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검은머리 기사왕 95화
“도대체 왜 꾸물거린답니까?”
요즘 도통 잠을 못 자 얼굴이 반쪽이 된 간신 하나가 다급히 묻는다.
그러나 물음을 받는 상대 간신 또한 얼굴이 초췌하기에는 마찬가지였다.
“······나도 모르겠네.”
최후 발악이라 생각했던 소돔 공방전은 레드스킨 용병단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당연히 축배를 들기 직전이었던 간신들은 경악했고 레드스킨 용병단과 산하조직을 향해 추가적인 토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놈들은 보름이 지나도록 공세를 펼치지 않았고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과 도시만을 지키며 아예 눌러앉고 말았다.
아니 눌러앉고만 있으면 다행이다.
야만 그 자체인 오크들이 벌이는 패악질로 인해 수도 직할지 이곳저곳에서 격한 불만과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나마 우호적인 유력 호족들과 거대 상단들조차 자신들에게 고개를 돌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간신들 모두가 공통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덜컹!
그 순간 복도에서 들려오는 한 차례 웅성거림과 함께 고급스러운 접객실 문이 열렸다.
감히 경비들로는 막을 수 없었던 그레고즈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재, 재상님!”
“호들갑 떨지 말고 앉게.”
은퇴 이후 웬만하면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레고즈 전(前) 재상이다.
하지만 이번 사안만큼은 그조차 심각성을 느꼈는지 오랜만에 왕궁을 찾았다.
쯧.
그레고즈는 궁상맞게 앉아있는 간신들을 향해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며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를 알려주었다.
“레드스킨 놈들에게 소돔을 점령하면 돈을 두 배로 주겠다고 전하게.”
“두 배나 말입니까?”
“몸 사리기 바쁜 놈들이야. 그 정도가 아니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지.”
용병 놈들의 습성이란 게 원래 그렇다.
이기는 전쟁에선 한없이 용감해지고 조금이라도 손실이 생길 것 같은 전쟁에선 피해를 줄이기 위해 몸을 사린다.
하지만 문제는 그레고즈와 간신 놈들이 의지할 군대가 놈들뿐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돈을 주면 더 주었지, 봉기가 성공하는 꼴은 절대로 볼 수 없었다.
그레고즈는 근 몇 년은 더 늙은 것 같은 얼굴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한배를 타게 된 멍청이들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해주었다.
“여차하면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고 할 놈들이지. 항상 경계하고 목줄을 조여라.”
“명심하겠습니다.”
오크란 종족은 타고나기를 남의 것을 탐내는 탐욕과 욕망으로 똘똘 뭉친 놈들이다.
동부에 눌러앉은 의도를 엿보았던 그레고즈는 작은 침음성과 함께 물었다.
“폐하께선?”
“여전히 완고하십니다. 아마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걸 눈치채신 듯합니다.”
지난날 사라졌던 동부 왕자 리처드가 도시 소돔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동부 왕실이 아닌 민중의 편에서 새로운 왕국을 세우겠다 선언했다.
명백한 반역이고 찬탈이다.
하지만 동시에 민심이라는 절대적 지지를 얻은 위협적인 불길이기도 했다.
만약 이 소식을 허수아비 왕 빌헬름 2세가 듣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아마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해 그동안 거짓말을 해온 자신들을 들쑤실 것이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도록 둘 수는 없다.
허수아비는 참새를 쫓는 허수아비여야 할 뿐, 한참을 생각하던 그레고즈는 결국 그동안 행해왔던 악행의 종지부를 찍고자 했다.
“궁내부에 전달해라. 음식에 들어가는 골든 테일 함량을 더 늘리라고 말이야.”
아귀 광산 깊고 싶은 심연에서 자라, 복용하는 자의 정신을 흐리고 심장을 쇠약하게 만든다는 희소 독초 골든 테일.
현명하고 강직했던 동부 왕 빌헬름 2세가 저리 변하게 된 것은 전부 소량의 골든 테일을 장기간 복용해서였다.
사람 탈을 쓰고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동부 왕국을 이 꼴로 만든 흑막은 바로 왕이 가장 믿었던 전 재상 그레고즈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소인배 중 절정으로 치닫는 악행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천벌을 받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간신들은 간신히 고개를 숙였다.
왠지 내려다본 바닥은 그동안 희생당한 망자들이 손을 뻗는 것만 같았다.
* * *
크르륵.
