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검은머리 기사왕 92화
공세가 멈춘 지 3일이 더 지났다.
그동안 수많은 지휘관과 숙련병을 저격한 검은 화살 덕분에 용병단은 공성전을 속행할 수 있는 추진력을 잃고 만 거다.
하지만 놈들도 마냥 멍청이들은 아니었는지 점점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대응하기 시작했고 나는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검은 화살을 소돔 내부로 복귀시켰다.
저격 시도가 사라지자 점점 집결하기 시작한 다른 레드스킨 용병대대와 수십 단위로 합류한 소규모 산하조직.
오늘 새벽부터 시작된 진영 변화와 전진 배치는 모든 전력이 동원될 총공세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었다.
이제 동부의 운명을 바꿀 전쟁만이 남았다.
성벽에서 적진을 살피던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훈련 중인 민병들을 바라봤다.
“하나! 둘! 세, 셋?”
“밀, 밀지 마!”
내게 파이크 사용법과 진영 배치를 배워간 까마귀 단원들은 각자가 담당하고 있는 민병들을 꾸려 속성 교육에 들어갔다.
하지만 워낙 낮은 사기와 모자란 시간 탓에 무기 숙련은커녕 엉성한 원형 배치만 겨우 되어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이게 맞기는 한 걸까.
훈련을 시키는 단원도, 엉성하게 창대를 밀어대는 민병들도 구슬땀을 흘리는 훈련 속 짙은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은 모를 것이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진형은 조금은 엉성할지언정 어느덧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이다.
처음부터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맞서 싸울 용기였지 좋은 무기가 아니었다.
나는 이번 전쟁을 시작으로 바뀌게 될 동부 정세를 조용히 낙관해보았다.
“단장님.”
잠시 성 밖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얼굴이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리처드가 성벽 위로 나를 찾아왔다.
흙투성이 왕자님이라.
처음 만났을 때 보았단 그 곱상함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녀석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우라를 만개한 상태였다.
점점 성장해가고 있구나.
뿌듯함을 느낀 리처드를 향해 물었다.
“훈련은?”
“다들 말을 타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제법 잘 따라옵니다. 아마 지금 당장 출격해도 충분히 싸울 수 있을 거예요.”
민병들이 파이크 진형을 훈련받는 사이 헬레나를 포함한 몇몇 상급 단원들은 본격적인 기마 훈련을 받게 되었다.
단순히 말을 타고 걷거나 달리는 승마가 아닌 적진을 향해 맹렬히 돌격할 수 있는 본격적인 기마 훈련을 말이다.
그러자 리처드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특히 헬레나가 발군입니다. 북방 출신이라 그런지 무기 이해도도 높고요.”
“헬레나? 서로 말 놓기로 했나?”
“아, 아. 뭐, 그······.”
불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조심스럽게 존칭으로 부르던 녀석이 이제는 헬레나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른다.
그리고 내 가벼운 물음에 얼굴까지 붉히며 말을 더듬는 것을 보아 기마술을 가르쳐주는 사이 많이 친해진 모양이다.
“훈, 훈련을 같이하다 보니 생각보다 통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마침 나이도 비슷한 것 같아서 말을 놓자 했습니다.”
“그래?”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서로를 적대관계라고 보았던 리처드와 헬레나가 가볍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될 줄을 말이다.
둘 다 젊은 나이여서 그런지 붙는 정도 빠르고 풀리는 오해 또한 가볍다.
굳이 간섭할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어른티가 나는 녀석과 함께 걸었다.
“로날드 경은?”
“어젯밤 합류했습니다.”
시간을 벌어준 검은 화살 덕분에 소돔 밖에서 대기하던 로날드와 피난민 무리를 전부 안으로 데리고 들어올 수 있었다.
한사람이 아쉬운 마당에 기사 전력인 로날드의 합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 폭을 넓혀주는 데 일조해주었다.
이 정도면 모든 준비가 끝나간다.
나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는 리처드를 향해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돌아가는 길에 헬레나를 만나면 부탁 하나만 전해다오. 연기에 능한 단원이 있다면 오늘 밤만 빌려달라고 말이야.”
