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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98화 (98/181)

98화

검은머리 기사왕 98화

질 좋은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레드스킨 용병들에게 있어 날아오는 화살은 용기와 배짱만 있다면 무섭지 않았다.

특히 동부 민병 따위가 쓰는 조잡하고 느린 화살로는 임시로 들어온 소형 방패와 갑옷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주먹보다 조금 작은 돌 탄환이었다.

그것도 맞으면 투구 속 머리통이 터져버리는 엄청난 위력과 함께 말이다.

깡! 콰직!

쒜에엑 - -! 콰직! 까앙!

관통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분명 갑옷으로 온몸을 둘렀음에도 불구하고 타격감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거기다 날아오는 탄환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이곳저곳에서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미친 새끼들! 시야를 아래로 내리자 무려 두 부대가 넘는 동부인들이 길게 개조한 슬링을 쉴 새 없이 돌리고 있었다.

끄아아악!

젠장, 돌격! 돌격해!

이곳저곳에서 피해가 속출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했던 레드스킨은 결국 전진 속도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두두두두두두- - - -!!

Uraaaa!!

어차피 우리가 유리한 내리막길이다.

서서히 가속을 받은 놈들은 바로 앞 30m까지 접근한 동부군을 향해 고함을 내지르며 그 흉측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20m, 10m 그리고 바로 앞!

선두 용병들은 길게 개조한 할버드를 위에서 아래로 거침없이 내려찍었다.

철퍽, 철퍽, 비틀!

“- - - - - - !!”

하지만 그 순간 앞으로 내디뎠던 쑥 쓸리며 달려가던 선두가 무너져 내린다.

정말 어이없게도 적들을 향해 할버드를 내려찍으려던 그 순간 미끄러진 것이다.

콰아아앙- - ! 쿵! 콰직!

선두가 파이크 창에 꿰뚫린다.

가속이 실린 탓에 바로 다음 대열을 멈추지 못했고 연쇄적인 충돌이 일어난다.

서로를 찌르는 파이크와 할버드.

창대는 부러졌고 비명을 지르는 나무 파편이 하늘, 얼굴, 바닥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철퍼덕!

그리고 깜짝 놀란 한 레드스킨 부장이 정지를 명령하려 할 때쯤 바닥에 넘어진 오크 놈 하나가 경악한 얼굴로 읊조렸다.

“진, 진창이다.”

밤새 내린 비로 인해 언덕 아래에는 광범위한 검은색 진창이 생겨 있었다.

그것도 강철로 만든 군화가 푹푹 들어가는 뻘처럼 깊숙한 진창 말이다.

두두두두두! 쾅!

하지만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가속을 이기지 못한 맨앳암즈 전원은 그대로 지옥 같은 전장에 휘말렸다.

Push of pike. 긴 사정거리를 가진 무기가 첫 번째 격돌 이후 벌어지는 난전.

넘어지고 쓰러트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온몸은 피와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끄아아아악!

채앵! 챙! 서걱

적이 내뱉는 숨이 느껴진다.

넘어질 때마다 차가운 진흙과 뜨거운 핏물이 묻었고 눈앞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얼굴을 채 닦기도 전 지금 당장 달려오는 놈이 적인지를 봐야 했다.

찌르르 떨리는 귓가 너머로 살려달라, 죽여달라 외치는 비명이 난무했다.

죽어어어!

깡! 콰직, 푹!

그나마 제구실을 하던 대열이 무너지자, 적을 찌르기 위해 들고 있던 파이크와 할버드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격돌한 양측 진영은 결국 길이가 짧은 부무장을 꺼내 들어 투구 틈을 찌르거나 손잡이로 머리를 미친 듯이 내려찍었다.

주먹을 휘두르고, 목을 조르고, 투구를 벗겨 얼굴을 물어뜯고, 마치 짐승들을 보는듯한 원초가 본능을 지배한다.

아아아아악!

꺼져, 이 벌레 같은 놈들아!!

레드스킨 놈들은 미칠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들을 보호해주던 강철 갑옷은 진창과 함께 뒹굴수록 무거워져 몸과 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비교적 가벼운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동부군은 갈수록 전의를 불태우며 용병단을 갉아먹고 있었다.

내려찍으면 다시 일어나고, 목을 조르면 갑옷 틈으로 검을 찔러놓는다.

도대체 무엇이 한낱 농부였던 이들을 용감한 전사로 만들었단 말인가?

