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검은머리 기사왕 85화
길었던 여름이 지나 가을이 찾아왔다.
푸른 녹음은 갈색으로 물들었고 희망과 함께 심었던 밀알은 알차게 익었다.
그동안 겪었던 고난과 아픔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어머니 북방은 우리에게 풍년이라는 결실을 이루게 해준 것이다.
물론 그 뒤에는 재상과 관리들의 치밀한 설계가 있었으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땀을 흘려 노력한 농부들이 있었다.
배급제는 자연스레 사라졌다.
한 해 세금을 제외한 모든 곡식은 백성들 품으로 공평히 돌아갔고 노동자들은 품삯으로 그들에게서 음식을 구매했다.
일한 만큼 가져간다.
이런 당연한 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왕국 주민들은 다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안정은 곧 번영의 기반이다.
되찾은 백색 관문은 단순한 지형적 이점뿐만이 아닌 이제 오크 침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회적 안정을 불러왔다.
농경지는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그런 농경지로 이사한 농부들로 인해 새로운 마을 또한 우후죽순 생겨났다.
치안이 안정되자 상업이 발전했고 이제는 사고파는 행위로 장기적 이득을 보는 상인들과 상단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태동할 조짐을 보이는 문화, 이제는 서서히 옛 모습을 되찾아가는 수도 스노우가든.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옛 왕국의 유산은 빠른 속도로 재건되고 있었다.
가장 가파르게 성장하는 시기다.
서둘러 백색 관문과 해안 요새를 재정비한 재상은 과감한 조처를 내렸다.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라.’
바로 그동안 모병하고 훈련했던 북방군 중 몸이 아프거나 제대를 원하는 이들을 가족들 품으로 돌려 보내준 것이다.
물론 그들은 예비 병력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든지 소집에 응해야 했지만,
도시와 마을로 돌아간 수많은 젊은이는 일손이 부족한 각 분야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여유가 생긴 군비를 기반으로 북방군은 꼭 필요한 재편재를 시작했다.
그동안 공적을 쌓은 병사들은 승급시키고 부대 지휘체계를 재정립하며 직업 상비군이 될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오직 전투만을 업으로 삼을 것이며 오직 북방 왕국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창과 방패를 들 것이다.
‘황금시대를 향해.’
백성을 위하는 현명한 왕, 군대를 이끄는 용맹한 장군, 왕국을 풍요롭게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는 유능한 행정가.
한때 척박함과 수탈만이 가득했던 북방 땅에 찬란한 문명의 씨앗이 심어졌다.
그 씨앗은 동토를 녹일 것이고 핍박과 압제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북방 왕국.
내가 그토록 바랬던 만인을 위한 세상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그런 세상이 오거나 말거나, 당장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사단이 기사 지망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내자마자, 전국 각지와 다양한 부대에서 지원자 수천 명이 몰려온 것이다.
셋이서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지원자를 받아야 보름이면 끝이 보일까.
나는 피곤한 얼굴로 촉이 헐어버린 깃털 펜을 바꾸며 다음 지원자를 불렀다.
“예, 예!”
백색 관문을 열고 불과 함께 산화한 기사단원들은 북방의 전설이 되었다.
덕분에 왕국 모든 이들은 기사라는 이름을 존경하고 선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이 어린 소녀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비록 눈을 마주치지는 못하지만,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작은 열기가 느껴졌다.
복장을 보아하니 농부의 딸인가.
나는 부끄러운 얼굴로 흙을 털어내는 소녀를 바라보며 체구를 측정했다.
이 정도 뼈대면 충분하다.
강인함을 타고난 북방 인간은 성별이라는 격차에 크게 구애받지 않을 것이다.
짧게 평가를 끝낸 나는 서류에 1차 합격이라는 글자를 적었고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소녀를 향해 내밀었다.
“체력 측정 날 가지고 와라.”
“네······?”
“잃어버리면 끝이니까, 꼭 가져오도록.”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날짜와 서명이 적힌 서류를 받았다.
