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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99화 (99/181)

99화

검은머리 기사왕 99화

“안, 안돼! 오지 마아악!”

서걱!

전장에서 도망치려는 레드스킨 부장을 잡아 투구 틈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그러자 뼈를 가르는 살벌한 손끝 감촉과 함께 놈은 피를 흘리며 죽는다.

끄르르륵.

방금 즉사한 놈을 마지막으로 내가 사살한 레드스킨 부장만 총 12마리다.

격돌 초기부터 헤드헌팅만 집요하게 해온 결과 꽤 많은 수급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적의 지휘체계를 무력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전장에는 적,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수많은 시체가 뒤엉켜있었다.

피를 흘리려는 자, 피를 흘리라고 했던가.

레드스킨 용병단을 전멸시키기 위해 희생한 대가는 바로 동부군 자신들이었다.

툭.

나는 무거운 수급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죽어간 아군의 넋을 조금이라도 달래고자, 산발적으로 후퇴하는 레드스킨 놈들을 집요하게 따라갔다.

기교도, 기술도 필요 없다.

마치 도축하는 기계처럼 뼈를 끊고 울부짖는 돼지들 멱을 따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끄아아악!

깡! 서걱! 까가각.

동부를 탐낸 대가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갑옷 틈 목을 톱질하듯 자르고 검 손잡이로 투구 속 안면을 박살 냈다.

하아, 하아.

무거운 갑옷 탓에 숨이 차오른다.

단내가 풍겨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쉰 나는 손에 묻어나오는 피를 털어냈다.

으아아아아아 - - -!!

그러자 저 멀리서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지르며 돌격해오는 슬링어 부대가 보였다.

전투 중 가장 큰 피해가 생긴다는 전장 추격전에 가담하고자 돌격한 것이다.

죽어, 이 개새끼들아!

이미 눈이 돌아가 버린 슬링어 부대는 참혹한 전장을 향해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그리고 다치거나 도망친 놈들을 끌어내 미친 듯이 워해머를 휘둘렀다.

모조리 죽여!

으아아아!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놈들은 워해머로 투구를 내려쳐 머리를 깨부순다.

부장으로 추정되는 놈들은 여러 명이 달려들어 사지를 붙잡고 목을 긋는다.

포로는 없다, 관용도 없다.

그들이 무고한 동부인에게 그랬듯이 오직 고통과 죽음만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퉤!

지금쯤 우회한 아군 기병대도 후퇴를 시도하는 적 궁병대를 덮쳤을 것이다.

입안에 고인 피와 진창을 뱉어낸 나는 그제야 힘을 풀고 검을 살폈다.

피를 얼마나 먹었는지 꾸덕꾸덕한 검날과 살점 속 지방으로 미끄러운 손잡이.

나는 무심히 팔꿈치 안쪽으로 검날을 닦은 뒤 거슬리는 투구를 벗어 던졌다.

까악! 까악

해는 벌써 중천이다.

하늘에는 불청객인 까마귀가 찾아왔고 곳곳에 들려오던 비명도 잦아들었다.

하지만 단 한 곳.

전장 한가운데 벌어지는 마지막 혈투만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 - -!”

쾅! 콰앙! 챙!

놈이 거대한 도끼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습기로 눅눅해진 대기가 터져 오르고 거센 떨림이 여기까지 전해져왔다.

과연 저게 한 손으로 휘두르는 위력이 맞단 말인가? 오우거라는 이명이 걸맞게 레드스킨 수장은 막강한 실력자였다.

츠즈즈즈즉, 피잉!

하지만 오우거의 오른손을 저 꼴로 만든 리처드는 검날에 응집한 오러를 이용해 공격을 무아지경으로 흘리고 있었다.

작은 체구 안에 고스란히 녹여낸 북방 검술과 위기 앞에서도 배짱을 잃지 않는 용기!

세상 물정 모르던 철없던 왕자는 어느새 동부를 일으킨 작은 거인이 되어있었다.

전쟁은 이미 끝이 났다.

대부분 레드스킨은 진창 아래 목숨을 빼앗겼고 소수만이 살아남아 도망쳤다.

이제 남은 것은 놈들의 수장뿐이다.

살아남은 동부군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혈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 - - - - - -.”

