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검은머리 기사왕 96화
왕실이 무방비하다는 걸 눈치챈 레드스킨 놈들이 기어코 칼끝을 돌렸다.
물어뜯기 어렵고 맛이 없는 사냥감 대신 쉽고 맛있는 먹잇감을 선택한 것이다.
황금알을 이렇게 잘 낳아 주는데, 뱃속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 있을까.
한낱 아이들이 보는 동화의 교훈 따위로는 놈들이 가진 욕망을 막을 수 없었다.
잔혹한 약탈과 파괴가 시작되었다.
동부 전역에 흩어져 있던 레드스킨은 그나마 지키고 있던 선이라는 것을 넘어 오크가 지닌 더러운 본성을 드러냈다.
불타오르는 마을, 쑥대밭이 된 도시.
민중 봉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쿠트나 인근 지역은 무고한 이들이 흘린 피와 내지른 비명이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가시지 않았다.
‘나는 침묵했다.’
이것이 불의를 외면한 대가인가.
불안한 평화라도 지키고 싶었던 동부인들은 자신의 고향과 가정이 처참히 파괴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다.’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입 아프게 책임을 떠넘길 민중은 전부 죽었고 자신들을 탓할 유일한 봉기도 꺼졌다.
‘과거’ 저항한 대가로 죽었다면 ‘현재’ 저항하지 않은 대가로 죽어야 한다.
압도적인 폭력과 악의를 마주한 동부인들은 그렇게 운명을 저주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운명과 맞서 싸우기를 선택한 이들은 가장 처참하게 밟혔었던 동부 까마귀와 소돔 민중들이었다.
“한시가 급하다! 빨리 움직여!”
“일 인당 하나! 일 인당 한 자루! 아니 새끼야, 두 개를 가져가면 어쩌냐!”
고심 끝에 공세가 결정되었다.
동시에 병사들을 향한 소집령이 떨어졌고 출진을 위한 보급이 서둘러 이루어졌다.
동부 대장장이들이 밤잠을 설쳐 가며 만든 통일된 갑옷을 입고 슬슬 손에 익어 가는 파이크와 슬링을 손에 든 동부군.
아직 부족한 훈련 수준과는 별개로 내가 근 9년간 지휘해본 단일 부대로는 최대 규모를 가진 군대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출진 전날 오후, 사열한 동부군을 마지막으로 마주한 나는 성벽 위에 모인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출진했다는 것을 알면 놈들도 다시 공세를 취할 거다. 아마 수도로 향하는 접경지가 결전 장소가 되겠지.”
놈들이 소돔에서 칼끝을 돌린 이유는 피해가 생각보다 훨씬 커서였지, 소돔에 틀어박힌 봉기군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아마 우리가 알아서 나와 준다면 옳다구나 외치며 다시 군대를 몰고 올 게 뻔했다.
최후 결전은 그때가 될 것이다.
이미 전장에서 취할 전략을 미리 그려둔 나는 일행들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그 누구 하나 섣불리 전의를 내보이는 자가 없었다.
그것은 무서워서가 아닌 망국의 말로가 어떤 파국으로 치닫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죽을상을 한 리처드가 내게 물었다.
“그동안 그쪽 사람들은······.”
“많이 죽을 거다.”
아무리 빨리 행군한다고 해도 도착까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그사이 무방비하게 방치된 쿠트나 지역 사람들이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동부인들을 구한다는 일념으로 그 힘든 과정을 전부 견뎌 낸 리처드.
하지만 항상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쌓여 가는 건 씻지 못할 업보뿐이었다.
녀석의 고통을 이해한다.
나는 축 처진 어깨를 꾹 잡아주며 당장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를 했다.
“지금은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한계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명심하겠습니다.”
기특한 녀석, 이제 왕이 되어 군대를 이끌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나는 굳센 심지를 가진 리처드를 한동안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크게 외쳤다.
“다들 각자 자리로 돌아가라! 해가 뜨는 새벽! 수도를 향해 진격한다!”
지휘관 연설도, 웅장한 노래도 없었다.
