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검은머리 기사왕 86화
‘왕실은 백기를 대가로 평화를 약속했습니다. 살아야 한다며, 살수만 있다면 기회는 있으리라 치욕을 속삭였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졌습니까? 아니요! 지키지 않았고 앞으로도 지켜지지 않을 겁니다!’
‘시민 동지 여러분,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치욕스러운 빵으로 하루를 연명한다면 동부의 아들과 딸들은 떳떳한 희망을 영원히 잃은 채 살아갈 겁니다!’
‘일어나십시오! 투쟁하십시오! 우리가 복종하는 노예가 아님을 놈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왕국이 들었던 백기가 검게 칠해지는 날, 해방될 때가 올 겁니다!’
“우리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압제자에게 죽음을!”
수많은 민중이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진압을 위해 투입된 병사들을 향해 돌과 쓰레기를 던지며 해방을 의미하는 혁명 노래를 목놓아 울부짖었다.
필사적으로 흔드는 수많은 검은 깃발, 하나 같이 옷에 둘러맨 검은 천.
민중들은 해산을 명령하는 진압군 앞에서도 도통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 어찌해야 합니까, 장군?”
“······하하.”
동부 까마귀라는 혁명 단체가 도시 소돔을 점령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왕실은 그들을 진압하기는커녕 확산하는 사태조차 막지 못했다.
지금도 보아라.
소돔과 꽤 멀리 떨어진 이곳 광산 도시에서까지 혁명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굶주리고 핍박받아왔던 동부 인간들은 사상이라는 달콤한 열매 앞에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급진적인 변화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눈앞에 놓인 현실이었니 말이다.
왕실에서 급히 파견된 진압군 사령관은 무거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명령을 하달했다.
“군을 뒤로 물려라.”
진압을 위해 모집한 병사들이라고 해봤자, 이 도시 출신 민병대들이 대부분이다.
앞집 건너가 이웃이고 가족인 마당에 주민들을 제대로 진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창을 거꾸로 쥐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전쟁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왕실다운 대책이었다.
“정말입니까? 분명 문책이 있을 겁니다.”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마라.”
동부 왕국을 지켜야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군에 몸을 담았는데 나이를 먹은 지금은 이제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다.
탁한 눈동자로 하늘을 올려다본 장군은 힘없이 무거운 투구를 벗었다.
무기를 내려라!
쿵, 척!
명령과 함께 거리를 막고 있던 진압군은 안심한 얼굴로 방패와 창을 내렸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가. 처음부터 모호했던 경계 앞에 민중과 진압군에 대치는 아무런 탈 없이 끝이 났다.
와아아아아- - - - -!!
민중들은 환호를 내질렀다.
그리고 거리를 검은색 깃발과 천으로 물들이며 때아닌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물론 소돔에서부터 시작된 이 흐름은 조그마한 광산 도시를 넘어 동부 전역을 검은색 깃발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북방에서 일어났던 자발적 봉기와는 너무나 다른 색이었다.
격한 흐름은 도리어 흙탕물을 만들었다.
* * *
꿀꺽.
오늘은 매번 시작을 알리던 국무회의도, 누군가 내뱉던 대책 강요도 없었다.
어둠이 깔린 자택은 어두웠고 자리에 모인 신하들은 전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침묵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모인 밀담은 허수아비 왕이라 해도 들어서는 안 되는 껄끄러운 내용이었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자택을 지키는 늙은 여우를 만나기 위해 서기도 했다.
한곳으로 향하는 간신들의 시선, 그곳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있었다.
끌끌.
“그래서 꼬리를 말고 온 게 결국 여기인가?”
북방 왕국 멸망 이후 수세에 몰린 동부 왕국은 속에서부터 썩어들어갔다.
그리고 그 시발점은 단언컨대 권력의 향기를 가장 먼저 맡은 한 여우였다.
‘전(前) 재상 그레고즈.’
한때 그레고즈는 그 누구보다 동부 왕인 빌헬름 2세를 따르고 뛰어난 능력으로 왕국을 경영했던 명재상이었다.
