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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94화 (94/181)

94화

검은머리 기사왕 94화

진압을 마무리하기 위해 나섰던 레드스킨 2번 대대가 도시 소돔에서 전멸했다.

전투능력을 상실해 후퇴한 것이 아닌 생존자가 정확히 ‘0’인 완벽한 괴멸이었다.

졸지에 머리를 잃은 용병단 산하조직은 뿔뿔이 흩어졌고 장차 수일 동안 포위당했었던 소돔은 드디어 해방될 수 있었다.

동부인이 처음 맛본 달콤한 승리였다.

하지만 기적 같은 승전이 가져다준 여파는 단순한 기쁨으로 끝나지 않았다.

‘동부를 이끌 구원자가 나타났다.’

승전 이후,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동부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리처드와 함께 동부로 돌아온 우리의 존재가 드디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굳이 다 밝힐 필요도 없었다.

퍼져나간 소문은 과장되고 축소되어 또 다른 방향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동부는 희망을 원하고 있었고 실체를 알 수 없는 무형의 미래 앞에 모든 것을 걸게 만들었다.

‘자유와 해방을 위해 소돔으로.’

흩어졌던 동부인이 다시 모여들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도시에 합류를 원했고 낙오되었던 다른 단원들 또한 소돔으로 다시 복귀했다.

물론 갑작스러운 팽창으로 수뇌부는 혼란스러워했지만, 소돔에는 이런 상황에 잔뼈가 굵은 고문단이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헬레나와 단원들에게 대처 양식을 만들어주며 뚜렷한 지침을 정해주었다.

그러자 혼란스러웠던 도시 소돔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혼란을 수습하고 찾아온 과제는 섣부른 진출이 아닌 내부 정리였다.

전쟁에서 이긴 이번이 말을 꺼낼 기회라고 생각한 나는 오랜만에 수뇌부를 호출했다.

타닥, 탁.

모든 행정 업무가 끝난 늦은 밤, 허름한 건물 안 탁자 위에는 싸구려 기름 초가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싸구려 기름 초를 중심으로 앉은 일행들과 동부 까마귀들은 조용한 분위기와 어울리는 눈인사를 나눴다.

다들 왜 모였는지 아는 눈치다.

고요한 침묵이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나는 잴 것 없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늦은 밤 불러내서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이렇게 수뇌부를 전부 불렀다.”

“경청하겠습니다. 편히 말씀하세요.”

“폐하께선 리처드가 동부의 왕이 되길 원하신다. 그것이 북방이 고문단을 파견한 이유고 앞으로 맺을 강철 동맹의 조건이다.”

나와 검은 화살이 동부로 온 이유는 헬레나와 까마귀를 돕기 위해서가 아닌 리처드를 새로운 동부의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으며 나와 검은 화살이 전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수행해야 할 임무였다.

“······역시 그랬군요.”

그러자 헬레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섭섭한 감정과 함께 쓰게 웃었다.

그녀로선 동지들과 함께 세운 사상이 인정받지 못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순간 허탈함을 느끼고 만 것이다.

“후.”

하지만 아쉬운 감정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미 그날 밤 리처드의 진심을 보았던 그녀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이번 생에는 다 갚지 못할 커다란 은혜를 입었어요. 허락만 해주신다면 왕이 가실 길, 저희도 함께하고 싶어요.”

왕자 리처드가 아닌 인간 리처드를 믿는다.

헬레나와 단원들은 한때 자신들이 품었던 신념과 가치관을 오직 민중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귀결할 생각이었다.

리처드는 그 큰 뜻을 읽었다.

그리고 그에 보답하고자 변하지 않을 모습을 약속하며 공손한 예를 표했다.

역시 한차례 목숨을 건 전쟁을 겪어서 그런지 과정이 참으로 담백했다.

동부 까마귀들의 의사를 재확인한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확고하게 못을 박았다.

“리처드는 동부의 유일한 적통자다. 앞으로 펼칠 해방 전쟁은 왕위 찬탈이 아니며 틀어졌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혁명이다.”

“민병과 시민 봉기라는 명칭은 전부 버린다. 소돔에 모인 이들은 모두가 왕의 군대고 동부를 지키는 유일한 정규군이다.”

