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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93화 (93/181)

93화

검은머리 기사왕 93화

“끄아아아악!”

“내, 눈! 내 눈!”

아무리 조잡해도 화살은 화살이다.

민병들이 아무렇게나 쏜 화살은 중력이라는 축복을 받아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열심히 방패를 들어도 눈먼 화살에 맞는 오크가 속출했고 성벽 아래 진창에는 어느덧 피를 흘린 시체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민병들이 마지막 용기를 쥐어짤수록 오크 놈들은 독기를 품었다.

오직 적을 향한 증오와 분노만이 전쟁이라는 모순을 견디게 해주는 마약이었다.

“방패 머리 위로 들어!”

“크하하, 더 쏴봐 새끼들아!”

전장이 걷잡을 수 없는 광기로 물든다.

이번이 마지막 공세임을 알고 있는 오크 용병들은 전쟁 고함을 내지르며 가지고 온 공성 사다리를 성벽 위에 걸친다.

당연히 민병들은 그 사다리를 떨어트리기 위해 도끼를 휘둘렀고 양측이 화력을 집중하는 상황이 연쇄적으로 벌어진다.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서로의 운명을 건 양측 종족은 성벽을 가운데 둔 채 맹렬히 격돌했다.

“이, 이이이익!

“테일러! 테일러 안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기 시작한 쪽은 역시나 전투 경험과 전체적인 사기가 부족한 성벽 위 민병들이었다.

아무리 마지막 용기를 쥐어짰다고 한들 인간을 밥 먹듯이 죽여온 숙련된 오크 맨앳암즈들을 이길 수는 없었던 거다.

곳곳에서 사상자들이 속출했다.

성벽으로 지원 온 주민들에게 이끌려간 청년은 고통을 잡다 못해 혼절해버린다.

“젠장!”

공세가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재편한 예비대를 투입해야 하는가.

그나마 수적 우위로 버티고 있던 소돔은 바람 앞에 놓인 촛불과 같았다.

“이제야 수월하군.”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글라탄과 부장들은 흡족하게 웃었다.

때아닌 변수로 걱정이 많았는데, 첫 진격 성과가 썩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만 잘 되어간다면 지난 과를 덮을 수 있는 충분한 공을 세울 수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글라탄은 확실한 승리에 목마른 부장들을 향해 명했다.

“성문이 열리는 즉시 공격 중인 병력을 후퇴시키고 본대가 직접 진격한다. 부장들은 병력을 이끌고 내 뒤를 따라오도록.”

“탁월한 제안이오, 지휘관!”

현재 공성을 진행 중인 부대는 레드스킨 용병단 아래 속한 산하조직이다.

하도급이나 다름없는 녀석들로 열심히 전력을 갉아먹었으니 이제는 레드스킨 본대가 차려진 사냥감을 낚아챌 순간이었다.

직접 나서겠다는 말에 기꺼이 동조하며 무기를 챙겨 드는 용병단 부장들.

그동안 전력 보존에 몰두하던 본대는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 - - - - -!!”

그러자 한참 전투를 벌이던 성벽 위 민병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들릴 리가 없는, 아니 들려서는 안 되는 외침이 전장 한가운데를 강타한다.

“성, 성문이 열린다!”

쿵! 철컥!

끼기긱, 끽!

성벽 뒤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동시에 작은 틈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변절자 놈이 끝내 약속을 지켰구나!

회심의 미소를 지은 글라탄은 거대한 함성과 함께 성문으로 진격했다.

“레드스킨! 돌격하라!!”

“Uraaaa - - - - - !!!”

성문이 열린 순간 승리는 뻔한 결과다.

그 어느 때보다 용감해진 레드스킨 본대는 붉은색 깃발을 휘날리며 돌격했다.

쿵쿵쿵쿵쿵!

그 누가 이 진격을 막을쏘냐.

살벌한 레드스킨 돌격 앞에 같은 편인 오크 용병들조차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끼익, 덜컹!

육중한 성문이 완전히 열렸다.

기세등등 선두를 달리던 글라탄과 부장들은 커다란 고함과 함께 함락을 명령했다.

“모조리 죽여버려!”

처음부터 약속 따위는 지킬 생각이 없었다.

도시로 들어선 놈들은 첫 번째 희생자를 찾아 붉게 물든 눈동자를 두리번거렸다.

타닥, 탁.

“- - - - - - -?”

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겁에 질린 민병도 주민들도 아닌 인위적으로 연기를 내기 위해 피어놓은 모닥불뿐이었다.

동부에서 나는 향신료를 넣기라도 했는지 코를 찌르는 독특한 향기.