하지만 세상 속 그가 변한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그를 바꾼 것인지, 북방 왕국 멸망 이후 명재상은 변절했다.
심약해진 왕을 흔들어 제국에 항복한 것도 모자라, 충신들을 제거하고 찬란했던 왕실의 권위를 바닥에 처박은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달콤한 권력.
비록 호랑이 아래 여우 신세였지만, 여우에게도 나름 훌륭한 굴이 있는 법이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어르신.”
그레고즈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은퇴했다.
하지만 여전히 동부 왕국을 움직이는 권력은 놈 영향권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다.
변화는 곧 부동의 죽음이다.
동부에서 커다란 봉기가 일어난 이상 여우굴이라고 안전하란 법은 없었다.
“쯧.”
그것을 증명하듯 이죽거리며 웃던 그레고즈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물고 있던 순금 곰방대 재를 털며 자신을 찾아온 간신들을 질책했다.
“멍청한 놈들, 지키는 것조차 못하는군.”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간신들은 일단 정석대로 군 지휘관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들을 지킬 근위대 대신 푼돈으로 모은 민병대로 진압군을 꾸렸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보다 봉기가 확산하는 속도는 빨랐고 수년 만에 처음으로 소집된 민병대 수준은 심각했다.
멀쩡한 무기가 없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같은 고향 사람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미친 인간은 진압군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평화가 길었다지만, 이렇게 생각이 없어서야 어디에 쓰겠는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는 간신들을 보며 그레고즈는 결국 입을 열었다.
“사람을 보내두지.”
“방도가 있으십니까?”
그레고즈는 무심하게 웃었다.
그리고 흉측하게 늙은 주름 위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읊조렸다.
“용병단을 고용하면 되지 않겠나? 레드스킨······, 그래 그놈들이라면 아직 아귀 광산에 남아있을 테니 충분하겠어.”
자국민이 일으킨 민중 봉기에 외세나 마찬가지인 오크 용병들을 끌어들이려 한다.
왕궁 행정을 배운 관리라면 이런 대응이 망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단계라는 걸 안다.
“하, 하지만.”
아무리 쓸개를 팔아먹는 간신들 일지라도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잔혹한 용병단이 진압의 주체가 된다면 진정한 학살극이 일어날 것이다.
“왜, 설마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하지만 늙은 악귀는 기어코 동부 왕국과 함께 관으로 들어갈 생각인지 주름진 눈가를 흉측하게 찡그리며 웃었다.
“후회하기는 늦었다네. 제 손으로 구멍을 냈으면 난파선과 함께 죽을 각오를 했어야지. 다들 너무 물러터졌군.”
아무리 썩은 사과라도 혼자 먹어야 한다.
놈이 아는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 * *
시간은 노도와 같이 흘렀다.
곡식을 여물게 했던 가을 하늘에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곧 겨울이라는 계절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모든 농사를 마무리하고 월동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아릿한 초겨울.
하지만 동부 사람들은 몰려오는 추위가 무색하게 거리로 몰려나와 함께 노래했다.
“민중이여, 일어나고 또 일어나자.”
“백기가 검게 물들 때까지!”
관리들이 도망친 관청 창고를 털어 왕실이 수탈한 식량을 나눠 먹었다.
입고 있던 낡은 옷을 벗고 드디어 자신을 위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것이 자유였다, 이것이 해방이다.
사상은 빵만큼이나 배불렀고 결집한 무기는 그 어떤 무기보다 든든했다.
그렇게 겨울이 오기 전 동부 절반을 집어삼킨 동부 까마귀와 민중들은 목표로 했던 마지막 항구 소도시로 몰려들었다.
비록 도시 광장에는 파견된 진압군이 길을 막고 있었지만, 창 촉조차 없는 그들은 이미 싸울 의지가 없어 보였다.
드디어 고지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민중 사이에서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헬레나는 부관을 향해 조심히 물었다.