“연기 말입니까······?”
“그래, 꼭 필요한 곳이 있다.”
평소 온갖 정치 공작이나 은밀함이 필요한 세작 임무에 능한 까마귀 단원이다.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런 그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슬슬 황혼이 지기 시작한다.
나는 일단 알겠노라 대답하는 리처드와 함께 성벽을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당장 내일 펼쳐질 전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동부 끝에 걸친 빛바랜 어스름은 서서히 별 밤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 * *
“어이, 거기! 농땡이 부리지 마!”
“하여튼 신병 새끼들!”
부러지는 검의 예상대로 병력을 집결시킨 용병단은 밤새 공세를 준비 중이었다.
공격 날짜는 당장 해가 뜨는 내일, 목표는 당연히 소돔의 완전 함락이었다.
전쟁이 끝나기만 해봐라, 병사부터 주민까지 모조리 씹어 먹어주마.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오크 놈들은 내일 있을 혈전을 위해 도끼날을 갈았다.
하지만 북적거리는 부대 분위기와는 다르게 본진 지휘관 천막은 감히 침조차 삼킬 수 없는 침묵이 유지되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2시간 전 소돔을 몰래 빠져나온 한 동부 인간 때문이었다.
졸지에 원하지도 않았던 지휘 대리를 맡게 된 용병 대장 글라탄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공성 중 성문을 열겠다?”
“예, 예! 맞습니다······!”
한밤중 도시를 빠져나온 이 동부 인간은 본인을 소돔 토박이라 소개했다.
그리고 제멋대로인 수뇌부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며 성문을 열겠다 자청했다.
“살, 살려만 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됩니다! 주민 대부분이 무고한 이들입니다!”
이런 식의 항복은 왕왕 있었다.
보통 결사 항전을 원하는 지휘관 아래서 이런 배신자들이 나오고는 하니 말이다.
마지막 저항을 일삼던 인간들 사기가 드디어 끝이 났다고 생각한 부장들은 일이 쉽게 풀렸다는 듯 한마디씩 보탰다.
“다행이군, 피해가 막심했는데.”
“우리 측도 마찬가지다.”
보통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정규군이라면 이런 제안을 조심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뼛속까지 용병인 놈들은 단순한 승리보다 최대한 손해를 줄이고 금전적 이득을 보는 ‘최종 승리’를 원했다.
알아서 도시 성문을 열어주겠다는 마당에 거절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도 허튼수작을 부릴 수 있는 여지가 아예 없는 전투 중에 말이다.
그나마 튼튼한 성벽이 있기에 인간 놈들이 버티는 것이지,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승리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으음······.”
미간을 찡그린 글라탄은 한동안 고민했다.
분명 덥석 물어야 하는 달콤한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찌르는 작은 불안감이 선택을 망설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자리에 모인 오크 부장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선택을 재촉했다.
임시 대장직을 맡은 글라탄은 용병단 전체를 휘어잡을 카리스마가 아직 부족했다.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있나?”
“거절한다면 우리끼리라도 하겠다.”
부장들의 아우성이 더해간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글라탄은 제안을 받아들이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어차피 우리가 이긴 전쟁이다, 인간. 만약 거짓이면 그때는 정말 각오해도 좋다.”
“으으······.”
조금 어렵게 할 전쟁을 쉽게 할 뿐이다.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글라탄 앞에 변절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빨리 꺼져라, 마음이 바뀌기 전에.”
“감, 감사합니다!”
약속 기한은 당장 내일이다.
꺼지라는 말에 천막을 뛰쳐나간 변절자는 헐레벌떡 소돔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도시가 가까워질수록 거칠었던 숨은 안정되었고 콧물로 범벅이 되었던 더러운 얼굴 또한 정상으로 돌아갔다.
“쯧.”
변절자의 정체는 까마귀 단원 잭슨.
한때 사기꾼으로 활동했던 경력이 이런 곳에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관객 여러분 속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차례 짧은 연극을 성공적으로 마친 엑스트라 잭슨은 뿌듯한 얼굴과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둥! 둥! 둥! 둥!
조금 늦은 아침이 찾아왔다.
