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검은머리 기사왕 84화
영원한 영광도 영원한 쇠락도 없다.
왕국이 흥하고, 망하고, 융성하고, 쇠퇴함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왕국이 변하는 모든 구분에는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쯤은 끼어있다는 것이다.
망국에는 제국을 내전으로 몰고 간 오크 황제의 죽음이 그랬고, 강철 동맹이 사라지고 남은 동부 왕국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인 흥국은 어떠할까.
분명 수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단연컨대 북방 왕국이 가장 찬란한 시기였던 황금시대의 시작은 바로 중앙 진출이었다.
‘백색 관문.’
북방으로 들어오는 모든 침공을 막아낼 수 있는 난공불락 외길이자, 강철 동맹인 동부와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
공세를 취하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진출할 수 있고, 수세를 취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막아낼 수 있는 백색 관문은 북방 왕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장소였다.
‘탈환.’
그리고 그 백색 관문이 기사왕 사후 수년 만에 드디어 그들 손에 돌아갔다.
변방의 작은 소국이었던 북방 왕국이 드디어 힘찬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 오크와 엘프는 떠올렸다.
한낱 원숭이보다 못한 인간 놈들이 태생이라는 압제에서 벗어나 군대를 학살하고 도시를 불태우던 시대를 말이다.
한참 내전이 진행 중이던 오크 제국은 이례적으로 침공을 규탄했고 침묵을 지키던 엘프 왕국 또한 새로운 기사왕을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의 축으로 명명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왕국 간 성명을 주고받을 만큼 놈들과 북방은 예의를 지키는 사이가 아니었다.
기사왕 눈투성이는 손수 벤 황금 여명의 목을 곱게 포장하여 패전은 예상치도 못했던 2황자 앞으로 배달해주었다.
콰앙!
‘폐하!’
찢겨나간 오크 제국 깃발과 흉측한 표정으로 죽어 있는 황금 여명의 목.
그날만큼은 냉철하고 품위 있던 2황자도 체통이라는 것을 지킬 수가 없었다.
졸지에 후방을 지켜주던 관문이 빼앗겨 전선이 늘어남을 물론이고 동부 왕국을 수탈하던 무역로 또한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책임을 져야 하는 자는 죽었고 협상해야 하는 상대는 불구대천 원수다.
한 번의 실수로 대업이 무너지게 된 2황자는 결국 세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심상치 않다.’
물론 그런 변화는 오크 제국뿐만이 아닌 저 멀리 떨어진 서부에까지 전해졌다.
그동안 유희를 위해 칩거하던 엘프 여왕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
‘명분만 있는 게 아니다.’
단순 소국이라 생각했던 새로운 북방 왕국이 1선급 제국 군대와 싸워 이겼다.
그것도 백색 관문을 공성해야 하는 불리한 입장마저 이겨 내었다.
‘실력을 겸비했다.’
건국한 지 불과 몇 년이 지난 소국이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한 것인가.
여태 가볍게만 생각했던 북방 왕국의 재건국은 이제는 단순한 유희가 아닌 막아내야 하는 수준까지 올라와 버렸다.
평화와 사치가 너무 길었다.
무기는 녹슬었고 전사들은 나태하다.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낀 엘프 여왕은 왕국 신관들을 불러모아 외쳤다.
‘귀족들을 설득해라.’
‘선단을 더 늘려야 한다.’
원래부터 귀족 중심 사회였던 엘프 왕국은 불멸왕 사후 그 현상이 더 극심해졌다.
그들의 협력을 받으려면 지금부터 신관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무더웠던 여름이 막바지에 걸치고 대륙의 시선은 북쪽으로 향했다.
바야흐로 그 끝을 가늠할 수가 없는 새로운 시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 *
“어찌하면 좋습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동부 왕국 신하가 당황한 기색과 함께 물었다.
하지만 마땅한 답이 없는 것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간신이 그러했다.
관문을 지키던 오크 군대가 패배했다.
졸지에 오크 제국으로 이어지던 무역로는 막혔고 2황자에게 줄을 대던 간신들은 든든한 뒷배를 잃어버렸다.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가진 것이라곤 하늘을 울리는 아부와 썩어나는 돈뿐인 간신들은 오랜만에 머리를 맞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다.
쿨럭쿨럭!
하지만 그 순간 병으로 죽어가던 동부 왕 빌헬름 2세가 거칠게 기침했다.
그리고 국무회의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신하들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사라진 왕자는 찾았는가?”
평소 쇠약하고 흐리멍덩했던 모습과는 달리 왕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모든 이들이 알다시피 왕자 리처드가 사라진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안전한 왕궁을 떠난 것인지.
자식만큼은 끔찍하게 아꼈던 빌헬름 2세는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크흠.
벌써 몇 번째 물음인지 모르겠다.
한참 자신들끼리 쑥덕거리던 신하들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고 이내 가장 거짓말이 능숙한 간신을 대표로 내세웠다.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대륙 정세가 어지러운지라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도 왕자님이시지 않습니까? 곧 돌아오실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경들만 믿겠소.”
최선을 다하고 있을 리가 없다.
허수아비 왕과는 달리 의욕적이고 동시에 위협적인 왕자 리처드와 기사 로날드를 자신들이 왜 찾아 나서야 하는가.
사실 마음 같아서는 어디서 요절해 영영 나타나 주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 속뜻을 알 리가 없었던 빌헬름 2세는 그저 끄덕이는 고개와 함께 앙상한 손목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참으로 한심한 신세다.