담백한 사열을 끝낸 동부군은 그날 오후 소돔 앞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유난히 깊고 높았던 별들이 지나 여명이 찾아온 새벽. 조용히 진을 정리한 동부군은 소리소문없이 진군을 시작했다.
북방에서 온 형제, 왕실에서 도망쳐온 왕자와 기사,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동부인들, 이 모두가 동부라는 거푸집 아래 하나 되어 튼튼한 강철이 되었다.
* * *
“으, 으······.”
언제부턴가 세상이 뿌옇게 변했다.
생각하려 할 때마다 머리가 아팠고 의지는 개미가 갉아먹듯 점점 약해졌다.
쇠약해진 몸, 주름 가득한 얼굴.
오늘은 이상하게 정신이 맑아진 빌헬름 2세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아, 아무도 없는가?”
왕궁의 대전은 텅 비어 있었다.
감히 왕이 불렀음에도 근위대는 나타나지 않았고 흔한 시종조차 보이지 않는다.
“끄으으윽.”
아프다, 머리가 너무나 아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힘이 없던 마지막으로 타오르려는 불꽃처럼 왕좌를 벗어났다.
텅텅 빈 왕궁 한가운데를 걷는다.
간혹가다 급히 도망치는 관리들이 보였지만, 시야에 닿지 않을 만큼 멀리 뛰어가고 있어 헛손질만 하게 될 뿐이었다.
찬란하던 왕궁은 어디 가고 오직 회색빛만이 감도는 공허만이 남아있는가.
순간 머리가 아찔해짐을 느낀 빌헬름 2세는 왕궁 테라스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덜컹! 촤르륵!
후우, 후우······.
커튼을 치고 테라스 문을 열자 여전히 차가운 겨울 공기가 폐부를 치고 들어온다.
하지만 뿌연 시야를 뚫고 들어온 수도 풍경은 자신이 알던 곳과는 너무나 달랐다.
“아, 아아······!”
폭도들이 태운 검은 연기가 타오른다.
화재를 진압하지 못해 수도 이곳저곳에선 거대한 화마가 넘실거렸다.
도망치는 가족, 울고 있는 아이.
침공을 피하고자 피난 길에 오른 수많은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맑아진 정신으로 마주한 수도 두피디아는 처참한 망국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폐하.”
그리고 그 순간 테라스 바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서둘러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동부 왕국의 재상이자, 친우인 그레고즈가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오, 재상? 적이라도 쳐들어 온 거요? 다들 도망치고 있잖소!”
“오늘은 정신이 맑으시군요.”
“그게 무슨······!”
강한 통증이 머리와 심장에 몰려온다.
비명을 마지막으로 머리를 움켜쥔 빌헬름 2세는 결국 몸을 가누지 못했다.
털썩!
이제야 모든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점점 무기력해진 자신과 속국이 되어 버린 동부, 자신을 힐난하는 친아들과 모든 게 괜찮다며 고개를 숙이는 간신 무리.
그 누구보다 현명했던 빌헬름 2세는 죽음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를 깨달았다.
“네 이놈······!”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뻔뻔하게 서 있는 그레고즈의 멱을 앙상한 손으로 부여잡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어쩌자고 이 지경까지 왔냐 이 말이야! 그레고즈! 입이 있으면 말이라도······! 컥!”
자신이 모셨던 왕의 마지막 꾸짖음이다.
하지만 그레고즈는 그것마저 듣기 싫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손을 밀쳐낸다.
털썩.
땡그랑!
몸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약한 반동에도 불구하고 쓰러져 버린 빌헬름 2세.
위태롭게 걸려있던 동부 왕관은 쓰러진 권위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그레고즈는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왕과 접촉한 손을 닦으며 말했다.
“북방이 진 순간 운명은 정해졌습니다, 폐하. 그걸 제가 9년간 연명하게 했으니 이보다 더한 충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노예로 죽는 것이······?”
“하하하! 노예로 태어났으니 노예로 죽어야지요! 소신은 단 한 번도 타고난 운명이 바뀌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여태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폐하.”
