀렸다.
쾅!
“이, 이 쓸모없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얼마인데 벌써 마차 바퀴를 고장 내고 앉아있는가.
졸지에 머리를 부딪친 마르크는 마차 문을 열며 욕지기를 내뱉으려 했다.
“마르크, 세르게이 마르크 맞나?”
“- - - - - - -?”
하지만 마차로 다가온 것은 잘못을 빌어야 할 마부가 아닌 한 근육질 남자였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마르크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찾았습니다, 헬레나 님.”
“데려오세요.”
콰직!
근육질 남성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려는 마르크의 안면을 그대로 후려쳤다.
그리고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낚아챈 뒤 헬레나를 향해 질질 끌고 갔다.
“당신은 가봐도 좋아요.”
“감, 감사합니다.”
약속한 대로 말을 멈춰준 마부는 마차에서 내려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리고 길을 비켜준 헬레나는 마르크를 향해 다가가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퍽!
“커억, 컥!”
부서진 이빨과 함께 피가 흐른다.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마르크는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리며 구걸했다.
“살, 살려줘! 제발, 컥!”
퍽!
하지만 헬레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차가운 분노가 담긴 주먹을 휘둘렀다.
한번, 두 번, 세 번, 놈의 어금니가 몽땅 빠졌을 때쯤 그녀는 물었다.
“도대체 왜 그랬어요?”
“끄으윽······.”
“당신도 같은 인간이잖아요. 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뭐예요?”
도대체 돈이 뭐라고, 한낱 권력이 뭐라고 무고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무표정으로 눈물을 흘린 헬레나는 반드시 놈들 입으로 그 이유가 듣고 싶었다.
“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나도 이렇게 될 줄 모르고 한 거야!”
예상대로 놈의 입에서 터져 나온 대답은 전부 변명이었고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하지만 헬레나는 도리어 이런 비겁한 대답이 듣고 싶었다는 듯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끝까지 쓰레기여서.”
똑같은 두건을 쓴 이들이 마차 위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기름을 뿌린다.
그리고 마차 옆으로 내동댕이쳐진 마르코 또한 기름으로 범벅이 되었다.
“아, 아아······!”
멍청한 간신은 자기 운명을 직감했다.
지옥이 없을지도 모르기에 현세에 복수자들이 주는 뜨거운 불구덩이.
마르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망령과 불이 붙은 채 날아오는 한 작은 성냥이었다.
화르륵!
끄아아아아악!
사람이 산채로 타죽는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헬레나는 까마귀 단원들을 향해 말했다.
“다음 표적으로 향할게요.”
뒤늦은 복수는 더욱 달콤하다.
마르크를 시작으로 복수의 시작을 알린 까마귀들은 시체를 맴돌다 사라졌다.
* * *
한때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1황자와 유일한 대항마 취급을 받던 2황자는 빠른 속도로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독차지하고 있었던 식민지 길이 완전히 막혀버리자 더 이상 거대한 덩치를 유지할 힘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전력을 축소하자니 1황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전력을 유지하자니 영지가 파산해버릴지도 모르는 상황.
한참 돈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2황자는 결국 영지와 개인 채무까지 늘려가며 위태로운 내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레드스킨 동부 침공.’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동부에서 폭탄이 터졌다.
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고용되었던 레드스킨이 기어코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북방 왕국의 영향력을 지워버릴 기회다.
무역로를 수복하기로 마음먹은 2황자는 징집한 군대와 함께 동부로 진군했다.
쿵! 쿵! 쿵! 쿵!
척! 척! 척! 척!
‘전속으로 행군하라!’
전력 차이를 알기에 그동안 전면전은 최대한 피해오던 북방 왕국이다.
이토록 많은 군세를 이끌고 온 이상 백색 관문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분명 나오지 않아야 했다.
“폐, 폐하! 북방군입니다!”
두둥! 두둥! 두둥!
와아아아아아 - - - - -!!
모두의 예상을 깨고 백색 관문 앞에는 수많은 북방군이 도열 해 있었다.
그것도 기사왕의 친정을 나타내는 커다란 흰 뿔 사슴 깃발과 함께 말이다.
“······젠장.”
단순한 견제 목적이 아니다.
예비 병력까지 전부 끌어모은 게 분명한 북방군은 전면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도대체 동부가 뭐라고 왕국의 사활까지 건단 말인가? 머리가 아파진 2황자는 일부 호위병력과 함께 앞으로 달려갔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그러자 기사왕 또한 대화를 나눌 생각이 있는지 호위병력과 함께 달려왔다.
평원을 두고 갈라진 양측 군세는 운명을 결정지을 회담을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만나서 반갑소, 기사왕.”
“저 또한 반갑습니다, 2황자.”
얼굴을 직접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양측 왕은 서로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읽자마자 표정을 숨겼다.
어차피 좋은 뜻으로 만난 자리가 아니다.
그렇게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조급함을 숨긴 2황자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현 상황이 참으로 유감이오, 기사왕. 짐과 군대는 단순히 지나가려는 것뿐인데, 왜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오?”
이 일대는 분쟁 지역이다.
영토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길을 막을 수 있는 명분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당연히 공격을 막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기사왕은 어디서 개수작이냐는 듯 환한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물론 그 천진난만함 뒤로는 현 상황을 관통하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동부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결국, 싸늘한 표정을 되찾은 2황자는 왕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를 거둬들였다.
“······무슨 명분으로?”
“동맹을 돕는다는 명분.”
“진즉 깨진 동맹이 아닌가?”
“악적들로 인해 흔들렸을 뿐이지.”
빌빌거리던 과거의 북방이 아니다.
당당히 어깨를 편 검은 머리 기사왕은 강철 동맹이 굳건함을 세상에 알렸다.
“강철 동맹은 영원하다!”
와아아아아아 - - - -!!
그러자 북방군이 다시 한번 함성을 내지르며 놈들을 향한 전투 의지를 밝혔다.
휘날리는 깃발, 부딪히는 병장기, 도리어 위축된 것은 급히 징집된 2황자 군대였다.
까드드득!
무려 군주의 체면이 상했다. 더 이상 물러날 길이 없었던 2황자는 이를 악물었다.
“허세와 용기를 구분해라, 기사왕! 네놈들에게 전선을 늘릴 여력이 있다고 생각하나? 지금 당장 군대를 물려라!”
북방은 전면전을 벌일 여력이 없다.
그렇게 믿고 싶은 2황자는 모든 북방군이 들으라는 듯 오러로 언성을 높였다.
“북방군 - - - - -!!”
하지만 눈투성이는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덩달아 목소리에 오러를 실었다.
하늘을 향해 높게 들어 올린 왕의 검은 분명 공격을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뿌우우우우우우 - - - - - -!!
황자는 기겁하며 도망쳤다.
대규모 전쟁을 예상치 못했던 오크 군대는 당연히 당황했고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지휘관들조차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황자는 그날 떠올렸다.
전장에서 가장 피해야 할 적은 바로 오늘 전장에서 죽기로 한 자들이란 걸 말이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으아아아아아 - - -!!”
평화로웠던 평원은 일제 돌격을 시작한 북방군으로 인해 백색으로 물들었다.
물론 가장 선두는 기다란 검은 머리를 휘날리는 위대한 기사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