부정 부패한 현 왕실과 신하들을 부정하고 민중이 원하는 새로운 왕을 세운다.

내일 아침이면 이 선언을 그대로 옮긴 포고문이 소돔 광장에 걸릴 것이다.

‘이런 운명을 정한 건 하늘인가?’

노스플롬을 떠나기 전, 눈투성이가 병사들에게 당당히 외쳤던 운명의 거스름 역천.

그 당시 병사들이 느꼈던 잔잔한 떨림을 리처드와 동부 까마귀들에게서 보였다.

계절은 겨울인데 동부는 봄이다.

이제 막 푸릇한 싹을 틔운 젊은이들 앞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올바른 것은 변하지 않는다.

불의를 바로 잡고자 나선 용기는 허름한 건물 안, 허름한 탁자에서 시작되었다.

* * *

흐으흠, 흠흠.

화려한 집무실 의자에 앉은 기사왕 눈투성이는 오늘 새벽에 왕실로 도착한 전서구를 개봉하며 작은 콧노래를 불렀다.

왕께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최종재가를 위해 집무실을 찾아온 기억하는 새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폐하, 무척이나 기뻐 보이십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앗, 재상님 오셨어요? 헤헤, 스승님이 첫 번째 전쟁에서 이기셨나 봐요. 동부 소돔에서 전서구가 도착했어요.”

부러지는 검은 완성된 지휘관이다.

단순히 오러가 없다는 이유로 상당한 저평가를 받았지만, 그가 가진 진면목은 불리한 상황을 뒤집는 뛰어난 지휘력이다.

항상 전쟁 결과를 통계로 확인하는 기억하는 새는 가끔 그가 새롭게 선보인 전략 전술 앞에 충격을 느낄 때가 많았다.

상승 불패, 북방 명장.

언제나 곁에 함께 있어 체감하지 못한 그의 능력은 아무런 연고지가 없는 동부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사각사각, 톡!

한참 편지를 자랑하던 눈투성이는 투박하게 찍힌 실링 왁스를 떼어냈다.

그리고 손글씨가 빼곡하게 쓰인 편지 내용을 집중해서 읽기 시작한다.

그간 있었던 일을 전부 써놓았는지, 소식을 전하는 전서구치고는 상당한 편지량.

하지만 눈투성이는 한 문단씩 집중해서 읽으며 귀여운 눈동자를 반짝였다.

통쾌하게 이긴 부분에선 기뻐했다, 민중들이 결의한 부분에선 감동했다.

겨우 글 하나로 희로애락을 전부 느낀 눈투성이는 킁킁 편지지 냄새를 맡았다.

“이상한 냄새라도 나세요?”

“아니요, 스승님이 냄새를 꼭 맡아보라고 하셨거든요. 동부에서 나는 향신료 냄새라는데······. 박하 향이라고 하셨어요.”

동부에서 온 소식을 보고 듣고 느낀다.

계속되는 업무와 제한된 생활에 힘들어하던 눈투성이는 마치 자신이 여정을 떠난 것처럼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부는 과연 어떤 곳일까.

가끔은 북방을 유랑했던 시절이 그리운 눈투성이는 편지지를 소중히 접었다.

“저희는 언제 개입하면 될까요?”

“경은 아마 계획된 결전을 준비 중이실 거예요. 세력을 확장하고 동부군이 최후 회전에서 승리했을 때가 적기입니다.”

대륙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검성은 단기 결전으로 전쟁을 끝내려 할 것이다.

고문단만을 파견했던 북방은 이제 바뀐 정세에 맞춰 더 과감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시기가 중요하겠군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폐하.”

친 북방 인물인 리처드가 새로운 왕이 된다면 한참 내전을 진행 중인 2황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을 제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북방 왕국뿐이다.

군은 동맹이 성사되는 시기에 잘 맞춰 반 발자국 빨리 움직여야 했다.

“무사히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그저 스승이 다치지 않고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

킁킁, 다시 한번 박하 향을 맡은 눈투성이는 짧은 기도와 함께 다시 깃펜을 들었다.

* * *

“최종적으로 선별한 인원입니다.”

“내가 말한 기준으로 추린 것 맞나?”

“정확히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내 지시를 받은 로날드는 동부군을 재편하기 전 기준을 두고 인원을 선별했다.