사방은 마치 안개라도 낀 듯 모닥불이 내뿜은 연기로 자욱해져 있었다.

부우우우우웅 - - - -!

어디선가 나팔 소리가 울린다.

마치 어두운 먹처럼 낮게 깔린 그 나팔 소리는 그동안 참았던 동부의 치욕과 절망을 대변하듯 웅장하게 울렸다.

척! 척! 척! 척!

그리고 오크 놈들은 보았다.

연기가 자욱한 길 끝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창으로 만든 고슴도치를 말이다.

꿀꺽.

한 부대가 아니다. 둘? 셋? 아니 너무나 많아 전부 가늠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길과 공터를 가득 채운 고슴도치들은 느린 속도로 자신들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촤르르르륵 - - - - !

쿵!

그 순간 지지대를 지탱하는 쇠사슬이 잘리며 성문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무언가 대처를 생각하기도 전 유일한 퇴로인 뒤쪽이 차단되고 만 것이다.

함정이다, 함정이 분명하다.

설마 소돔을 미끼로 자신들을 끌어들일 줄 몰랐던 글라탄은 몰려오는 동요를 감추기 위해 크게 소리 질렀다.

“대열을 유지해라! 뭉쳐봤자 민병들이다!”

다행히 레드스킨 본대 주력들이 전부 들어오고 나서 도시 성문이 닫혔다.

놈들이 아무리 함정을 파놓았다고 한들 결국 성벽이 없는 인간일 뿐이다.

“멍청한 놈들! 방패 들어!”

“돌격 준비!”

그러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부장들 또한 당황한 레드스킨 용병들을 독려했다.

글라탄 말대로 우리가 무사히 도시 내부로 들어온 것은 변하지 않은 사실이다.

“돌격하라!!”

“Uraaaa - - - - - !!!”

전열을 정비한 본대가 연기를 뚫고 가장 가까운 파이크 방진을 향해 돌격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인간 놈들의 머리통을 할버드로 찍으려고 했다.

“크륵?”

하지만 신체가 가늠한 유효 거리가 채 닿기도 전 날카로운 날붙이가 보였다.

짙은 연기 속에 숨어 흐릿했던 파이크가 어느새 눈까지 다가온 것이다.

어어?

피해야 한다. 막아야 한다.

머리는 알고 있지만, 뒤에서 밀쳐지는 힘에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푹!

그렇게 용감히 선두로 달려가던 오크 용병은 날카로운 파이크에 온몸이 꿰뚫렸다.

놈은 의식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 알지 못했다.

* * *

“히, 히익!”

“밀어! 밀라고!”

파이크 진형은 예상대로 엉망이었다.

오크를 향한 공포가 짙게 깔린 민병들은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엉성한 파이크 진형은 밀리기는커녕 소돔 내부로 들어온 오크 놈들을 꾸역꾸역 밀어내고 있었다.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다.

밀어내는 것이다.

인간과 오크는 마치 섞이지 못하는 물과 기름처럼 완전히 양립하고 있었다.

물론 그 우위는 숫자가 몇 배는 더 많은 동부 인간들이 가져가고 있었다.

도대체 성벽을 끼고도 지던 민병이 이렇게 돌변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동안 반신반의하고 있던 헬레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어요. 겨우 3일이었잖아요. 도대체 뭐가 바뀐 거죠?”

생각해보면 참 간단하다.

파이크의 긴 사정거리가 전술적 우위를 가져갔고 낮은 사기를 극복하게 했다.

그리고 높은 숙련도가 필요하지 않은 원형진으로 파이크 밀집을 극대화했다.

나는 그저 원래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잠재력을 꺼내고 조합해 체구가 작은 동부 인간에게 어울리는 전술을 찾았을 뿐이다.

뭐. 그래도 무엇이 바뀌었는지 두 귀로 직접 듣고 싶다면야, 내 안장 뒤에 올라탄 검은 화살이 대신 대답해줄 것이다.

“지휘관이 바뀌었잖아.”

“그, 그렇죠! 지휘관이·········.”

의문을 해결한 헬레나는 기뻐했다.

하지만 이내 이전 지휘관이 누구인지를 기억했는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깔깔 웃음을 터트리는 검은 화살과 조용히 헬레나를 위로하는 리처드.

출격 전 마지막 농담을 나눈 우리는 슬슬 기병이 나설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와아아아- - - -!!

물러나지 마! 끝까지 버텨!

시간이 지날수록 파이크 간격과 원형진 간격이 점점 촘촘해지기 시작했다.