이번 전쟁을 당연히 낙승하고 있었던 레드스킨 용병단은 처절할 정도로 분전하는 동부군 앞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 제발!

아아아악!

한 오크 용병이 바닥에 넘어졌다.

그러자 진창을 기고 있던 동부군 3명이 달려들어 갑옷과 투구 틈으로 날이 나간 단검을 미친 듯이 쑤시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그리고 그 모습에 완전히 학을 뗀 레드스킨 부장은 주변에 흩어져 있던 용병들을 불러모아 다시 대열을 가다듬으려고 했다.

다각, 다각, 다각!

하지만 그 순간 진창과 멀지 않는 측면 언덕에서 익숙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고,

현장을 지휘하던 레드스킨 부장은 그 방향을 향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두두두두두두 - - - -!!

레드스킨 기병대가 성공적으로 우회했다.

그리고 미리 상의한 작전대로 무방비한 동부군의 측면을 치려 했다.

레드스킨 부장이 경악했다.

동시에 기마 돌격을 발견한 용병들 또한 황급히 뒤로 도망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안, 안돼!”

“시발 오지마아아아!!!”

아군이고 적군이고 전부 진흙과 함께 뒤엉켜 싸우고 있는 난전 상황이다.

만약 여기로 중무장한 기병대까지 돌격해온다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모조리 쓸어버려!

돌격! 돌격하라!

하지만 하필 양측 진영은 둘 다 갑옷이 어두운 계열이었고 멀리서는 난전인지 방진 싸움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뿌우우우우 - - -!

두두두두두두두!

당연히 잘 밀어내고 있겠거니, 기마 돌격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레드스킨 기병대.

귀를 찌르는 돌격 나팔과 함께 측면 언덕으로 육중한 기마 돌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뻔했다.

히히히힝!

진창이다!!!

가까운 거리까지 도착한 기병대는 상황이 난전이고 진창이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내리막길에서 시작된 가속은 단순히 고삐를 당기는 것만으로 막을 수 없었다.

충돌했다.

콰직! 쿵!

쿵! 푸르륵! 콰아앙 - -!

육중한 기마 돌격 앞에 보병들은 적과 아군 구분 없이 곤죽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전장에 발을 들인 기병대는 진창과 시체에 발이 걸려 그대로 넘어졌다.

히히히힝!

푸르륵, 푸륵!

앞에서 쓰러지고 뒤에서 민다.

기병대는 진창을 밟는 족족 기수가 흔들렸으며 아군끼리 부딪쳐 낙마했다.

예외는 없었다. 운이 좋은 놈들만이 목이 꺾여 즉사했을 뿐 대부분은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보병들 사이에 떨어졌다.

레드스킨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전술에서 불리하다고 생각된 모든 요소가 자신들을 저지했다.

하지만 전쟁은 멈추지 않는다.

양측이 멈추기를 원해도,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든 것을 심연 아래로 끌어낸다.

살, 살려줘·········.

끄르륵, 큭!

적도 죽고 아군도 죽었다.

이제는 살아있는 자들보다 진창 위에서 뒹구는 시체들이 더 많았다.

도대체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했는가.

시체를 파먹기 위해 날아온 매정한 까마귀들조차 감히 지상으로 내려올 수 없었다.

삐이이이익!

떨리는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검은 화살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격돌 전 사방으로 후퇴했던 슬링어 워해머를 든 채 하나둘 집결했다.

“- - - - - - - -.”

그들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참혹한 광경 앞에 숭고한 사명은 이미 사라지고 오직 증오와 분노만이 남은 것이다.

모조리 죽여 이 땅 아래 묻어주마.

굴복했던 과거도, 엎드려야 했던 치욕도, 워해머를 쥔 손에 내려앉았다.

스릉!

검은 화살은 외날 검을 뽑았다.

그리고 슬링어 부대와 함께 아군이 기다리는 전장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 * *

어린 시절 영웅을 선망했다.

그들처럼 세상을 구하고 싶었고 수많은 칭송 아래 찬란히 빛나고 싶었다.

하지만 냉혹한 세상은 내게 세상을 바꿀 재능과 몸을 주지 않았다.

리처드는 시대에 걸맞은 황금은커녕 쉽게 녹이 스는 평범한 쇳덩이에 불과했다.

겨우 쇳덩이로 태어난 사내가 어떻게 황금의 시대를 다시 연단 말인가?