하지만 분명 추려서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숫자가 너무나도 많았다.

1차로 뽑은 인원만 해도 백색 관문에 상주한 북방군과 숫자가 비슷하지 않은가.

오합지졸 민병일 때는 몰랐는데 단순 머릿수는 정말 엄청나게 많았다.

어제 파이크 방진을 마주한 놈들이 속수무책 당한 진짜 이유가 이것이었나.

지휘관이 되고 처음으로 ‘수적 우위’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 나는 당황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 파이크 생산량은 충분하니 전부 무장시킬 수 있습니다.”

“······일단 알겠다. 물자만 감당할 수 있다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초기 아무것도 없었던 북방 때처럼 아예 맨땅에서 시작할 각오로 온 고문단이다.

하지만 동부가 지니고 있던 잠재력은 척박했던 북방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로날드 녀석 어딘가 뿌듯해 보인다.

괜히 지역에서 진 기분을 느낀 나는 괜한 헛기침과 함께 성벽 위를 걸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경.”

“음?”

“원거리 병종이 너무 취약합니다. 궁수를 양성하고 싶어도 워낙 경험이 부족한지라 선뜩 나서는 이들이 없습니다.”

그나마 위에서 아래로 쏠 수 있는 성벽이 있어서 화살이라는 것을 쏘았지, 소돔에 제대로 된 전문 궁수는 없다.

높은 숙련도를 요구하는 활 특성상 하루 이틀 시위를 당긴다고 표적을 전부 맞힐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쇠뇌를 만들 기술력은 있을 텐데.”

“체구에 맞춰 생산하다 보니 장력이 형편없습니다. 장전 속도도 무척 느리고요.”

동부인 체구에 맞춰 제작한 쇠뇌는 기본적으로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었다.

크기가 작으니 장력이 떨어질 것이고 장력이 떨어지니 사정거리가 줄어든다.

결국, 대안은 복합적인 기계 장치를 단 십자 궁뿐인데 여건이 마땅치 않다.

한참 앞서가던 걸음을 멈춘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전장에서 중요하지 않은 병종은 없다.

아무리 갓 재편을 시작한 동부군이라고 할지라도 구색은 갖춰야 한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활과 쇠뇌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는 좋은 무기가.

나는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의 단편에서 재빨리 한 가지를 끄집어냈다.

“슬링.”

“예?”

내가 이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슬링(Sling)! 끈과 가죽만 있으면 간단하게 만들 수 있고 휴대성도 탁월하다.

거기다 지천으로 깔린 게 돌이니 화살과 아교를 보급해 줄 필요도 없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대륙에서 슬링이 차지하는 위치는 딱 로날드가 내뱉은 의문 정도라는 것이다.

“······그거 애들 장난감 아닙니까?”

신체조건의 제약을 잘 타지 않는다는 특징 덕분에 작은 설치류를 잡으려는 아이들이 많이 들고 다니던 게 슬링이다.

그런 인식 때문인지 대륙에선 슬링, 즉 투석이라는 행위를 굉장히 약하고 얕잡게 보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었다.

“경은 어릴 때 좀 해봤나?”

“많이 가지고 놀았습니다.”

기사인 로날드가 다뤄봤을 정도다.

잘 수소문 해 보면 동네에서 슬링으로 이름 꽤 날렸을 민병들이 많을 것이다.

금방 생산이 가능하고 숙련까지 되어있다?

빠르게 고민을 끝낸 나는 추억으로 젖어있는 로날드를 향해 지시했다.

“대장장이들에게 남는 가죽끈과 천으로 슬링을 제작하라고 전해라. 길이는 일반 슬링보다 길게 허리까지면 충분하다.”

“예, 예?”

“그리고 경은 병영으로 돌아가는 즉시 투석에 능한 이들을 따로 뽑아라. 이유를 물어보면 그냥 내가 시켰다고 해.”

다들 로날드처럼 반신반의할 것이다.

하지만 파이크 병으로 재미를 톡톡히 보았던 만큼 동부인들은 섣부른 의문보다는 그 성능을 궁금해할 것이다.

원래 맞기 전에는 모른다.

숙련된 슬링어 무리가 일제 사격한 돌 탄환이 얼마나 아픈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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