실권을 빼앗겨 군림하지 못한 왕이란 빛바랜 왕관보다 못한 존재였다.
이제는 한 줌 남아있던 의지마저 사라져버린 빌헬름 2세는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으며 그렇게 오늘도 현실을 외면하려 했다.
탁탁탁탁탁!
덜컹!
하지만 그 순간 한참 국무회의가 진행 중인 대실 문이 열리며 얼굴이 파랗게 질린 근위대장이 급히 왕을 찾았다.
“폐, 폐하!”
평소 오만하기로 소문난 그답지 않게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공포가 가득했다.
의문을 느낀 신하 한 명이 무례를 지적할 겸 왕 대신 그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근위대장. 아무리 경이라고 해도 국무회의 중에는······!”
“소돔이 점령당했습니다!”
급히 달려온 이유가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신하들은 할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돔이 함락되었다고? 도대체 왜?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신하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급히 되물었다.
“그게 사실이오? 아니, 북방 왕국이 동부를 공격할 이유가 도대체 뭐요!”
“북, 북방 왕국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소돔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입니다! 역도 놈들이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온 대륙을 집어삼킨 혼란은 숨죽이고 있던 누군가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비록 검성과의 협상에는 실패했지만, 지도자 헬레나는 포기하지 않고 오크라는 끈이 떨어진 소돔에서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왕실과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더러운 간신배들.
그들에게 대항한다는 것만으로 까마귀들은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기 충분했다.
웅성웅성.
간신들은 당황했다.
아직 북방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마당에 중요한 도시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동부 왕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 축적한 부와 가문과 개인 안위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국무회의가 끝이 나고 소돔에서부터 시작된 혁명은 동부를 혼란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 * *
“스승님이?!”
스승이 잠에서 깨어났다는 소리에 한참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눈투성이는 급히 채비를 갖추고 자택으로 향했다.
하지만 3일 만에 눈을 뜬 부러지는 검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승전을 축하할 연회장도 알현실도 아닌 왕궁 연무장이었다.
“- - - - - - -.”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연무장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검성.
그제야 알 수 없는 행보를 이해한 재상은 문 뒤를 서성이는 눈투성이를 만류했다.
“쉿, 폐하. 혼자 있게 해드리세요.”
“하, 하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드려야죠.”
당장이라도 스승에게 다가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몸은 괜찮은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재상의 말대로 부러지는 검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네, 알겠어요.”
눈투성이는 결국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서성이던 문가에서 벗어나 기억하는 새와 함께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나갔다.
저벅, 저벅, 저벅.
이제 주변은 아무도 없었다.
연무장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오자, 부러지는 검은 그제야 길었던 명상을 끝냈다.
피딱지로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인다.
쉬어버린 목구멍 사이로는 이제는 만나지 못할 이들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형제들.”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도를 나온 그 순간부터 이것이 마지막 출정일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다.
허나 단원들은 망설임 없이 기사도를 이행했고 오직 문을 열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적군은 향해 기꺼이 몸을 내던졌다.
그렇게 우리는 승리했다.
또 다른 계절을 찾아 돌아온 형제들은 피어날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죽었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 흉터투성이 얼굴.
젊음이 사라지자 남는 것은 짙은 후회와 언젠가는 스러질 이 이름뿐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북방 아래 영웅이 모습을 감추고 역사가 잊힐지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터벅.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빛을 따라 연무장 벽을 향해 다가갔다.
마치 우리가 꿈꿨던 찬란한 북방처럼 하얀 벽을 투영하고 있는 햇빛과 오로라.
그곳에는 인간으로 태어나, 기사로 죽어간 이름들이 빼곡하게 쓰여있었다.
그래,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기사단의 여명을 지켜봤고 이제는 기사단의 황혼을 함께하려 한다.
스윽.
나는 희미한 웃음과 함께 손을 뻗어 아직도 선명한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그리고 새겨지지 얼마 안 된 이름 앞에 마지막으로 멈춰 천천히 손을 내렸다.
같은 피가 흐르지는 않지만,
같은 피를 흘렸다.
비록 죽는 날을 달랐지만,
돌아오는 곳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제야 슬픔을 내려놨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햇볕이 기울어지는 연무장 벽을 등졌다.
“순백 밀 아래 다시 만나자.”
대답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미련 없이 연무장을 가로지른 나는 다음 세대가 찾아올 문을 조용히 닫았다.
덜컹.
“단장님.”
그러자 반가운 얼굴들이 연무장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 로날드와 동부 왕자 리처드가 떠나가는 형제들을 배웅하기 위해 찾아와주었다.
나는 하하 웃으며 물었다.
“우리 셋 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단장님 저는······.”
리처드의 얼굴은 밤새 흘린 눈물로 붓기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차마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는듯했다.
“가봐라, 다들 기다릴 거다.”
나는 연무장 문을 열고 주저하는 리처드의 등을 힘껏 밀어주었다.
분명 연무장에 모인 단원들도 귀여운 막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단, 단장님!”
하지만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은 리처드는 재빨리 문턱을 잡고 뛰쳐나왔다.
그리고 뒤돌아 걸어가는 내 등 뒤를 향해 목소리를 쥐어짜 묻는다.
“기사단은 끝입니까?”
우리 셋을 제외한 전원이 사망했다.
다른 이들이 보는 시각처럼 북방 기사단은 해체되는 것이 당연했다.
“아니.”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끊어진 것은 순간일 뿐이지, 형제들이 지켰던 명예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부러진 검은 다시 이으면 된다.
우리에게는 부러지지 않는 전통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