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검은머리 기사왕 90화
대장으로 보이는 놈의 목을 가뿐하게 따버린 뒤 진영 깃발을 뺏어왔다.
물론 광분한 오크 놈들이 창과 방패로 앞길을 막았지만, 돌파를 허용한 마당에 도주를 저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날이 무뎌질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안장 뒤에 탄 검은 화살은 한 아름 들고 왔던 화살통을 전부 비워낸다.
그러자 더 이상 앞길을 막는 놈들은 보이지 않았으며 무거운 갑옷을 입은 추격자들은 제풀에 지쳐 추격을 멈추었다.
한참 진행되던 공성이 소강상태로 변했다.
사방에서 뜨거운 시선을 느낀 나는 그대로 고삐를 돌려 후문으로 사슴을 몰았다.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고생했다.”
제 역할을 톡톡히 해준 흰 뿔 사슴이 걸음을 늦추며 가볍게 투레질한다.
나는 그런 녀석의 목을 조용히 쓰다듬어준 뒤 고개를 들어 후문 근처를 둘러봤다.
먼저 출발한 리처드와 까마귀 단원의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모를 걱정과는 달리 후문을 통해 무사히 소돔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끼기기기긱!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굳게 닫혀있던 도시 후문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나는 오크 놈들이 따라오기 전 서둘러 사슴을 몰아 소돔 내부로 들어갔다.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모래 더 뿌려!”
“빨, 빨리! 빨리!”
화살과 그을림이 가득한 후문을 지나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급히 화재를 진압하고 있는 민중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북적거림도 잠시 바삐 불을 끄던 사람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후문을 통해 들어온 우리를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동부에 홀연히 나타난 북방 기사.
아무리 많은 오크 놈들을 베고 왔다고 한들 이방인을 향한 두려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단장님!”
그 순간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리처드가 사슴을 타고 달려왔다.
나는 그제야 뺏어온 깃발을 바닥에 꽂으며 피로 물든 안장에서 내려왔다.
“깜짝 놀랐습니다! 무모하셨어요!”
“이 정도야 뭘.”
소돔 내부로 들어온 리처드는 적진에서 날뛰는 우리 모습을 지켜본 모양이다.
나는 호들갑을 떠는 녀석을 안심시켜준 뒤 주변 분위기를 조용히 살폈다.
“헬레나가 네 얼굴을 알아봤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했습니다. 다행히 억류되지는 않았네요, 하하.”
봉기군이 들고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나라를 멋대로 주무르는 간신들과 아무런 힘이 없는 무능한 왕실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건 동부 왕자인 리처드는 그들이 왕 다음으로 몰아내야 할 증오스러운 왕실 일원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헬레나는 그동안 심경 변화를 겪기라도 했는지, 리처드를 일단 소돔 내부로 들어 올 수 있게 허락해주었다.
기분 좋은 시작이다.
가벼운 다툼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던 나는 기쁜 기색이 역력한 녀석에게 충고했다.
“왕실과 신하들이 저지른 폐단이 네 잘못이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면 몸가짐을 바르게 해라.”
무능한 왕실에 질린 헬레나와 민중들은 리처드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 반발하지 않고 행동으로 진심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자고로 왕이란 마음을 얻는 자.
형제들과 기사왕 옆에서 많은 것을 배운 리처드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경.”
어느덧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다.
내가 벌인 습격에 적진 진영은 마비가 되었는지 공성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지친 얼굴로 바닥에 쓰러지는 사람들과 엄마를 찾으며 훌쩍이는 아이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자리를 지키며 절망스러운 소돔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기다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청각이 예민한 검은 화살이 가장 먼저 접근해오는 무리의 존재를 확인했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드디어 왔네.”
“음.”
저 멀리서 허름한 갑옷으로 무장한 민병들이 무리를 지어 다가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건을 뒤집어쓴 까마귀 단원들이었고 고생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싸웠길래 피와 갑옷이 엉겨 붙다 못해 딱지가 졌을까.
