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검은머리 기사왕 87화
“······헬레나 님은?”
“여전히 안에 계십니다.”
헬레나는 정예 까마귀들의 도움으로 항구 도시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무려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허름한 천막 내부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민중이 흘린 피가 말라붙어 있다.
손과 팔에는 까만 그을림과 끔찍한 화상이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는 듯했다.
헬레나는 죽어있었다.
죽은 눈을 하고 있으니 죽은 이고 죽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죽은 이가 맞았다.
빛 한점 없는 천막 안에서 헬레나는 또 한 번 실존하는 악몽과 마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떠올린 기억한 어두운 바람이 불던 야영지였다.
‘제대로 미쳤군.’
그곳에서 만난 한 북방인은 고집으로 똘똘 뭉친 그녀에게 미쳤다는 폭언을 퍼부었다.
그동안 자신이 소중히 품어왔던 신념, 가치, 방향성을 모조리 부정한 것이다.
옳은 일을 하는 것에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모욕하다니 인간 검성이라 불리는 위명은 다 헛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많은 목숨이 잃고, 끔찍한 화상의 고통마저 느껴지지 않을 때쯤 헬레나는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착각했을 뿐이다.
증오와 분노를 정의라고, 이기적인 욕심을 모두를 위한 대의라고 말이다.
‘민중을 위하여?’
그 미련한 대가는 무엇이었겠는가.
섣부른 봉기와 안일함 앞에 수천 명이 넘는 민중들이 학살을 당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피해는 빠른 속도로 확산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에, 에이미! 에이미 안 돼!’
끄윽.
헬레나는 귀를 막았다.
그리고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르 흘리며 여전히 들려오는 환청 앞에 발버둥 친다.
죄책감, 절망, 슬픔, 침울함.
몰려오기 시작하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은 강인했던 인간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끼익.
하지만 한참을 그렇게 울먹이던 헬레나는 침대에서 비틀비틀 일어났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순간 그녀를 움직이게 한 것은 마지막 책임감이었다.
터벅, 터벅.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천막 문을 열고 나가자 전전긍긍하고 있던 단원들이 헬레나 앞으로 뛰어왔다.
“헬레나 님!”
태연한 척 연기해야 한다.
헬레나는 천막에서 가져온 로브로 화상 자국을 가리며 단원들을 향해 물었다.
“······다들 야영지에 모여계시나요?”
“본진 인원은 전부 모여있습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지부들도 대부분이 후방으로 퇴각한 상태입니다.”
빠른 속도로 타올랐던 변화의 불꽃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꺼져버렸다.
하지만 이 커다란 실수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한동안 가만히 상념에 빠져있던 헬레나는 피딱지가 생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과감한 결단과 함께 명령했다.
“각 지부에 전달하세요. 최대한 많은 피난민과 함께 후방으로 집결하라고요.”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우리는 비명의 협곡으로 향합니다.”
간신들이 고용한 오크 용병단은 봉기에 가담한 도시, 마을,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목을 자르고 있다.
이미 고삐가 풀려버린 용병단 놈들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쪽으로 도망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끝은 북방 기병대 영역인 비명의 협곡.
그나마 왕국과 맞닿을 수 있는 유일한 연결로에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하, 후회하게 될 거라고?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상황이었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헬레나는 꾸짖는 하늘 아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 *
훗날 미래를 준비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기사단원 모집은 무려 계절이 하나 지나고 나서야 마무리가 되어갔다.
아무래도 인력이 셋으로 한정되어 있다 보니 검별, 시험, 합격을 전부 처리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몹시 만족스러웠다.
나는 무려 타 부대 숙련병 출신들인 수습 기사와 나이가 어린 기사 지망생들을 합해 200명 정도를 선발했다.
물론 이들 대부분이 정식 기사가 되는 과정에서 대부분 떨어져 나가겠지만, 상당히 고무적인 결과라고 볼 수가 있었다.
지금 당장은 전력이 되지 못하더라도 열의 가득한 이들은 훗날 북방 왕국을 위한 든든한 대들보다 되어줄 것이다.
한때 쓸쓸함만이 가득하던 연무장에는 기합과 함께 기사가 되고자 모인 이들의 땀과 노력으로 뜨겁게 물들었다.
하지만 북방 왕국을 아름답게 꽃 피우던 시기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다.
전쟁 후 평화가 찾아왔듯 평화 뒤에는 항상 정세를 위협하는 전쟁이 있었다.
한참 교육에 몰두하던 내가 동부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이삭이 시들고 북방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초겨울쯤이었다.
동부 정세를 꾸준히 살피던 백색 관문과 전분 세작이 보낸 보고서에는 두 눈을 의심케 하는 내용이 빼곡히 쓰여있었다.
‘소요 사태 진압.’
‘피해 규모 심각.’
동부 왕실을 좀먹는 간신 놈들이 기어코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다.
왕국 군대가 아닌 다른 주체를 끌어들여 봉기를 일으킨 자국민을 학살한 것이다.
작게는 수천 단위, 많게는 만 단위!
아무리 야만과 폭력이 지배하는 대륙이라지만, 저항하지 않는 자국 백성들을 이런 식으로 학살한 사례는 없었다.
오죽하면 보고서를 올린 세작이 오크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주제넘은 사견까지 붙여 기사왕에게 보냈겠는가.
급히 열린 국무회의에는 참담함을 감출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감정을 섣불리 표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주변을 짓눌렀다.
왕좌에서 작게 한숨을 내쉰 눈투성이가 고개 숙인 리처드를 조용히 불렀다.
“리처드 경.”
“감사합니다, 폐하, 이제 조금 진정되었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아서······.”
리처드는 내게 검술 시사를 받으며 가장 먼저 감정을 제어하는 법을 배웠다.