그러자 밤새 공세를 준비했던 오크 용병단은 드디어 북소리와 함께 진군을 시작했다.
척! 척! 척! 척!
우어어어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다.
결집과 합류를 거듭한 레드스킨 용병단은 그 위세를 과시하려는지 커다란 고함과 함께 연신 병장기를 두드렸다.
땡땡땡땡땡땡!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뛰어온 초병들이 도시 내부 감시 탑으로 올라가 비상종을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기를 챙긴 민병들은 서둘러 성벽 위로 올라갔고 비무장 인원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전장 물자를 열심히 옮겼다.
거듭된 훈련이 성과가 있었는지 이전보다 빨리 수성 준비를 끝낸 민병들.
하지만 숫자가 더 늘어난 적군 앞에 사기는 시작부터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사실 이쯤 되면 전의를 끌어 올리기 위한 모든 수단은 의미가 퇴색된다.
지휘관의 일장 연설도 심장을 뛰게 하는 전쟁 북도 전부 시끄러운 소리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 대신 휴식을 취하는 단원들에게 틈틈이 한 노래를 알려주었다.
그 노래는 내가 외우고 있을 만큼 유명했음에도 동부 왕국을 점령한 오크 놈들이 금지했던 황금시대의 민요였다.
‘동부 찬가.’
고단함을 잊을 때 자주 불리던 노래다.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진 그 민요는 어느새 모든 주민이 흥얼거릴 만큼 전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용기를 얻어야 하는 지금, 마른 입술을 핥은 한 어린 민병으로 시작으로 그 노래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사령관님?”
“쉿, 부르게 내버려 둬라.”
애환이 담긴 구슬픈 노래다.
사기가 낮은 전장에서 불렀다가는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단원들을 제지하며 그들이 마음껏 고향을 노래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머나먼 곳, 나는 보았네. 황금으로 일렁이는 보리밭과 하나뿐인 우리의 고향을. 이삭 푸른 내, 바삐 웃는 새! 동부로 향하는 별 아래 뛰노는 계절이 왔다네.]
패권을 다투는 전쟁도, 민중을 계몽하는 사상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 앞에 아무런 힘없이 녹아내리고 말았다.
오른쪽 성벽에서부터 시작된 노래는 어느덧 소돔 이곳저곳을 물들였고 동부 인간들은 구슬픈 노래를 목놓아 불렀다.
[불운한 죽음도, 고귀한 삶도, 모두 이곳으로 오라. 고향은 아픔 없는 요람이오, 웃음뿐인 관이네. 선조들이 잠든 땅을 꾹꾹 밟아, 황금시대 찬가를 부르자.]
마지막 소절을 끝으로 노래가 잦아들었다.
민병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엄숙한 침묵을 지켰고 주민들 또한 먹먹한 눈물을 닦으며 풀어진 옷깃을 추슬렀다.
그 순간 나는 느꼈다.
텅텅 비었던 전의 사이로 감히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채워졌다는 것을 말이다.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나는 투레질하며 다가온 흰 뿔 사슴을 쓰다듬어 준 뒤 안장 위로 올라탔다.
그러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일행들과 단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몰았다.
뿌우우우우우 - - - -!!
Uraaa - - - !!!
오크 놈들이 드디어 진격을 시작했다.
커다란 진격 나팔과 함께 고함이 터져 나왔고 이를 악문 민병들은 성벽 위에서 최선을 다해 화살을 쏘고 돌을 던졌다.
이제 우리가 움직일 차례다.
고삐를 쥔 나는 일행을 포함한 기수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렸다.
“계획은 그대로다! 중간에 낙오되지 않도록 반드시 선두만 보고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경!”
스릉!
고삐를 힘차게 당기자 앞발을 든 흰 뿔 사슴이 빠른 속도로 발굽을 내디딘다.
그리고 날카로운 검을 뽑아 든 나는 기꺼이 선두가 되어 정면을 향해 달려갔다.
“깃발을 들어라!”
펄럭!
기수가 당당히 깃발을 들었다.
한줄기 날카로운 사선이 된 기병대는 그대로 전장이라는 물에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