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검은머리 기사왕 88화
몇 달 만에 다시 찾은 백색 관문과 그 근방은 멀리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부분이 발전하고 바뀌어 있었다.
화마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던 오크 기지를 철거하고 방어와 인프라 조성에 적합한 방향으로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왕실에서 일당을 지급한다는 소리에 짐을 챙겨 내려온 인부들과 그런 인부들을 상대로 물건과 음식을 팔려는 장사꾼들.
관문 근방에는 자연스레 개척 마을이 조성되었고 해방된 노예들과 피난민들은 덩달아 그 마을에 정착하고 말았다.
물론 수많은 판자촌과 몰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한동안 치안악화와 같은 문제가 있었지만, 파견된 관리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상당 부분 개선이 되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백색 관문은 왕국 입구를 지키는 든든한 방패이자, 동부와 북방을 이어주는 중요한 가교도 역할을 해줄 것이다.
나는 하늘 아래 우리를 굽어살피는 어머니 북방을 향해 찬란한 앞날을 기도했다.
그리고 고삐를 당기자 한참을 달리던 사슴이 멈추며 거칠게 투레질한다.
푸르륵!
두두두두두두두 - - - -!!
드넓은 평원 주변에는 늠름한 흰 뿔 사슴 기병대가 빠르게 선회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나와 일행들을 호위해주고자 관문에서 병력을 파견해준 것이다.
이제 어엿한 정예병 티가 난다.
한참 주변을 선회하던 흰 뿔 사슴 기병대 부장이 내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저희는 여기까지입니다, 경! 이쪽으로 쭉 가시면 협곡이 나오실 겁니다!”
“고맙다!”
하루에도 크고 작은 전투가 수십 번씩 벌어지는 분쟁 지역에서 이만한 기병대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내게 정중히 경례한 부장은 이끌고 온 기병대와 함께 평원을 달려 오늘도 관문을 지키기 위한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두두두두두두 - - -!
이제 우리 넷뿐이다.
나는 안장 위에 함께 탑승하게 된 검은 화살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원래 사슴을 탈 줄 모르던가?”
“까, 까먹었는데?”
이번 동부 여정에는 리처드와 로날드를 제외한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
해안가를 지키던 검은 화살이 동부행 파견단에 함께 가겠다고 자처한 것이다.
최근 엘프 선박 출몰이 줄어들기도 했고 해안 방어도 충분하니 괜찮지 않을까?
한동안 고민하던 왕과 재상은 검은 화살의 동행을 흔쾌히 허락했다.
전투 능력만큼은 회색 늑대와 동급이라 인정받던 추방자들의 수장이다.
한동안 함께 하게 된 그녀의 존재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든든했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다.
짐을 꾸린 로날드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경, 준비됐습니다.”
부장 말로는 앞으로 2~3시간만 더 달리면 협곡에 도착할 수 있다 했다.
이제 국경을 막는 오크가 없으니 동부로 진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갑시다.”
불어오는 순풍은 예감이 좋다.
로날드가 꾸려준 짐을 챙긴 나는 투레질하는 사슴을 달랜 뒤 두꺼운 고삐를 쥐었다.
“이랴!”
다각! 다각! 다각!
기합과 함께 고삐를 내리쳤다.
그러자 나와 일행들을 태운 사슴 무리가 평원을 빠른 속도로 가로질렀다.
* * *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평원에서 협곡 초입까지는 3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잠깐 숨을 돌린 나와 일행들은 협곡 입구를 향해 망설임 없이 사슴을 몰았다.
“······너무 조용합니다.”
협곡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아무리 관문으로 향하는 교역로가 끊겼다지만, 북방과 교류하려는 상단 마차나 피난민마저 보이지 않을 줄은 몰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길래,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가.
통행 인원이 사라진 협곡에는 오직 을씨년스러운 바람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대열을 좁혀라.”
짙게 낀 먹구름과 높은 절벽 때문인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협곡은 어두웠다.