그리 대답한 그레고즈는 손을 닦던 손수건을 무심히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마지막 말과 함께 뒤돌아 멸망의 기운이 감도는 왕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참 행복한 꿈을 꾸셨습니다, 폐하. 이제 잠에서 깨어 현실을 보십시오. 감히 하늘을 올려다본 망종이 어떠한지를 말입니다.”
쿨럭!
정신이 서서히 흐려진다.
결국, 피를 토해낸 빌헬름 2세는 후회와 고통으로 먹칠 된 주마등을 보았다.
내 아들······, 내 아들 리처드,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에게 무거운 짐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천천히 어두워지는 시야 사이로 본 마지막은 피로 물든 왕관이었다.
* * *
레드스킨 놈들이 지나간 길과 마을은 풀 한 포기조차 남지 않고 파괴되어 있었다.
민중들이 스스로 들고일어날 여지조차 주지 않기 위해 철저히 짓밟아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놈들과 뒤늦게 출진한 소돔 동부군은 놈들이 쓸고 지나간 길을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왕조를 열자 다짐한 이유가 백성 그 자체였는데, 고향과 집이 사라진 가여운 이들을 외면할 리가 있겠는가.
말에서 내린 리처드는 손수 그들을 돌보며 소돔으로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보급품이 실린 마차 자리까지 양보해 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함께한 동부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기가 올랐다.
동부를 구원한다는 사명감이 이제 각 병사 개인에게도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쑥대밭이 된 지역을 수습하며 행군한 동부군은 이미 함락된 대도시 쿠트나와 수도를 향해 진군하기 직전인 레드스킨 군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진을 쳐라.’
다들 무리한 행군으로 인해 지친 상태다.
나는 일단 접경지 부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지대로 동부군을 이끌고 올라가 휴식을 취하기 위한 진을 치도록 했다.
쿠트나를 점거한 레드스킨도 곧 접경지까지 진출한 동부군을 발견할 것이다.
굳이 급할 필요 없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 오크 놈들을 기다리면 된다.
“하나, 둘!”
“으아아아, 당겨!”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이 동원된 만큼 진영을 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직접 진영 건설을 선두지휘하며 이런 임무가 아직 서툰 그들을 도와주었다.
다각! 다각! 다각!
하지만 그 순간 저 언덕 아래 평원에서 정찰병을 이끌고 나간 로날드가 안장에 무언가를 대롱대롱 매단 체 진영으로 복귀했다.
“경! 이것을 보십시오!”
“레드스킨 놈들이군.”
“근방을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로날드가 안장에 달고 온 것은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오크 얼굴이었다.
정찰 중 마주친 레드스킨 측 정찰병을 단칼에 목을 베어 가져온 것이다.
“훌륭하다.”
역시 로날드다.
자칫하면 진영 건설 전 습격을 받을뻔한 것을 사전에 차단해 주었다.
유능한 그를 한차례 추켜세운 나는 깨끗한 천과 수통을 건네며 정찰 결과를 물었다.
“내가 말한 지형은 찾았나?”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좋은 지형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수비하기 좋은 언덕 지형에서 적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정반대되는 지형은 전장으로 골랐고 당장 다가오는 내일, 레드스킨 놈들과 그곳에서 싸울 예정이었다.
“문제없다, 나만 믿어라.”
“······목숨으로 따르겠습니다, 경.”
불가능하다고 여겼으면 시도조차 안 했다.
아니, 불가능하다 해도 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는 로날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로날드 경은 2시간마다 근방을 정찰해라. 기병대 전부를 투입해도 좋으니, 내일 새벽까지만 위치를 들키지 않게 해 다오.”
“알겠습니다!”
“헬레나! 진영 건설이 끝나면 병사들을 배불리 먹여라. 그리고 원래 몸 상태를 회복할 수 있도록 충분한 쉬게 해.”
“맡겨만 주세요.”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전장을 확보한 나는 묵직한 검집을 꾹 움켜쥐었다.
오직 단 한 번의 회전(戰)이다.
앞으로 동부 왕국은 물론이고 암흑기였던 인간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꿀 대전쟁이 불과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토독, 톡.
그리고 하늘은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한 흐름을 느꼈는지, 동부가 품었던 설움과 눈물을 초겨울 비로 화답해 주었다.
세상이 촉촉하게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