안쓰러움에 입맛을 다신 나는 고개를 숙이는 단원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경. 헬레나 님이 뵙고자 하시는데 혹시 오늘 괜찮으십니까?”
“일행들은?”
“동행하셔도 좋습니다.”
마침 휴식이 필요하던 참이다.
확답을 듣고서야 긴장이 풀린 나는 검집에 살포시 올려두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가오는 단원에게 투레질하는 사슴을 맡긴 뒤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걷는 동안 들려오는 작은 하품 소리는 오늘 하루 고생을 축약하는 것 같았다.
* * *
따뜻한 물로 핏물을 전부 씻어내고 미리 챙겨온 깔끔한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간단한 식사와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자 한 단원이 숙소 건물을 찾아왔다.
아무런 말 없이 숙소에서 나와 헬레나가 기거하고 있는 시청으로 향한 우리.
소돔과 마찬가지로 쑥대밭이 된 시청 건물은 음울한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끼이익.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동부인답지 않게 덩치가 큰 단원 두 명이 공손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경, 무기를 잠시 맡아두겠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절차다.
아무리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라고 한들 암살 위협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불쾌함을 느끼기도 전, 접객용 의자에 혼자 앉아있던 헬레나는 그런 단원을 조용히 제지했다.
“괜찮으니 이쪽으로 모시세요.”
북방 기사는 왕조차 검을 뺏지 않는다.
고향 풍습을 기억하고 있던 헬레나는 우리를 기꺼이 배려해주었고 자리에 앉으라는 듯 접객 의자를 공손히 가리켰다.
끼익, 털썩.
헬레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엇이 북받치려 하는지, 아니면 스스로를 향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지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뼈아픈 실패가 그녀를 변하게 했구나.
나와 일행들은 헬레나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촛불 같은 시간이 하염없이 지났다.
그러자 애써 웃음을 연기한 그녀는 다 쉬어빠진 목소리로 화두를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경. 관문을 탈환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정말 축하드려요.”
“고맙군.”
순간 헬레나와 눈을 마주쳤다.
분명 눈동자에 맺혀있어야 했던 독기도, 분노도, 증오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심정일지 이해가 간다.
그녀 또한 그 기색을 읽었는지 초연한 웃음과 함께 다시 고개를 숙였다.
“꼴이 한심하죠? 후회하게 될 거라고 큰소리 떵떵 쳐놓고 결국 이렇게 돼버렸네요. 당신이 옳았어요, 검성.”
사상이라는 꿈에서 깨어보니 보이는 것은 현실이요, 신념은 덧없는 고집이다.
평생을 꾸었던 꿈이 그저 몽상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인간은 쉽게 허물어진다.
그녀는 지금 시들어가는 꽃이었다.
이른 봄을 참지 못해 피었다가 스스로 저버리는 그런 미련한 꽃, 수많은 춘몽 아래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후회 말이다.
나는 솔직히 묻고자 했다.
“옳고 그른 건 없었다. 그냥 불가능하다고 여겼을 뿐이지. 그래도 끝까지 틀렸다는 말을 듣고 싶다면 하나만 묻자.”
“······예, 말씀하세요.”
“네가 꿈꾸는 세상은 이거였나?”
봉기군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최후의 도시인 소돔은 함락되기 직전이다.
당연히 지원군은 없을 테니 비참한 패망은 예정되어있는 결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진심이 궁금했다.
후회하고 있다면 이루지 못한 꿈 때문인지, 아니면 깨닫게 된 현실인지를 말이다.
헬레나는 애써 올린 입꼬리를 떨었다.
그리고 초점을 잡지 못하는 눈가를 연신 감았다가 뜨며 목소리로 쥐어짜 대답했다.
“차라리 질책하세요. 주제를 몰랐다고, 분수를 넘었다고 말씀하신다면 달게 들을게요. 하지만 제 생각은 여전해요.”
“모두가 죽었는데도?”
“······당,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신념을 잃으면 남는 건 무엇일까.
헬레나는 마지막 자존심인 가치만큼은 지키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내가 왜 이래야 했는지, 지 알아요? 우리는 옳은 일을 위해서······!”