맞서 싸워야 할 불의는 너무나 어두웠는데, 내가 품은 불꽃은 너무나 작았다.

그렇게 시대는 저물어,

운명에 순응해야 할 날만이 남았었다.

‘왕자님, 타고난 운명은 없습니다.’

북방 행은 충동적인 일탈이었다.

아무런 대책도 방법도 없는 주제에 그저 운명을 바꿔달라 빌었다.

하지만 아름답게 빛나는 기사왕과 검성은 기꺼이 자신을 기사로, 일원으로, 그리고 흘린 피를 나눈 형제로 받아주었다.

‘동부의 철은 강인하다고 들었어요. 뜨거운 열기를 이겨내고 쉴 새 없이 두드리는 망치질을 참아내야 하기 때문이죠.’

아! 나는 무른 쇳덩이가 아니었구나.

뜨겁게 불태우고, 두드리고, 고난을 극복하고 나서야 완성된 운명이 보였다.

불 속에서 태어난 강철!

까만 잿더미에서 눈을 뜬 리처드는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기운을 힘껏 밀어냈다.

“끄아아아아아 - - -!!”

털썩

죽은 말이 몸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그것을 기적적으로 밀어낸 리처드는 멈추기 직전이었던 심장을 펌프질했다.

막혔던 기도가 열리자 숨이 돌아온다.

흐릿했던 정신은 그나마 맑아졌고 죽음이 잊게 했던 고통이 몰려왔다.

갈비뼈가 나갔다, 왼팔이 부러졌다.

출혈로 인해 세상을 핑핑 돌았고 팔다리는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당당히 허리를 폈다.

피라는 성수로 축복을 받고 살점으로 왕관을 쓴 자는 당당한 동부왕이었다.

그리고 그 동부왕 시야에 수많은 시체 사이에서 후퇴하려는 한 무리가 보였다.

섣부른 기마 돌격으로 모든 것을 망친 레드스킨의 수장 오우거였다.

“으아아아아! 벌레 같은 새끼들!”

낙마로 크게 다친 놈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동부군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대패했다는 분노와 도망쳐야 한다는 치욕을 풀고 있던 것이다.

이대로 두면 알아서 사살될 것이다.

하지만 피투성이 왕 리처드는 놈이 다른 이들 손에 죽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절그럭.

가까운 거리에 떨어진 검을 쥐었다.

그리고 목구멍을 솟구치는 피를 한차례 토해낸 다음 전장 한가운데를 걸었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은 막혀왔고 부러진 갈비뼈는 폐부를 연신 찔렀다.

하지만 리처드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던졌다.

힘없이 날아간 투구는 두 눈이 벌게진 레드스킨 수장 오우거 앞에 툭 떨어졌다.

“오우거 - - - - !!!!!!!!!!!”

툭.

놈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전장에 홀로 선 리처드를 향해 거품 어린 침을 뚝뚝 흘린다.

허리밖에 오지 않는 작은 인간이다.

도대체 무슨 용기로 이 위대한 전사 오우거를 향해 고함을 내지른단 말인가.

“크르르륵······.”

기분이 상한 오우거는 수많은 동부군을 학살한 거대 도끼를 쥐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리처드를 향해 맹렬히 달려갔다.

쿵! 쿵! 쿵! 쿵!

육중한 근육이 꿈틀거린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쿵쿵 울렸고 거대한 체구는 태양마저 가렸다.

커다란 거인과 작은 인간의 싸움.

결과가 불 보듯 뻔해 보이는 양팔을 들어 올린 오우거는 도끼를 내려찍었다.

쿠우우웅!

까앙!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공격 한 번으로 주변 공기가 파르르 떨리고 진창이 튀겼다.

회심의 미소가 지어진다, 묵직한 감각으로 보아 첫 일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겁 없던 인간을 화풀이로 죽여버린 오우거는 내려찍은 도끼를 천천히 회수했다. 아니, 분명 회수하려고 팔을 들었다.

츠츠측, 츠즈즈즈즉!

“오러······?”

거대한 도끼날이 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방금 막 잉태를 끝낸 작은 오러는 보란 듯이 전개되었다.

죽음 이후 눈을 뜬 각성.

황금이 되지 못했던 왕자는 강철이 되어버린 검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서걱!

“끄아아아악!”

오우거의 손목이 잘려 나간다.

놈은 오른손을 움켜잡으며 비명을 질렀고,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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