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검은머리 기사왕 91화
다음 날 성벽 위에선 만난 헬레나는 굉장히 편안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동안 심신을 옥죄어오던 압박이 사라지자, 본래 모습으로 되찾은 것이다.
가지고 있던 것을 놓아야 다시 새로운 것을 쥘 수 있다고 했던가.
나는 리처드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끼며 성벽 계단을 조용히 밟았다.
“오셨어요?”
그러자 떠오르는 여명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헬레나가 나를 반겼다.
방긋 짓는 웃음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일찍 일어났군.”
“어제 약을 버렸거든요. 분명 없으면 못살 것 같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네요.”
미약한 단내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기어코 먹고 있던 마약을 끊은 건가.
비록 금단 현상 때문에 손과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지만, 회복하기 시작한 영혼은 시간이 지날수록 맑아지고 있었다.
나는 잘 생각했다는 작은 격려와 함께 다시 한번 성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화살 사정권 밖으로 물러난 용병단 본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움직임은 없었나?”
“네, 밤새 조용했어요. 사령관 목이 그리 베였는데 공격하는 게 더 이상하죠.”
전방에서 날뛰어준 보람이 있다.
놈들은 본진이 뚫렸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날이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세를 취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강도 잠시뿐일 것이다.
나는 습관처럼 미간을 긁으며 어제 쭉 둘러봤던 수비 측 군세를 가늠했다.
사상자가 많았던 만큼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적었고 훈련 규모도 형편없었다.
아니, 더 심각한 것은 민병들 전부가 짙은 공포에 질려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전쟁은 단순히 살기 위해 버티는 것이지 승리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전의라는 게 없는 군대로 과연 혼란에 빠진 동부를 되찾을 수 있을까.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나약한 뿌리를 전부 드러내고 그 땅에 어울리는 새로운 씨앗을 심을 것이다.
나는 헬레나를 향해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전쟁 잔해들이 아직 치워지지 않은 성벽을 함께 걷기 시작했다.
“대장간 인력이 충분해 보이더군. 혹시 무기도 새로 만들 수 있나?”
“······새로운 무기에 적응할 시간이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대부분이 농부예요.”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을 땅을 갈며 살아온 동부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단기적 훈련으로 성취를 기대한다면 도리어 사령관 잘못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 있다는 듯 성벽 위에 손을 올려두고 거리를 쟀다.
여기서 여기까지, 촉은 날카롭고 짧게, 반대로 지지대는 길고 튼튼하게, 내가 원하는 무기는 바로 파이크(Pike)였다.
“긴······창이네요?”
“아마 조금 다른 개념일 거다. 촉만 달려 있어도 상관없으니 수량만 맞춰다오.”
“기한을 꼭 맞춰볼게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어와서 그렇지 헬레나는 충분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나는 고맙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앞으로 펼쳐질 전장 상황을 그려보았다.
동부는 기본적으로 북방보다 인구가 많다.
이번 봉기에 참여한 민병들을 전부 모아 훈련한다면 세를 불리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동부에 어울리는 동부의 전투 방법.
나는 그동안 인간을 우습게 보았던 오크 놈들에게 민병이 진화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형태를 고스란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나는 단원들과 바삐 상의하는 헬레나를 뒤로하고 성벽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무리를 이룬 작은 말발굽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 - -?”
“경! 놈들이에요!”
무언가 성벽으로 접근하고 있다.
황급히 다시 계단을 올라간 나는 헬레나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깃발을 단 무장 기수 셋이 성벽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기를 뽑지 않은 모습은 분명 아래서 대화를 나누자는 제스처가 분명했다.
순간 의문을 느낀 나는 물었다.
“놈들이 협상을 시도했었나?”
“······아뇨,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동부에서는 나름 정예 취급받는다고 들었는데, 역시 태생이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이라 그런지 손해에 극도로 민감하다.
아마 어제 입었던 피해가 자신들이 예측한 수위를 아득히 뛰어넘었던 모양이다.
