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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89화 (89/181)

89화

검은머리 기사왕 89화

오크 용병단은 대부분이 강철 갑옷으로 중무장한 맨앳암즈 집단이다.

숙련된 북방군조차 호각을 이루기 힘든 놈들인데, 체구가 작은 동부인들에게는 정말 괴물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의기만으로는 갑옷을 뚫을 수 있는가?

창은커녕 낡은 쇠스랑이 다인 시민들은 전투라는 것이 성립되기도 전, 이미 전의를 잃고 사방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싸울 수 없으니 당연히 밀린다.

한때 동부 반절을 집어삼켰던 까마귀와 봉기 세력은 이제 몇몇 작은 도시와 함께 발원지인 소돔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물론 수도를 출발하기 전 들었던 그 마지막 소식도 이미 포위, 공성전이 시작되었다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전체적인 전황이 좋지 않다.

내 뒤에 앉은 검은 화살이 주변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쩔 거야?”

그나마 정신을 차린 헬레나는 자기 나름대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움직였다.

최대한 많은 피난민을 북방과 연결된 협곡으로 보내고 자신과 단원들은 시간을 끌기 위해 소돔에 남은 것이다.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듯, 실패한 혁명의 대가는 너무나 쓰라렸다.

도리어 협곡을 건너려던 피난 행렬은 사전에 차단당하고 말았고 마지막 거점인 소돔마저 집결한 용병단 놈들에게 포위당했다.

아마 전멸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패전과 동부 상황을 나름대로 예측해본 나는 대답했다.

“만약 원한다면 방법을 찾아봐야지.”

“······정말 애지중지하네.”

“좋은 녀석이다. 훌륭한 왕이 될 거야.”

리처드는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갈수록 숫자가 늘어나는 피난민 행렬을 손수 챙기고 있었다.

잘 보이기 위한 가식이 아니다.

가슴속에 새겨놓은 채 살았던 사명감은 녀석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흥.”

그리고 검은 화살 또한 리처드의 선한 내면을 읽었는지 괜한 투덜거림만을 내뱉을 뿐 그 진심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과거 눈투성이가 그러했듯 리처드 또한 아주 작은 순풍이 필요할 뿐이다.

추웠던 겨울을 봄으로 바꾸고, 척박한 땅 위에 꽃을 만개할 따듯한 변화가 말이다.

다각! 다각! 다각!

느린 걸음으로 행렬을 이끄는 사이 저 멀리서 로날드가 사슴을 몰고 왔다.

어젯밤 소돔을 정찰하기 위해 떠났다가 다음날이 돼서야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다각! 다각!

푸르륵!

나는 잠시 걸음을 늦추고 있던 사슴을 빠르게 몰아 대열 정면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표정이 매우 어두운 로날드가 다급한 숨과 함께 고삐를 당겼다.

“단장!”

“고생했다, 경!”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나는 입술이 다 말라붙은 그에게 수통을 던져주며 정찰 결과를 물었다.

“소돔은?”

꿀꺽!

“아직 버티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3일 정도가 한계로 보이더군요.”

그나마 튼튼한 도시 성벽이 있으니 한동안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계가 겨우 3일뿐이었고 공세가 어떠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나는 솔직히 물었다.

“리처드 생각은 어때 보이나?”

“······돕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북방군의 도움을 받지 못한 동부행은 반쯤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동시에 원인이 되었던 동부 봉기는 기반 세력을 만들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비록 왕실을 부정하는 동부 까마귀가 주축이 되기는 했지만, 정의라는 건 누군가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기사왕과 북방 형제들의 진심을 이끌었던 리처드라면 지치고 고통받은 동부인들의 마음도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고삐를 쥔 나는 로날드에게 명했다.

“리처드와 함께 소돔으로 향하겠다. 경은 피난민들을 마땅한 장소로 옮겨다오.”

“알겠습니다, 경!”

리처드가 원한다면 기꺼이 돕겠다.

내 의지를 읽은 로날드는 진심이 어린 경례와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푸르륵!

나는 다시 고삐를 당겼다.

그리고 뒤로 돌아 달려가며 어느새 숫자가 많이 늘어난 피난민 무리 옆을 달렸다.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만난 지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은 리처드의 든든한 뒷모습을 병아리처럼 따라가고 있었다.