그리고 한차례 입을 뻐끔거리더니 다음 지원자를 부르려는 나를 붙잡았다.
“합격이라고요?”
“이상 있나?”
“저, 저는 평생 검 한번 잡아본 적 없는걸요? 그래도 시험을 볼 수 있나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찔러나 본 걸까.
나는 기쁨이라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목소리를 떠는 소녀를 향해 물었다.
“그러려고 온 게 아닌가?”
“물론 당연히······!”
“그럼 된다. 체력 기준만 통과해라.”
총 3차로 이루어진 시험은 체력과 집중력만 있다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다.
어차피 기사가 될 수 없는 자들은 지망생에서 수습 기사로 올라가는 과정 중 모두 자진해서 포기하거나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내 대답에 용기를 얻은 소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원래 하찮다고 생각한 진흙 속에서 빛나는 진주를 찾는 법. 나는 그렇게 출신, 직업 상관없이 지원자들을 받았다.
똑똑.
“단장님.”
하지만 창밖을 바라보니 시간은 어느덧 황혼이었고 수련을 끝내고 온 리처드가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함을 알렸다.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벌써 30분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계세요.”
“서두르긴.”
요즘 기억력이 가물가물한지라 리처드에게 접견 일정은 전부 부탁해둔 상태였다.
보름 전 잡아두었던 접견 약속이 바로 업무로 바빴던 오늘 저녁인 모양이다.
끙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정리했다.
그리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뒤 리처드의 까칠까칠한 밤송이 머리를 헝클었다.
이제는 완전히 왕자 티를 벗고 한 명의 어엿한 기사단원이 된 리처드다.
나는 가파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 녀석의 기운을 느끼며 물었다.
“성취가 있었구나.”
“예, 단장님.”
그래도 왕실 소속이었던 만큼 리처드는 꽤 어린 시절부터 검을 배웠다.
그리고 그 기반과 재능이 이제야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는지 녀석은 최근 오러를 느끼는 초기 단계에 들어섰다.
눈투성이가 워낙 규격 외 존재여서 그렇지 리처드 정도면 정말 대단한 것이다.
나는 그 노력을 아낌없이 칭찬하며 녀석과 함께 조용한 왕실 복도를 걸었다.
터벅, 터벅, 터벅.
동부와 제국을 이어주는 무역로는 현재 우리가 파견한 흰 뿔 사슴 기병대로 인해 쑥대밭이 된 지 오래였다.
그 덕에 인간을 사고파는 노예무역은 한풀 꺾였고 간신들 배를 채워주던 상단 또한 빈털터리가 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물론 놈들은 정식으로 서한을 보내 항의했지만, 기사왕 눈투성이는 피해자인 노예들을 직접 데려와 상인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하나부터 끝까지 다 찍어냈다.
정의라는 피가 흐르는 왕이다.
서슬 퍼런 호통 앞에 동부 사절단은 찍소리도 못한 채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하지만 북방 왕국도 이런 안 좋은 관계를 쭉 이어나갈 생각은 없었다.
우리에게는 어쨌거나 정통과 적통을 타고난 왕자 리처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이 그립지 않나?”
“······가끔요.”
아무리 북방 형제를 사귀고 북방 음식을 먹는다고 하여도 녀석에는 뿌리가 있다.
바다로 나온 연어가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듯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것이다.
다만 리처드는 백색 관문 전투 이후 심경 변화를 겪었는지, 언제부턴가 동부 이야기에 망설이는 순간이 많아졌다.
한참 말없이 옆을 따라오던 리처드가 침울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만약 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쩌실 거예요? 왕께선 실망하실까요?”
“음,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역시 그렇죠······.”
“하지만 만약 그걸 원한다면 북방에 남아라. 어디에 있든 너는 우리 형제야.”
내게 있어 리처드는 동부 왕자가 아닌 전장을 함께한 단원이자 형제다.
만약 북방 기사로 쭉 남기를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녀석을 존중해줄 것이다.