피식 웃은 나는 검집에 손을 올린 채 그대로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꺅!”
뒤에서 깜짝 놀란 비명이 들려온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가볍게 착지한 나는 동요하는 놈들을 향해 다가갔다.
푸르륵!
놈 중 하나가 말에서 내린다.
그리고 다가가는 나를 향해 마주 보며 다가오면서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붉은 염료로 칠한 얼굴과 흉터 가득한 몸.
죽어버린 사령관을 대신해 찾아온 놈은 굉장히 노련해 보이는 용병 부장이었다.
가깝게 다가온 놈은 내게 대뜸 물었다.
“북방인이오?”
“보다시피 인간이지.”
“다른 지역이지 않소.”
“오크는 지역으로 형제를 구분하나?”
놈이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내가 무심히 날린 대답에 묵직한 뼈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크르륵.
놈을 몰려오는 치욕과 분노를 가까스로 참으며 뜨거운 콧김을 훅 내뱉는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목적을 말하고자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제안했다.
“북방 기사가 왜 반란군을 돕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도망칠 수 있는 길을 내어주겠다.”
“말이 많군.”
“······정녕 본토가 개입하기를 원하나? 생각이 있다면 제대로 판단하는 게 좋을 거다.”
“제국 소속도 아닌 놈들이 왜 본토를 들먹이지? 혹시 어미가 둘인가?”
동부에선 본토를 등에 업은 협박이 통할지는 몰라도 우리에게는 아니다.
나는 놈이 가하는 어쭙잖은 협박을 전부 되받아치며 항전 의지를 밝혔다.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가!”
예상대로 오크 용병단은 공성전 패배가 아닌 앞으로 있을 피해를 두려워하고 있다.
욕설을 내뱉는 놈에게 중지를 추켜올려준 나는 그대로 뒤로 돌아 걸어갔다.
“- - - - - - -.”
성벽에는 어느새 일행과 함께 수많은 사람이 몰려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당당한 모습에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눈동자를 깜빡였다.
왜 하등 관련 없는 자신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위험을 자초하는 것일까.
동부 사람들은 한때 든든한 동맹이었던 북방을 천천히 떠올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이제부터 자비란 없을 것이다! 애, 어른! 수컷, 암컷 할 것 없이 전부 산채로 찢어 죽여주마!”
하지만 그 순간 욕설을 내지르던 용병단 부장이 협박의 대상을 바꾸었다.
바로 성벽에 모인 동부인들을 향해 서슬 퍼런 무기를 겨눈 것이다.
소돔이 함락된다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산채로 찢어 죽이겠다는 협박.
가뜩이나 겁에 질려있던 동부인들을 성벽 뒤로 더욱더 몸을 움츠렸다.
쯧.
다 똑같은 오크 대가리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 있다.
효과적으로 동부인을 협박하는 모습에 나는 가볍게 혀를 차며 검을 뽑았다.
스릉!
서걱!
히히히힝!
자세를 잡을 필요도 없었다.
순식간에 몸을 돌려 검을 휘두르자 입에 거품을 물던 놈은 그대로 목이 잘린다.
하늘로 솟구치는 피 분수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앞발을 드는 승용마들.
어제 보았던 공포를 떠올린 나머지 두 놈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도망쳤다.
철컥.
피를 털어낸 나는 검을 다시 납도했다.
그리고 무심한 얼굴로 걸어가 바닥에 구르는 놈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항복은 없다.”
양측 전부가 들어야 할 것이다.
소돔 성벽을 시체로 다시 세우는 한이 있더라도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선언한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핏자국이 자욱한 소돔으로 돌아갔다.
* * *
“이,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손재주가 좋군. 한 자루를 만드는데 재료랑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지?”
“일단 시작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재료는 충분한데 창대가 워낙 길어서······.”
“이해한다.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튼튼하게 만들어다오.”
“아이고, 맡겨만 주세요.”
헬레나가 데려온 대장장이들은 하나같이 실력이 뛰어난 명인들이었다.