주변을 살핀 나는 어쩔 수 없이 기름 먹인 횃불을 꺼내 불을 붙였다.
화르륵!
어둠 때문에 시야가 한정적이다.
더 이상 속도를 내는 것은 위험했기에 나는 대열을 좁히라 명령하고 선발에 섰다.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불안감.
목덜미를 핥고 지나가는 수상한 기류는 알 수 없는 위험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협곡에 무슨 변고가 있었다.
나는 지나치게 정돈된 길가를 보며 검 손잡이 위로 오른손을 올려두었다.
그렇게 1시간처럼 느껴지던 10분이 지나고 거세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순간 무언가 익숙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끼기기긱!
피융!
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어둠이 짙게 낀 수풀 속에서 잿물로 검게 칠한 갈기 화살이 날아왔다.
챙!
하지만 빠르게 검을 뽑은 나는 날아오는 화살을 튕겨냈고 동시에 뛰어내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공격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피융! 퓽!
끼기기긱 퓽!
채앵! 챙!
화살 깃이 오크 양식이다.
거기다 이런 식으로 기사를 상대하는 놈들은 오직 오크 사냥꾼들이 유일했다.
협곡이 왜 조용하다 했더니, 이미 여기까지 진출한 오크 용병단이 있었던 모양.
화살을 전부 튕겨낸 나는 화르르 타오르는 기름 횃불을 수풀 한가운데로 집어 던졌다.
화르륵!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행 중에는 무장한 기사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횃불을 집어던진 그 순간 머리 바로 옆으로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퓨웅!
커억!
끄아악!
수풀에 떨어진 횃불이 주변을 밝힌 그 짧은 찰나 검은 화살은 맹수에 가까운 동체 시력으로 놈들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화살 3개를 동시에 쏘아 가장 가까운 나무에 숨어 있던 오크 사냥꾼 셋을 모조리 죽이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기사단! 돌격하라!”
검은 화살이 엄호하는 이상 사각을 노릴 수 있는 궁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세등등해진 나는 커다란 고함과 함께 협곡을 점거한 놈들을 향해 돌격했다.
후웅!
까앙!
그러자 깜짝 놀란 오크 한 놈이 재빨리 검을 뽑아 머리 위로 내려쳤다.
하지만 나는 그 공격을 가뿐하게 튕겨내며 순식간에 검과 몸을 베어버렸다.
“흐랴아압!”
“죽어!”
물론 일행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리처드는 놈들을 향한 분노를 기합으로 표출하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고 로날드 또한 착실하게 적을 도륙했다.
작은 체구라고 무시하면 큰일 난다.
북방 검술의 장점과 내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한 그 둘은 이미 높은 경지를 성취할 수 있게 된 지 오래였다.
푸욱, 뿌드득!
흐뭇하게 웃은 나는 부지런히 움직여 나머지 오크 놈들을 처리했다.
그러자 주변은 어느덧 모조리 도륙당한 오크 시체들과 핏물로 가득했다.
흥분한 리처드가 내게 물었다.
“단장님, 추격할까요?”
“이미 검은 화살이 갔다. 그러니 일단 피부터 닦고 진정해, 분노가 너무 과하잖아.”
“······죄송합니다.”
전의를 잃은 몇몇 놈들이 도망쳤다.
하지만 검은 화살이 이미 쫓아갔으니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낸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리처드를 토닥였다.
분노를 힘으로 승화하는 것 좋지만, 모든 것은 과하면 문제가 되는 법이었다.
“가자.”
더 이상 적이 없음을 확인한 우리는 검은 화살이 뛰어간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화살이 박히는 소리와 함께 절벽을 낀 한 야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를 거점으로 두고 오가는 모든 인간을 사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제야 협곡 상황을 이해하게 된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검을 집어넣었다.
“읍읍!”
야영지를 깔끔하게 정리한 검은 화살이 사로잡은 오크 놈과 함께 역한 냄새가 밴 한 깃발을 내게 보여주었다.
“놈들 야영지에 걸려 있었어.”