* * *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협곡을 출발해 반나절을 더 달렸다.

그러자 지형이 익숙한 언덕과 함께 불쾌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나무와 사람을 태우는 냄새다.

나는 손을 들어 일행들을 정지시킨 뒤 타고 있던 사슴 안장에서 내려왔다.

“경?”

“쉿, 자세를 숙여라.”

채앵, 챙!

와아아아아 - - - !!

해가 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공성전은 한참 진행 중이었다.

서서히 바닥을 치는 사기를 노리고자 쉴 틈을 주지 않고 공세를 펼치려는 것이다.

퓨웅! 퓽!

파바바박!

용병단 진영에서 발사된 수많은 불화살 성벽 안쪽으로 미친 듯이 떨어졌다.

당연히 적을 막는 것도 힘겨운 봉기군은 연기와 화마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뚫리지는 않겠지만, 피해가 심각하다.

한동안 전장 상황을 살핀 나는 함께 따라온 동부 까마귀 단원을 향해 물었다.

“소돔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나?”

“마,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 있었으면 주민부터 빼냈겠지.

기대조차 안 했던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뒤 검은 화살을 향해 물었다.

“어때 보여?”

“놈들 숫자가 생각보다 적네.”

“그래, 기병대도 없다.”

강철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용병단은 분명 한 마리 한 마리가 강병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머릿수는 적었고 대부분 공세가 정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마 성을 지키는 병력이 정규군이었으면 도리어 당했을 허술한 공성전이다.

나는 펄럭이는 깃발 개수를 확인한 뒤 진지 바로 앞 용병단 본대를 발견했다.

파훼법은 생각보다 간단해 보였다.

나는 대기하고 있던 리처드를 불렀다.

“리처드!”

“말씀하십시오, 경!”

“정문에서 시선을 끌 테니 너는 단원과 함께 후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라.”

몰래 들어가도 걸릴 판인데 당당히 후문을 이용하겠다니, 이 사람이 지금 미친 걸까.

그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던 까마귀 단원은 얼떨결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경!”

하지만 리처드는 한 치 망설임 없이 경례를 취하며 다시 사슴 위에 올라탔다.

초롱초롱 빛나는 녀석의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굳건한 신뢰가 담겨있었다.

“정, 정말로······?”

“내 손을 잡으시오! 이랴!”

망설이는 단원을 타박한 리처드는 힘찬 기합과 우회로를 향해 돌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한 손으로 고삐를 쥔 뒤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만약 리처드와 단둘이 왔다면 어두운 밤을 이용해 몰래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내 뒤에는 난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검은 화살이 함께 타 있었고 심지어 적은 마땅한 기병대가 없었다.

비록 군대를 몰아낼 수는 없지만, 뛰어난 기사가 날뛰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활과 화살을 뽑아 든 검은 화살을 향해 말했다.

“뒤를 부탁한다.”

“······새삼스럽게.”

“하하.”

기분 좋게 웃은 나는 그대로 사슴을 박차 소돔이 보이는 언덕 아래로 질주했다.

북방에서부터 시작된 차가운 겨울바람은 동부를 야금야금 물들이고 있었다.

* * *

“크륵······.”

레드스킨 2번대를 이끄는 대장 쉬르마는 오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대장 놈들이 약탈을 즐기는 사이 자신을 패잔병 처리를 위해 야지에서 한참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한낱 술 내기 때문이라니.

쉬르마는 미간을 찡그리며 지겹게 버티고 있는 소돔 성벽을 바라보았다.

“추잡하군.”

소돔을 방어하는 봉기군은 정말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성벽을 사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사 쉬그마의 눈에는 그 모든 게 의미 없는 저항이고 명예롭지 않은 추잡한 짓으로 보일 뿐이었다.

아마 하루 이틀만 더 공격하면 제품에 지쳐 떨어져 알아서 뚫릴 것이다.

처음부터 항복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던 쉬그마는 간간한 입맛을 다셨다.

퉤!

마침 해가 지고 있다.

바닥에 걸쭉한 침을 뱉은 쉬그마는 병력을 지휘하는 부관을 향해 명령했다.

“밤새 성벽을 불태워라! 해가 뜨면 모든 병력을 동원해 함락시킨다.”