하지만 섣불리 껴드는 이는 없었다.

살벌한 수가 오가는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동부왕이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조용히 검을 집어넣고 그 자리에 섰다.

이미 리처드는 자신이 써 내려간 역사에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고 있었다.

“Graaaaa!”

오우거는 미칠 지경일 것이다.

분명 자기 허리밖에 오지 않는 조그마한 인간 놈은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으며 모든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어째서 쓰러지지 않는 거지?

왜 굴복하지 않는 거냐!

피투성이 벌레는 하찮아야 하는 것만 피투성이 인간은 너무나 두려웠다.

“크륵?”

그리고 분노로 치환되지 못한 두려움은 놈의 판단을 점점 흐리게 만들었다.

강약을 조절해가며 싸워야 하는 결투에서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한 것이다.

‘때를 기다려라.’

리처드의 검술은 수비적이다.

온갖 강적이 즐비한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을 막는 방법을 먼저 배운 것이다.

‘때는 올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거북이 같다고 웃던 놈들은 전부 이 ‘공격’에 걸려 죽었다.

그것은 오직 군소리 없이 검을 휘둘렀던 녀석만이 펼칠 수 있는 비장의 한 수다.

‘지금이다!’

까드득!

나는 전율과 함께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여태 공격을 막기만 해오던 녀석이 번쩍이는 두 눈과 함께 이를 악물었다.

까앙!

힘이 빠진 도끼를 맞받아친다.

육중한 오우거는 그대로 중심을 잃었고 리처드는 드디어 가드를 풀었다.

“아아아아- - - - - !!”

완벽한 패링! 그리고 빠른 자세변환!

입에서 형용할 수 없는 고함을 내지른 리처드는 놈에게 카운터를 작렬시켰다.

츠즈즈즈즉! 까드득!

푹!

“끄아아아악!”

검이 갑옷을 뚫고 들어갔다.

끔찍한 고통 앞에 오우거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고 이내 온몸을 허우적거린다.

하지만 검은 이미 가슴팍을 관통한 상태다.

아무리 저항하려고 해도 살과 뼈를 뚫고 들어간 검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쿵!

놈이 결국 한쪽 무릎을 꿇는다.

투구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는 갑옷을 흠뻑 적셨으며 도끼 또한 힘없이 떨어졌다.

드디어 정해진 승자와 패자.

동부를 집어삼키려 했던 더러운 압제자는 허망한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큭, 크르륵, 큭!”

오우거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평생을 걸쳐 키워온 용병단이 이런 조그마한 인간 놈들에게 전멸당했다.

운명이 자신을 시기한 것인가? 아니면 왕이 되고자 했던 욕망이 과했던 걸까.

조금씩 사라져가는 의식 속에 허망한 오우거는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놈은 쉽게 가지 않았다.

황금시대가 저물었던 과거 동부처럼 이 승리와 영광 또한 영원하지 않으리라.

“크륵, 큭, 큭큭······. 우, 우리가 끝이라 생각하나? 아니, 영원히 계속될 거다. 너희들은 멸종을 앞에 두고 시험받겠지. 현재도, 미래도, 후손까지, 평생을 말이다.”

이번 시도가 끝이 아니다.

제2의 제3의 강자는 언제든지 나타날 것이며 동부는 멸종을 시험받을 것이다.

너희들이 과연 이것을 버틸 수 있을까.

아니, 버텨낸다 해도 후손도 똑같은 불합리 아래 수없이 죽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지 마라, 인간들아.”

현실적이기에 더 통렬한 저주였다.

그 외침을 들은 동부군은 오늘 다친 상처가 더욱더 쓰라린 것을 느꼈다.

“아니.”

하지만 결국 승리를 이룩한 리처드만큼은 그 저주를 단호히 부정했다.

의지가 느껴지는 양쪽 손은 어느새 놈의 가슴팍에 박힌 검을 움켜잡고 있었다.

“동부는 괜찮을 것이다.”

까드드득!

“커억, 컥!”

리처드는 양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오우거의 마지막 의식을 붙잡고 있던 검이 핏물과 함께 빠져나왔다.

주르륵.

차가운 죽음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서서히 꺼져가는 시야 사이, 놈이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엄숙한 읊조림이었다.

“인간이 자유를 위해 죽는 한.”