기사에게 있어 감정이란 적을 베기도, 나를 베기도 하는 양날의 검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점점 기사로 성장하기 시작한 리처드조차 감히 분노와 증오를 숨기기 힘든 끔찍한 사건이었다.
제때 나서준 로날드가 없었다면 녀석은 아마 곧장 관문을 뛰쳐나가 쑥대밭으로 변한 동부 왕국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나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리처드를 가볍게 위로한 뒤 대책을 위해 모인 기사왕과 동료들을 쭉 둘러보았다.
다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침묵 속에서 한동안 고민하던 눈투성이가 재상 기억하는 새를 향해 물었다.
“개입할 여지가 있나요?”
“······군대를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단순한 반발로는 안 끝날 거예요.”
백색 관문을 점령한 북방 왕국은 이제 대륙 한 축을 담당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 말인즉슨 오크와 엘프 놈들이 우리를 한 국가 단위 적국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소국 시절과는 경계 수준이 다르다.
만약 북방이 군대를 동원해 왕위 찬탈을 돕는다면 한참 내전 중인 오크 놈들은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빠르게 눈치챌 것이다.
물론 호시탐탐 북방 해안가를 노리고 있는 엘프 새끼들은 말해봐야 입이 아팠다.
생각이 복잡해진 눈투성이는 왕좌에 몸을 기대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헬레나는 너무 성급했다.
그녀가 처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많은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자라면 이래서는 안 되었다.
차라리 조금 일찍 움직여 몽상가의 고집을 꺾어두는 것이 옳았던 걸까.
나는 어두운 야영지에서 보았던 그 눈빛을 기억하며 미간을 꾹꾹 눌렀다.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자 예상대로 리처드는 얼굴이 까맣게 죽다 못해 깊은 상념에 빠져나오지 쉽사리 못하고 있었다.
아마 우리가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혼자라서 나서려 할 것이다.
녀석에게 있어 개인의 안위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받고 있을 동부 백성들이니 말이다.
나는 솔직히 물었다.
“어떠하고 싶으냐.”
그나마 리처드를 망설이게 하는 것은 그동안 쌓인 정과 여태 북방 왕국이 추구하고자 했던 동맹 재건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받아왔던 많은 도움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었던 북방 형제들.
신념과 대계, 인간관계와 주어진 운명은 끝없는 고뇌를 만드는 고리였다.
꾸욱.
솔직한 물음에 리처드는 양 주먹을 꽉 쥐며 한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이내 결심이 섰는지 나와 눈투성이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자신은 동부로 가봐야 한다.
그 사과에는 우리의 계획을 망쳤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한번 품었던 신념을 끝까지 관철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있었다.
“남자가 다 됐군.”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그 선택에 실망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도리어 회색 늑대는 흡족하게 웃으며 강인해진 리처드를 칭찬했다.
앞으로 왕이 될 자가 백성들의 죽음을 외면한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무모함과 불가능은 운명을 개척할 일이지, 거세다는 이유로 포기할 것이 아니었다.
이미 대안을 준비해두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눈투성이를 향해 또 한 번 시작될 여정을 알렸다.
“폐하, 동부로 향하고자 합니다.”
“단, 단장님?”
“고문단 파견을 명해주십시오.”
북방군이 개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북방이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부족할 여력일 뿐이지, 오크 놈들과 간신들에게는 없는 명분이 아니었으니까.
뚜벅, 뚜벅.
미리 약속되어있던 내 부탁에 방긋 웃은 눈투성이가 왕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찬 바람이 불어오던 주변 분위기는 어느새 모습을 추며 모든 신하가 고개를 숙인 엄숙함이 자리를 차지했다.
오늘부로 모든 훈련은 끝이다.
홀몸으로 북방에 도착했던 동부의 왕자는 드디어 마지막 시험을 통과했다.
창문으로 눈 부신 빛이 투영되고,
그보다 눈부신 기사왕이 입을 열었다.
“한때 북방과 동부는 인간이라는 종족 아래 하나의 동맹을 이뤘습니다. 우리는 친우이고 형제이며 오롯한 강철이었습니다.”
“북방은 위대한 선대왕의 유지를 이어갈 겁니다. 왕국은 끊어졌던 동맹을 어머니 북방 아래 감히 잇고자 합니다.”
“명하십시오, 폐하!”
“동부의 왕자여, 정통을 되찾으세요. 나와 북방은 오로지 리처드라는 이름 아래 무기를 들 것이고 오직 동부 왕 리처드만을 유일한 동맹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동부로 돌아가 잃어버린 정통을 되찾아라.
그 말인즉슨 오직 리처드만을 왕으로 인정한다는 북방 왕의 선언이었다.
눈투성이는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부복한 내게 북방과 왕을 상징하는 징표와 깃발을 넘기며 말했다.
“동부와 관련된 모든 일은 기사단장에게 일임하겠습니다. 경이 내리는 명령이 곧 내 명령이며, 경이 하는 행동이 곧 내 행동입니다.”
눈투성이는 또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무릎을 꿇은 리처드를 일으켜주며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 시선, 이 호흡.
왕과 왕으로서 마주했다.
“동부의 철은 강인하다고 들었어요. 뜨거운 열기를 이겨내고 쉴 새 없이 두드리는 망치질을 참아내야 하기 때문이죠.”
갓 태어난 철은 무르고 약하다.
하지만 다스리는 불과 불순물을 털어내는 고난과 아픔을 버텨낸다면 그 무엇보다 단단한 강철이 될 수 있었다.
“동부도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 우리는 믿어야 한다.
동부가 혼란에 빠진 이 순간이 강철로 재탄생하기 위한 역경의 과정이란 것을 말이다.
북방 왕과 동부 왕은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