“혹시 본 적 있나?”
로날드는 횃불을 들고 와 깃발을 살폈다.
그리고 알고 있다는 듯 오크 부족과는 다른 양식인 깃발 표식을 가리켰다.
“레드스킨 놈들입니다. 이 녀석들은 아마 그 산하 조직 중 하나일 거고요.”
“산하 조직? 용병단 따위가?”
“극동 광산 지대에 뿌리를 박은 오크 용병단입니다. 그 규모 워낙 커서 2황자도 함부로 못 하는 녀석들이죠.”
“······그런 놈들을 돈 주고 고용했다고? 너희들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검은 화살의 신랄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로날드는 왕실이 욕을 먹었음에도 반박하기는커녕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역사여도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읍읍!
서걱!
“크아아악!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들! 배를 갈기갈기 찢어서 내장을······!”
콰직!
잡힌 주제에 말이 너무 많다.
나는 광분하는 오크 놈 머리를 검집으로 후려친 뒤 피가 흐르는 복부를 걷어찼다.
내장을 뭐 어쩐다고?
미간을 찡그린 나는 버둥거리는 놈을 짓밟은 뒤 리처드가 넘기는 횃불을 받아들었다.
“다른 놈들은 어디 있지?”
“이, 이 씹······!”
“그래, 말 안 하겠지.”
치이이이익!
끄아아아아아아악!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던 나는 넘겨받은 횃불로 상처 부위를 지져주었다.
그러자 놈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든 액체를 쏟아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로 지진 상처 부위는 화상으로 인해 지혈되고 있었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놈을 걷어찬 뒤 다시 한번 다른 용병단 위치를 물었다.
“어디 있지?”
“남, 남쪽······! 협곡 남쪽!”
치지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아아악!
옳은 말을 뱉을 리가 없다.
나는 상처 부위를 꼼꼼하게 지져주며 입에서 진실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마 이런 상태에서 반나절만 지나면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나는 친히 북방의 방식을 놈에게 보여주며 아직 시간이 많음을 알려주었다.
“단장님!”
하지만 그 순간 야영지와 협곡 주변을 살피던 로날드가 다급히 나를 불렀다.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화색이라는 감정이 끼어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
사냥꾼 놈들이 웬일로 포로를 잡았지?
깜짝 놀란 나는 비명을 지르는 오크 놈을 걷어찬 뒤 로날드를 향해 달려갔다.
“살, 살려주시오!”
“끄흑, 흑!”
그러자 야영지 근처 흙바닥에는 깊숙이 파진 구덩이 감옥과 함께 아우성이 들려왔다.
무려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궁창과 함께 갇혀 겨우 살아있었다.
서걱!
“잡으세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가뭄 속 단비 같은 소식이다.
살아남은 동부인이 있다는 소리에 리처드는 급히 철창을 잘라 손을 뻗었다.
그리고 몸에 묻는 오물과 시궁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울고 있는 사람들을 손수 꺼내고 깨끗한 물을 먹여주었다.
구해낸 숫자만 무려 31명이다.
희망 없는 지옥에서 탈출한 동부 사람들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터트렸다.
모두 이런 결과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많은 백성을 구해낼 리처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심신을 굳게 다스렸다.
“검, 검성?”
“음?”
하지만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내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돌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한 동부 남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성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설마 기사왕 폐하께서 보내신 겁니까? 네? 제, 제발 그렇다고 해주십시오.”
“누구지? 나를 아나?”
얼굴이 초췌해진 남성은 눈물과 콧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앙상한 무릎을 꿇으며 정체를 묻는 내게 두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그것은 동부 야영지에서 본 기억이 있는 동부 까마귀들의 상징이었다.
동부를 빠져나가려다 붙잡힌 단원이라, 어쩌면 뻔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변고가 생긴 모양이군.”
“끄윽, 끅······!”
남자는 내 발밑에 엎드렸다.
그리고 자비를 구걸하는 간절한 몸짓으로 현 동부 상황을 대변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