“북방은 어떻습니까?”
“여전합니다. 서신에는 계속 불응하고 있지만, 동부로 들어오려는 오크 군대를 계속해서 막아 내주고 있습니다.”
“후, 그나마 희소식이군요.”
북방은 서신에만 불응할 뿐이지 간접적으로는 동부 입구를 잘 막아주고 있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헬레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 봉기는 북방이 관문을 탈환하지 못했더라면 시도하지 못했을 도박이었다.
이 상황을 장기적으로 끌고 가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움이 절실했다.
북방을 계속 설득해야 한다.
얼굴이 한층 편해진 헬레나는 부관을 향해 마지막으로 명하려 했다.
“계속 서신을 보내세요. 만약 국왕이······.”
와아아아아 - - - - - -!!
하지만 그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커다란 함성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한동안 대치하던 진압군이 드디어 막았던 길을 열고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민중들은 기뻐 날뛰었다.
피 한번 흘리지 않고 쟁취한 승리는 이것이 옳은 행동이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겼다!”
“잘 가시오, 동부 형제들!”
지휘관이 드디어 결단을 내렸구나.
헬레나는 마지막 양심을 지킨 진압군 지휘관을 향해 찬사를 보냈다.
물론 그녀가 구상하고 그려낸 민중 혁명은 지금이 시작이었지만, 이런 기쁜 날 괜한 소리로 산통을 깨기 싫었다.
“하하!”
동부 왕실을 향한 증오와 분노에 찌들어 있던 헬레나는 처음으로 밝게 웃었다.
그리고 깃발을 흔들며 좋아하는 민중과 함께 손을 잡고 자유롭게 춤을 추었다.
척! 척! 척! 척!
“- - - - - - -?”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방과 자유란 항상 피를 먹고 자라는 법이었다.
기뻐하며 환호하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강철 군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펄럭!
그러자 그곳에는 어느새 진압군이 떠나간 빈자리를 채운 강철 맨앳암즈들이 붉은색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동부 인간보다 배는 큰 체구, 금방이라도 적을 쪼갤 것 같은 거대한 할버드.
투구 사이로 보이는 흉측한 얼굴은 놈들이 인간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기분 나쁜 침묵이 몰려온다.
오직 저릿하게 아려오는 목덜미만이 앞으로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를 예고했다.
“아, 아······!”
헬레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여전히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민중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도망쳐······!!”
“발사!”
퓨웅! 퓽!
푸슉! 콰직!
꺄아아아악!
에이미! 에이미 안돼에에에!
늦었다. 커다란 강철 쇠뇌가 발사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쓰러진 일가족을 시작으로 그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민중들 또한 우수수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진압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숨을 끊으려는 조준 사격이었으며 민중을 적으로 상정한 사격 대열이었다.
도, 도망쳐!
살려주세요! 엄마아아!
축제 분위기였던 항구 도시 광장은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변했다.
바닥에는 시체와 내장이 뒹굴었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목숨을 잃었다.
붉은 염료로 얼굴을 칠한 레드스킨.
아귀 광산을 빠져나온 용병단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인간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척! 척! 척! 척!
“피하셔야 합니다!”
“안, 안돼! 이거 놔! 놓으라고!”
조준 사격을 끝낸 놈들이 육중한 할버드와 함께 전진하기 시작했다.
헬레나는 아직 도망치지 못한 민중들을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필사적으로 달려든 부관에게 붙잡혀 후방으로 끌려가야 했다.
할버드 날에 머리가 터진다.
수많은 민중이 비명을 지르며 전진해오는 오크 놈들에게 학살당했다.
헬레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왕실을 저주했다.
콰직! 푹!
반항은 철저하게 짓밟혔다.
도시는 불타올랐다.
그렇게 지옥으로 변한 항구 도시에는 수천 명이 넘는 민중들이 목이 잘렸다.
그 끔찍한 소식은 매서운 겨울과 함께 동부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동시에 왕국 내실을 다지던 북방에도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