푸우우.
날숨을 뱉을 때마다 내뿜는 시가 연기 탓에 넓은 저택이 뿌연 너구리 굴이다.
하지만 길게 늘어선 용병 대장 중 불만을 표하는 이는 단 한 놈도 없었다.
왜냐하면, 거만한 표정으로 상석에 앉은 저 오크가 바로 레드스킨 용병단을 이끄는 위대한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통칭 ‘오우거’
다른 오크보다 2~3배는 큰 몸집을 지닌 놈은 전설로만 내려오는 끔찍한 괴물 오우거의 이름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리고 그 이름값만큼이나 막강한 전투능력은 혼란스러웠던 아귀 광산을 무력으로 통합할 만큼 압도적이었는데,
오죽하면 남을 잘 따르지 않는 오크 용병들이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며 마치 광신도처럼 곁을 지키고 있었다.
힘은 곧 진리, 진리는 곧 종교.
돈과 힘을 숭배하는 놈들은 본토 오크와는 확연하게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특이한 레드스킨 용병단을 이끄는 수장 오우거는 오늘 아침 본진으로 배달된 궤짝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정확히 두 배라.”
뚜껑이 열린 궤짝 안에는 절대적 현물 가치를 지닌 순금 골드바와 셀 수 없이 많은 은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물론 선수금이기에 아직 10분의 1밖에 되지 않은 양이었지만, 그것만 해도 커다란 영지 수입과 맞먹는 정도였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기에 이런 큰돈을 척척 내놓는 것인가.
보통 용병 놈들이라면 조금이라 더 빨아먹기 위해 혀를 헉헉 내밀 것이다.
하지만 의뢰 초기부터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던 오우거는 오늘 넘겨받은 선수금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보통 전쟁 용병을 고용한다는 것은 상비군 피해를 줄이기 위한 부가적인 수단이지 절대 주력으로 쓰기 위함이 아니다.
오직 돈만을 쫓는 이들이기에 자칫하면 도망칠 수도 있고 최악으로는 고용주를 향해 칼끝을 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왕실 놈들은 당장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사람들처럼 자신들이 태만을 부리는 족족 금액을 높여 부르고 있었다.
“우리 말고는 대안이 없나 보군.”
이것이 의도하는 바는 뻔했다.
현재 동부 왕국은 민중 봉기를 진압할 힘은 물론이고 계약 내용을 지키지 않은 용병들을 제지할 여력조차 남지 않았다.
동부 왕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르지 말라는 교훈은 알고 있지만, 그 거위가 왕국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마음속 야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오우거는 감히 품어서는 안 될 생각을 내뱉었다.
크르륵!
“언제까지 개처럼 인간 놈들 꽁무니만 따라다녀야 하지? 도대체 언제까지 본토 눈치만 보며 고개를 수그려야 하냐 말이야.”
겨우 같은 오크라는 이유로 사사건건 간섭하려고 드는 2황자와 언제나 레드스킨 용병단을 무시해온 빌어먹을 1황자 놈.
도대체 황제의 핏줄이라는 게 무엇이길래 태어날 때부터 칭송을 받고 위대한 왕좌와 수많은 군대를 내정 받는 것인가.
그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해 온 수장 오우거는 자리에서 일어나 금과 은화가 쌓여있는 궤짝을 힘껏 걷어찼다.
쾅! 촤르르!
“고용자가 대금을 미납했다. 우리는 잔금을 받을 권리가 있는 용병들이지. 안 그런가?”
오로지 압도적인 힘만이 명분이 될 수 있는 세상, 광산 출신인 자신이라고 위대한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동안 받은 의뢰비와 동부를 약탈한 물자들로 그 어느 때보다 강대한 세력을 일구게 된 레드스킨 용병단과 조직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충만해진 수장 오우거는 흥분으로 물든 수하들을 향해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지위를 내걸었다.
“명예를 원한다면 지위를 주겠다. 부를 원한다면 산처럼 쌓아주마. 노예? 땅? 원하는 게 있다면 모든 지 얻을 수 있다!”
명예와 지위, 부와 땅
평생을 척박한 동부를 떠돌며 살아온 오크 용병들에게는 너무나 달콤한 말들이었다.
“대신 너희들 손으로 쟁취해라! 레드스킨이 살기 위해 그래왔듯! 놈들에게 받을 나머지 잔금은 이 동부 그 자체다!”