“기회는 반드시 있다.”

* * *

치열했던 전쟁 끝에 리처드가 이끄는 동부군은 레드스킨 용병단을 괴멸시켰다.

하지만 쟁취한 승리와는 반대로 2할에 가까운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그보다 많은 부상자가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우리는 일단 급한 대로 평원 주변에 진을 쳤다.

그리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진창에 얽혀 죽어간 전우의 시체를 회수했다.

어차피 마지막 전투의 승리로 더 이상 동부군을 위협할 적은 없었다.

나는 최소한 초병만을 남겨둔 채 고생한 병사들에게 무기한 대기를 명령했다.

그들에게는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

나는 어둠이 깊은 밤, 군영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리처드는?”

한참 치료를 받던 중 부름을 받고 달려온 헬레나가 천막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다급히 물어오는 내게 훨씬 밝아진 얼굴로 희소식을 전해주었다.

“방금 잠들었어요.”

전투 중 입은 부상이 얼마나 심했는지, 녀석은 전투가 끝나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다행히 현장에서 이뤄진 내 빠른 응급처치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하마터면 왕이 되기도 전 죽을뻔했다.

나는 감히 부상을 감춘 리처드에게 두고 보자는 듯 조용히 구시렁거렸다.

짝!

“시끄러워. 너도 뭐라 할 자격 없으니까.”

그러자 잠자코 내 자상을 꿰매주던 검은 화살이 등짝을 강하게 내려쳤다.

심통이 난 그녀 말대로 진창을 뒹굴었던 내 몸 상태 또한 말이 아니었다.

워낙 치열한 전쟁이었으니 뭐.

나는 따끔거리는 등짝을 긁으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헬레나를 향해 물었다.

“로날드 경은?

“패잔병들을 추적 중이세요.”

우리가 적군 주력을 처리하는 사이, 로날드와 헬레나가 이끄는 동부 기병대는 레드스킨 궁병대를 몰살시켰다.

하지만 로날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산발적으로 도망친 패잔병을 죽이기 위해 지금까지 일대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동안 쌓인 분노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나는 검은 화살이 건네주는 옷을 걸쳐 입으며 앞으로 있을 계획을 설명했다.

“당분간 여기서 휴식을 취한다. 중상자들은 소돔으로 후송하고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을 모아 다시 부대로 재편하도록.”

“곧바로 수도로 향하나요?”

“리처드가 깨어나면 그때 간다.”

이제 마무리할 일만 남았다.

북방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 나는 헬레나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까마귀들이 해줘야 할 게 있다.”

“말씀하세요.”

“몰래 수도 두피디아로 들어가 빌헬름 2세와 간신 놈들 위치를 수배해라. 흔적만 있어도 상관없으니 절대 들키지 말고.”

허수아비가 된 빌헬름 2세는 그렇다고 쳐도 일을 이 지경까지 몰고 간 간신 놈들은 절대로 살려 보낼 수 없다.

나는 이런 일에 특화된 까마귀들을 동원하고자 했고 왕실을 증오했던 헬레나 또한 두 눈을 살벌하게 빛내며 동의했다.

“그런 명령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혹시 위치를 확인하면 죽여도 되나요?”

“나머지 끄나풀은 죽여도 좋아. 하지만 그레고즈만큼은 절대 건들지 마.”

“······명심할게요.”

특히 원흉이라 예상되는 전 재상 그레고즈는 이미 죽일 사람이 정해져 있다.

나는 기억 속 남아있는 그 가증스러운 여우를 떠올리며 작게 혀를 찼다.

그때만 해도 훌륭한 재상이었던 인자한 노인이 그리 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경례를 붙이는 헬레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준 뒤 다시 침대 위에 앉았다.

털썩.

가장 힘들었던 고비는 넘겼다.

이제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 사라졌던 강철 동맹을 재건하는 일만 남았다.

나는 손을 뻗어 아껴두었던 편지지와 함께 마지막 전서구를 꺼내 들었다.

이제 상황을 살피고 있던 북방 왕국과 기사왕 눈투성이가 나서 줄 차례다.

어느새 잠이 든 검은 화살 옆에서 열심히 깃털 펜을 움직이자, 기분 좋은 병사들의 웃음소리가 다른 천막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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