“크륵, 알겠습니다!”

이제 명령하는 것도 귀찮아진 쉬그마는 호위 병력과 함께 걸음을 돌렸다.

오늘은 후방 기지에서 밤새 불타오를 소돔과 인간 놈들이나 구경할 생각이었다.

“어, 어어?”

“적이다! 적 기병이다!”

다각! 다각! 다각!

하지만 쉬그마가 본대를 이탈하려는 그 순간 한참 지휘 명령을 내리던 부관과 부장들이 깜짝 놀라 본대로 뛰쳐나왔다.

언덕에서부터 질주해온 한 정체불명의 기수가 전장을 활보한 것도 모자라 대열 뒤로 후퇴 중이던 궁수들을 들이박은 것이다.

끄아아아악!

쏴! 쏘라고!

큰 뿔을 들이박는 거대한 흰 뿔 사슴과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기사.

거기다 흔들리는 안장 위에서 자유자재로 자세를 바꾸는 한 궁수는 날카로운 화살을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마침 지니고 있던 화살을 전부 소모하고 후방으로 돌아가려던 오크 궁수들이다.

보조용 검 말고는 대응할 수단이 없었던 놈들은 말 그대로 도륙을 당했다.

겨우 사슴 기수 하나 때문에 후퇴하던 대열이 흩어지고 시선이 쏠리다니.

비록 큰 피해는 아니었지만, 쉬그마는 불쾌하다 못해 분노가 몰려왔다.

“뭐해, 이 병신 같은 새끼들아! 당장 병력 보내서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하필 경기병을 지원받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원거리 병력이라도 보내 더 이상 날뛸 수 없도록 막아야 했다.

다각, 다각, 다각!

“이쪽으로 온다!”

“- - - - - - -!!”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놈들은 기습 후 도망치는 것이 아닌 도리어 자신이 있는 본진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두!

수많은 강철 군대를 앞에 두고 달려오는 한 마리 흰 뿔 사슴과 기수들.

당황은 잠시일 뿐 그 무모함을 비웃은 오크 놈들은 대기병 방진을 만들었다.

300m, 200m 100m.

가속, 그리고 또 가속하는 흰 뿔 사슴은 한줄기 하얀 선이 되어갔다.

그리고 기마 돌격과 함께 불어온 바람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이었다.

끼기기긱!

화르륵!

기수 뒤 궁수가 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시위에 걸린 화살은 이전과는 다르게 푸른색 오러로 타오르고 있었다.

오러 사용자!

의기양양 창을 앞으로 내밀었던 오크 용병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퓨웅!

곡선이 아닌 완벽한 직선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빛나는 궤적을 남기며 오크 놈들을 그대로 관통한다.

커억, 컥!

끄아아악!

강철 갑옷은 오러 앞에 의미 없다.

밀집은 도리어 악독이다.

손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쏟아지는 오러 화살 앞에 방진은 우수수 무너져내렸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그리고 흰 뿔 사슴이 방진을 돌파한 그 순간 전율이 이는 고함과 함께 안장 위 기수가 검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콰앙- - - -!!

후웅, 서걱!

스걱! 콰직! 서걱!

거대한 불꽃이 떨어졌다.

검성 손아귀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 한 자루 검은 마치 가을 나무 낙엽을 털어내듯 오크 용병단을 도륙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을 베는 순간에도 속도는 줄지 않으니, 뿔에 치이고 발굽에 치인 자들로 인해 본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살려줘!

“막, 막아! 막으라고!”

알고 있어도 막을 수 없다.

형체가 보이는데 도망칠 수 없다.

질량과 무게를 전부 무시하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쉬그마는 뒤늦게 깨달았다.

‘목을 내놓아라.’

기수, 아니 인간 기사는 교란을 목적으로 돌격한 것 아닌 자신의 목과 본진 한가운데 걸린 깃발을 노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광폭한가.

하지만 가로막는 모든 것을 깨부수는 기사에게는 그보다 어울리는 평가는 없었다.

서걱!

몸은 끈이 풀린 인형처럼 쓰러졌고 시야는 하늘 높이 떠올라 바닥에 처박힌다.

쉬그마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당당히 깃발을 뺏은 북방의 매서운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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