빼앗은 다음은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눈앞에 보이는 선악과를 따기 위해 감히 더러운 손을 뻗어본다.
쿵! 쿵! 쿵! 쿵!
오우거! 오우거! 오우거!
흥분한 용병들! 연호하는 이름!
오우거는 그 흥분을 만끽하며 막장으로 치닫는 정국에 기꺼이 흐름을 보태었다.
다음 날, 동부 전역으로 흩어졌던 용병단은 동부 수도 두피디아와 멀지 않은 대도시 쿠트나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놈들이 메뚜기 떼처럼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수많은 죽음과 함께 타고 남은 회색 재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 * *
후웅, 후웅, 짜악!
깡!
슬링을 마치 제 손처럼 자유롭게 돌린 한 동부인이 여유롭게 한쪽 줄을 놓았다.
그러자 동글게 깎아낸 돌 탄환이 표적으로 세워둔 강철 투구에 그대로 명중했다.
“찌그러졌군.”
“머리가 터졌겠는데요······?”
슬링어 부대 재편이 끝났다.
그동안 위력을 의심하던 이들은 재편된 총 2개 부대로 꾸려진 숙련병들의 시연을 보자마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100m 거리에서 강철 투구를 맞췄다.
심지어 탄환이 맞은 부위는 움푹 들어간 것으로 보아 분명 골이 깨졌을 것이다.
겨우 작은 돌멩이 하나로 어떻게 이런 위력을 낼 수가 있는 것인가?
일행들은 쑥스럽게 웃으며 다가오는 숙련병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훌륭한 시연이었다.”
“헤헤, 부끄럽습니다. 저희 고향만 해도 눈감고 맞추시는 어르신들 천지인걸요.”
“개량한 슬링은 어떻지?”
“손에 착착 감깁니다. 사거리도 늘어난 것 같고 위력도 정말 강해요.”
애들 장난도 크게 만들면 어른 장난이다.
더 길고 두껍게 만들어 개량한 슬링은 사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렸고 위력 또한 적중만 하면 무조건 반병신이 될 정도로 강했다.
100~200m 표적을 맞히는 숙련자들만 추리고 추려 뽑은 슬링어 부대인데,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적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순간 이 남자가 말하는 ‘어르신’은 도대체 어떤 분들인지 궁금해졌다.
여유가 생길 때 소돔으로 초청해 한번 흔한 훈수라도 부탁을 드릴 생각이다.
“흐흐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생했다.”
쑥스러워하던 숙련병은 내가 건넨 보상에 희희낙락 웃으며 병영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한참 찌그러진 투구를 살피던 일행들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경.”
“매번 저희를 놀라게 하시네요.”
타 종족이 문명을 이룬 대륙 환경과 풍조가 특이했을 뿐이지, 개량 슬링을 생각해내지 못한 이들이 멍청한 건 아니었다.
결론적으로는 일행들은 작은 의문만 느꼈을 뿐 반발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레드스킨 놈들은?”
“여전합니다.”
“이유를 모르겠군.”
소돔 공방전이 동부군의 승리로 끝난 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놈들은 추가적인 공세는커녕 전선만을 지키며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역시 근본이 돈을 받고 일하는 용병이라 그런지 적극적이지 않은 것인가?
하루가 아까운 동부군이야 병사를 훈련할 시간을 주어 고마웠지만, 단기 결전을 노렸던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상황이었다.
“일단 지켜보도록 하고 작은 움직임이라도 있으면 즉각 즉각 내게 알려다오.”
“명심하겠습니다, 경.”
때아닌 평화가 잠시 찾아왔다.
길게 기지개를 켠 나는 얼굴이 많이 밝아진 헬레나와 리처드를 향해 말했다.
“한가해 보이는군. 그 실력에 웃음이 나오나? 둘 다 연무장으로 따라와.”
별다른 일정이 없는 오늘은 리처드와 헬레나에게 검술이라도 알려주어야겠다.
나는 표정이 시무룩해지는 둘을 향해 기분 좋게 웃으며 소돔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운명은 늘 그렇듯 단 한 번도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모두가 평화로운 휴일을 만끽하던 오늘 오후 전방에서 소식이 하나 도착했다.
‘레드스킨 용병단 후방 집결.’
‘대도시 쿠트나 침공.’
모든 훈련 일정이 취소되고 잠시 가족들 품으로 돌아갔던 동부군이 소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