“하하.”
그리고 리처드 또한 내 진심을 읽었는지 환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처음 북방에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목적을 잊은 적이 없었다.
“동부로 돌아갈 거에요. 분명 형제들도 그것을 바라고 계시겠죠.”
“그래.”
담소를 나누는 사이 갈림길에 들어섰다.
내게 공손히 인사한 리처드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커진 뒷모습과 함께 오른쪽 길로 통하는 숙소로 돌아갔다.
* * *
처음 옛 동료였던 검은 화살이 돌아왔다는 소리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공적인 관계가 컸던 다른 영웅과는 다르게 검은 화살과는 ‘친우’라는 쓸 수 있는 몇 없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분명 같이 가지 않겠다는 말에 실망하여 떠난 것으로 아는데, 검은 숲이 아닌 바다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의문보다 앞서는 반가움을 느끼며 인기척이 들리는 접견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과거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검은 화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화살!”
“아······.”
듣자 하니 추방자들과 함께 합류하여 후방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들었다.
나는 옛 영웅이자, 오랜 친우인 그녀를 향해 다가가 오른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동안 왜 소식이 없었나!”
그녀에게는 미안한 것이 많았다.
내가 북방으로 데려왔으면서도 끝까지 함께 해주지 못했으니 말이다.
나는 언제나 그래왔듯 붙잡은 오른손을 끌어당겨 그녀와 어깨를 부딪쳤다.
쿵!
“으응······.”
하지만 검은 화살은 과거 털털했던 모습과는 달리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몰차게 거절당했던 과거의 섭섭함이 아직 앙금처럼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음.”
나는 입안에 감도는 쓴 내를 삼켰다.
그리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며 대신 어깨를 탁탁 털어준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아직 부족할 것이다.
합류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더 이상 껄끄러운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주름이 늘고 머리가 하얗게 센 나와는 달리 푸릇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검은 화살.
나는 우리와는 느끼는 세월이 다를 것 같은 그녀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여전하구나. 하나도 안 변했어.”
“······너도 안 변했어.”
“하하, 검은 머리는 많이 사라졌지.”
처음 만났던 그 날로부터 벌써 손가락으로 다 세지 못할 세월이 지났다.
우리는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담소와 따뜻한 차 한잔으로 풀어내며 어색했던 분위기를 천천히 녹이기 시작했다.
“바다에 있었다고?”
“으응······. 한 7년 정도 됐어. 다들 검은 숲은 돌아가기 싫어했거든.”
“잘 생각했다. 덕분에 다시 만났으니까. 언제 한번 해안 요새로 찾아가야겠군.”
“널 만나면 좋아할 거야.”
담소가 길어질수록 딱딱하게 굳어있던 검은 화살도 예전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 또한 잠시 바쁜 업무를 잊고 하루를 즐길 수 있었다.
“폐하는 알현했나?”
“응, 오기 전에.”
“곧 있으면 연회가 있을 거다. 너도 꼭 데려오라고 했으니까, 같이 가자.”
승전 연회 때와는 달리 지방으로 흩어졌던 관리와 장군들이 전부 모인 자리다.
나는 참석할 자격이 충분한 검은 화살과 함께 접견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재회하는 옛 동료들이 전부 모일 수 있게 된 특별한 자리다.
나는 무척이나 기뻐할 눈투성이를 떠올리며 피곤이 전부 날아감을 느꼈다.
“·········저기.”
꽉.
꾸깃.
하지만 접견실 밖으로 나서려는 그 순간 등에서 작은 압박이 느껴졌다.
뒤따라 걸어오던 검은 화살이 손을 뻗어 내 옷깃을 강하게 움켜쥔 것이다.
손끝 너머로 복잡한 감정이 전해졌다.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훌쩍거림은 애써 모른척하며 침묵을 지켜주었다.
그러자 눈물을 닦은 그녀는 한동안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내게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나는 기꺼이 대답했다.
“와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