역시 철과 기구를 다루는 것에 따를 자들이 없는 동부인들 다운 결과였다.
나는 대장장이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공터에 도착한 수레로 다가갔다.
그리고 비교용으로 생산된 파이크를 꺼내 까마귀 단원들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저희가 사용할 무기인가요?”
민병과는 다르게 혹독한 수련을 해온 까마귀 단원들은 대부분이 정병이다.
그렇기에 훌륭한 병사가 될 수 있음과 동시에 뛰어난 교관이 될 수 있었다.
“너희들이 오늘 배우게 될 무기와 진형이다. 모든 것이 숙달되는 즉시 최대한 많은 민병에게 가르치게 될 거다.”
“시,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습니까?”
“내 동료가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 그러니 조급한 만큼 최선을 다해라.”
현재 적군 진영은 암습을 펼치는 검은 화살로 인해 마비된 상태였다.
밤이 될 때마다 찾아와 부장들을 전부 죽여버린 탓에 지휘체계가 무너진 것이다.
물론 안전 문제상 이런 작전을 오래 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단원과 민병들을 훈련할 시간은 충분히 벌어줄 것이다.
나는 파이크를 나눠주며 물었다.
“민병들이 가진 가장 큰 단점이 뭐지?”
“······사기가 낮습니다.”
“맞다! 평생 농사만 지어온 그들에게 살을 맞대고 싸우라는 것부터가 무리한 요구다. 강행은 쓸데없는 피해만을 유발하며 전쟁을 불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겠지.”
전사는 두려움을 통제할 수 있고 또한 분노로 치환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훈련받지 못한 민병들에게는 살인이라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내가 대답을 기다리자, 공터 한쪽에서 훈련을 참관하던 리처드가 대신 대답했다.
“교전 거리를 늘려야 합니다.”
“정답이다.”
손으로 적을 때려죽이는 것과 화살로 적을 쏘아죽이는 것은 그 차이다.
바로 무감각과 공간이라는 안전함.
그것만 마련된다면 아무리 농부라도 일시적인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창을 들어라!”
단원들은 빠르게 이해했다.
그리고 내 명령을 따라 하나둘 파이크를 쥐고 지시한 대열을 이루기 시작했다.
“훈련 기간은 짧다. 완벽한 대열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흩어지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무엇이 제일 적절한가?”
“원형입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안다.
기꺼이 한 단원을 칭찬한 나는 한차례 박수와 함께 대열을 이룬 방진을 마주했다.
“모든 촉이 앞으로 향할 수 있게 해라! 절대 찌르는 게 아니다! 적의 접근을 막는다는 생각으로 창대를 밀어라!”
“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원래 밀집대열을 고려해서 만든 무기다. 기동력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오직 적의 진군을 막는 데 집중해라.”
오크 용병단 대부분은 두꺼운 강철 갑옷과 육중한 할버드로 무장한 중무장 보병이다.
하지만 민병들이 쓰게 될 파이크는 할버드 보병에 대한 완벽한 카운터였다.
“동부인은 체구가 작다! 하지만 체구가 작기에 할 수 있는 싸움이 있는 거다.”
“적을 두려워하지 마라. 동부를 우습게 본 놈들에게 창을 꽂아줘라!”
수천 마리 양 떼를 우습게 본 늑대에게 어떤 대가를 선물해줘야 하겠는가.
하얀 털이 고슴도치로 변한다면 놈들은 웃으면서 아가리를 벌릴 수 없을 것이다.
“빈틈이 보인다! 궁둥이 제대로 붙여!”
“우리 마을 북방 할아버지도 너희들보다 잘할 거다! 허리 곧게 펴고 창 쥐어!”
그렇게 혹독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나는 파이크로 만든 방진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빈틈을 검집으로 찔렀고 흔들리는 창대를 잡아 뒤로 내팽개쳤다.
하지만 신념으로 뭉친 단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버티고 또 버티었다.
지켜야 할 것이 있기에 강해지는 인간, 동부 또한 그렇게 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