아마 놈들을 성벽 바로 앞까지 몰아낸 상황이 사기 진작에 도움을 준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숙련도가 낮아 전투를 승리를 이끌 결정적인 한 수가 부족했다.

그것이 내가 헬레나와 단원들에게 기마 돌격 훈련을 받게 했던 이유였다.

민병들이 공격을 막는 방패가 되었다면 우리는 적을 찌르는 창이 될 것이다.

한동안 기병들과 함께 도시 외곽을 맴돌던 나는 투구 가리개를 내리며 외쳤다.

“가속!”

선회한 기병대가 서서히 속도를 올린다.

동시에 좁은 길을 빠져나오자 미리 연습했던 쐐기 진이 자연스레 펼쳐졌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기병대는 소돔 시가지를 달렸다.

그러자 집 안에 숨어있던 주민들이 작은 창문 틈으로 주황색 천을 내밀었다.

마치 하늘 아래 걸친 황혼처럼 소돔 시가지에 걸린 수많은 주황색 천들.

우리는 좁은 투구 틈 사이로 숨이 막혀오는 장관을 시야 한가득 담았다.

푸르륵!

두두두두두두두 - - - - -!!

발굽 간격이 서서히 통일된다.

오직 기수 말머리에 모든 것을 집중한 기병들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가속 그리고 또 가속!

오직 돌격 한번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우리는 끝내 숨을 참았다.

저 멀리 표적이 보인다.

삐이이이익!

기마 돌격을 발견한 단원 한 명이 급히 호각을 불어 퇴각 신호를 알렸다.

그러자 방진을 이루던 민병들이 황급히 옆으로 몸을 던져 길을 터주었다.

옆으로 피해!

으아아! 다 죽여버려!

계획했던 모든 과정이 전부 들어맞았다.

환호성을 지르는 민병들을 지나친 나는 우렁찬 목소리로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거창- - - - -!!”

응축한 힘을 창끝에 모아라.

이를 악문 기병대는 앞을 가로막는 맹렬한 바람을 거스르기 위해 창을 들었다.

스스스슥.

창끝이 대기를 가른다.

몸을 짓누르던 바람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정신은 오직 점 하나에 모인다.

“어, 어어?”

촘촘한 파이크 방진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레드스킨 용병대 놈들.

한순간 탁 트인 시야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측면이 기마 돌격으로 꿰뚫렸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콰아앙- - - -!

콰직!

기병 창이 두 놈을 관통한다.

뒤이어 달려든 흰 뿔 사슴이 거대한 뿔로 들이박자 오크 놈이 육편으로 변했다.

쿵! 콰앙!

무려 최고 가속으로 들이박은 돌격이다.

내 뒤를 따라온 쐐기진은 마치 폭탄이 터지듯 연쇄적으로 진영을 붕괴시켰고 놈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끄아아악!

후, 후퇴해라! 후퇴해!

뒤는 성벽이 막고 있다.

앞은 파이크 방진이 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유일한 살길이었던 측면조차 기병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커억!

콰직! 쾅!

용병단이 자랑하던 육중한 강철 갑옷은 도리어 발목을 붙잡는 독이 되었다.

피와 내장으로 인해 생긴 진창 위에선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항복! 항복한다!

살, 살려줘!

도망치기 위해 성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고 맨손으로 긁기 시작한 오크 놈들.

하지만 우리는 한 치 자비 없이 창과 검을 휘둘러 고립된 녀석들을 죽여갔다.

시체가 쌓여간다, 핏물이 강을 이룬다.

그동안 무기력하게 당해오기만 하던 민병들은 직접 칼을 들고 달려와 숨이 아직 붙어있는 놈들의 멱을 찔렀다.

그러자 남은 것은 흙 대신 너부러진 살점들과 성문 앞 처절한 손톱자국뿐이었다.

나는 촉 끝이 부러진 기병 창을 내려놓으며 투구 가리개를 열었다.

모두가 얼이 빠져있었다.

그저 창을 밀고 나아갔는데, 온몸은 어느새 피투성이였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 전쟁을 했구나.

평생을 수탈과 착취에 시달렸던 동부인들은 두 손 가득 피를 묻혀보고 나서야 전의란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때 잊고 있었던, 또 끝까지 참고 있었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마치 태동과도 같은 함성이 소돔 모든 이들에게 승전 소식을 알렸다.

와아아아아아아 - - - - -!!

민병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웃었다.

주민들은 이제야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참전한 가족들을 급히 찾았다.

이제 반격의 서막이다.

나는 기쁜 함성과 함께 서로를 끌어안은 헬레나와 리처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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