하지만 목소리를 사정없이 떨렸고 앞으로 뻗은 손가락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짙은 동요를 마주한 나는 눈동자 너머에서 읽었던 진실을 툭 내뱉었다.
“그냥 세상이 미웠을 뿐이지 않나?”
“아니야!!”
고함을 크게 내지른다.
술과 약으로 잊고 있었던 끔찍한 환청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한다.
‘살려주세요! 아아악!
‘꺄아아아악! 안돼’
“아, 아아아······!”
헬레나는 황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새된 비명을 겨우 삼키며 헛구역질이 오를 것 같은 기억을 흘려낸다.
덧없이 죽어간 젊은 청년, 같이 묻히지 못한 화목한 부부, 장대에 꽂힌 순진한 아이.
그녀는 이 모든 비극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의식은 방어기제를 허용치 않았고 마지막 의지였던 변명과 위안마저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생날 것 그대로인 비참함.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 그녀의 영혼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그리고 끝내 헬레나가 선택한 것은 세상을 미워했던 북방인 노예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나섰던 까마귀 헬레나였다.
“······저 때문이에요.”
그녀는 어쩌면 자신을 끝까지 몰아세울 질책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알량한 자존심을 벗겨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표정이 무너져내렸다.
그 뒤로 후회, 절망, 슬픔, 이 모든 감정이 깨진 그릇처럼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와 처음 만났던 그 날, 조금이라도 더 생각했다면 후회하지 않았을 텐데.
“제가 모든 걸 망쳤어요.”
헬레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아집을 전부 내려놨다.
그리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물로 평생 거짓을 연기했던 얼굴을 적셨다.
“·········우리를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너를 위해서?”
“아뇨,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헬레나는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나와 리처드 앞에 기꺼이 목을 내밀며 단호한 결심을 보여주었다.
“제 목을 베어가세요, 폐하.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여 깃발 아래 백성들을 지켜주세요.”
모든 왕도, 모든 사상도, 결국 인간이라는 존엄 아래 이루어지는 법이다.
헬레나의 진심을 듣게 된 나는 고개를 돌려 표정이 복잡한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는 녀석이 선택할 일이다.
잘못을 고한 헬레나를 벌하고 사람들을 속이던가, 아니면 모든 것을 끌어안고 끝을 알 수 없는 격류에 몸을 던지던가.
나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툭.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리처드의 어깨를 툭 쳐준 뒤 소돔과 동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걸어갔다.
밤하늘 뜬 별이 야속하다.
금방이라도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서 쏟아지는데도 정작 닿을 수는 없었다.
위대한 어머니 북방이시여, 굽어살피심에도 이 아래는 참으로 격합니다.
나는 무심한 날숨과 함께 피조물들이 공유하고 있을 별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자 리처드가 내게 물었다.
“단장님, 백성들이 원했던 건 뭔가요?”
“민중이 선택한 왕.”
“정해진 왕이 아니군요.”
“그래서 피하려고 했다.”
수많은 동부인이 왜 헬레나를 따랐고, 왜 들어보지 못했던 사상을 외쳤겠는가.
리처드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운명이라 임하고 쫓았던 왕좌는 처음부터 정해진 자리가 아니었다.
“왜 그동안 몰랐을까요? 동부는 왕자를 필요로 한 게 아니었어요.”
‘정통을 증명해라’
‘왕은 핏줄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리처드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린 헬레나를 일으켜주며 기꺼이 모든 것을 포용하려 했다.
“떠나고 싶으냐?”
“아니요, 동부에 남을 거예요.”
“네가 원하는 왕이 못될 수도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차마 나조차도 피하려고 들었던 폭탄은 리처드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왕이 될게요.”
하지만 녀석은 후련해하고 있었다.
마치 족쇄 같던 사명을 내려놓고 드디어 운명을 쫓게 된 인간처럼 말이다.
참으로 얄궂은 세상이다.
감당하지 못할 변화라 생각했는데, 그 시대의 주인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과연 이 결정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맴돌기 시작한 흐름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북방이 너와 함께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