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검은머리 기사왕 83화
‘- - - - - - - -.’
바람이 부는 언덕이었다.
기사왕은 여전히 나를 등지고 있었고 하얀 눈이 쌓인 북방은 절경을 이뤘다.
이 기억은 언제일까.
그래, 왕은 항상 전쟁이 끝나면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고는 했다.
먼저 떠난 이들을 기리려는 건지, 아니면 항상 의문밖에 남지 않는 삶을 돌아보려는 건지, 언제나 이 언덕 이 자리였다.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백성 앞에 지엄하고 신하들 앞에 위엄 있어야 했던 기사왕은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 고뇌하는 한낱 인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기사왕과 역린을 지킬 수 있었던 그 순간이 제일 행복했었다.
이 언덕에서만큼은 무거웠던 명예도, 책임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변함없는 건 이 언덕뿐이구나.’
우리는 영원한 꿈을 꾸었다.
북방 아래 인간이 존엄하고 아름다운 문명을 꽃피울 영원불멸할 춘몽을 말이다.
하지만 투쟁이 길었던 만큼 육신은 무뎌졌고 주름은 흉터처럼 깊어졌다.
처음과 변함이 없었던 것은 오직 이 바람 부는 언덕과 이상을 향한 갈망뿐이었다.
이뤄야 할 꿈은 많은데,
시간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구나.
나는 마지막 전장을 앞둔 기사왕의 뒷모습에서 시대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가을 뒤에 찾아오는 겨울처럼, 꿈을 품는 그릇은 영원할 수가 없었다.
‘이어받을 자가 있을 것이다.’
허나, 기사왕은 슬퍼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이룰 미래를 엿보기라도 하듯 끝이 보이지 않는 나비 뒤로 사라졌다.
‘뒤는 네게 맡기마.’
채앵!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그러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손목을 적시는 축축함과 흔들리는 안장이었다.
따뜻한 감촉이다.
원인을 찾아 뻑뻑한 눈동자를 돌렸다.
푸르륵!
주인을 알아본 흰 뿔 사슴이 피가 흐르는 손목을 조용히 핥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정신을 차려 다행이라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무심히 투레질한다.
그래, 정신을 잃은 내가 안전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도망쳐 온 모양이구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만져 주자 녀석이 기분 좋게 웃는다.
푸르륵!
“후우······.”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다.
힘겹게 자세를 바로 한 나는 녀석이 물어다 주는 고삐를 쥐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었다.
나는 한참 전투가 진행 중인 전장 한가운데를 향해 재빨리 사슴을 몰았다.
다각, 다각, 다각.
채앵! 챙!
츠즈즈즈즉!
전장 한가운데에선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날카로운 오러 조각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아직 도착조차 하지 못한 내가 격한 기류와 성난 검의 흐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불처럼 타오르는 하얀 오러와 붉은 오러.
이를 악문 눈투성이는 분노한 황금 여명을 상대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죽어라! 죽어!”
황금 여명은 연신 살초를 뿌렸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반격은 고사하고 날아오는 톱날 검을 방어하기 급급했다.
아무리 경지가 가파른 눈투성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인 수련 차이가 있었다.
한때 천재라고 불렸던 황금 여명은 아이를 쉴 틈 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회색 늑대가 오면 늦는다.
나는 고삐를 쥔 상태로 바닥에 떨어진 주인 잃은 검을 빠르게 낚아챘다.
그리고 혈투가 벌어지는 전장을 향해 다시 기수를 돌려 마지막으로 쥐어짠 존재감과 투기를 당당히 드러냈다.
다각! 다각! 다각!
“스, 스승님?”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여태 냉철한 얼굴로 놈을 상대하던 눈투성이는 처음으로 당황해 외쳤다.
채앵!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본능적으로 목을 노리는 톱날 검을 피해냈다.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다.
사슴에서 내려 눈투성이 곁에 서자, 불리한 상황이 피부 너머로 전해졌다.
역시 이 방법뿐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기울어진 상황을 뒤집을 한 가지 묘수를 떠올렸다.
쒜에에에엑!
채앵!
“이이익!”
만신창이가 된 내 몸은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눈투성이는 날아오는 공격을 막으며 다급히 외쳤다.
“왜! 왜 오셨어요!”
굳건하던 이성은 깨진 지 오래다.
스승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냉철하던 눈투성이를 동요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하고 온 나는 검 끝을 떨고 있는 눈투성이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동요하지 마라. 숨을 고르게 쉬고 좁아진 시야를 정비해야 한다.”
“아······!”
“천천히 내 목소리에 집중해다오.”
채앵! 챙!
콰직! 츠즈즈즉!
황금 여명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
흰자밖에 보이지 않는 눈동자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악귀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낸 눈투성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의 최대 장점인 집중력이 내가 내뱉는 속삭임을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놈의 검은 유연하지 못하다. 정해진 자세만을 취하고 정해진 길만을 따른다. 그것이 제국 검술이 가진 가장 큰 단점이다.”
오크는 오로지 힘을 숭배한다.
모든 것을 베고 파괴할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정직한 흐름이 뻔히 보인다.
그것을 보아야 한다.
나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눈투성이가 집중할 수 있도록 입을 다물었다.
채앵! 챙!
서서히 막고 튕겨내고 막고 흘린다.
무아지경, 빨려 들어가는 무의식! 그 속에 풍덩 빠진 눈투성이는 어느덧 어설픈 자세에서 벗어나 놈의 공격을 빗겨내고 있었다.
‘그래, 그거다.’
그 누구도 아닌 검성의 제자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경지를 눈앞에 둔 눈투성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우우우우웅 - - - -.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야 한다.
나는 치열한 전장 아래 검을 공명시키며 기꺼이 눈투성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입술을 달싹인다.
“처음은 1형이다.”
바람이 불어오던 연무장, 마치 꽃처럼 내리던 눈, 생소하고 설렜던 손잡이 감촉.
처음 검을 잡았던 그날을 기억해라, 너는 작았고 큰 꿈을 꾸고 있었다.
같이 어울려 보자.
그날처럼.
사박, 사박.
사삭, 챙!
첫눈처럼 고요한 1형이 전개된다.
나란히 한 어깨와 함께 검술을 펼치기 시작한 우리는 마주 본 거울처럼 일치했고 그을린 그림자처럼 절묘했다.
휘두르고, 찌르고, 막아낸다.
1형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는 시초다.
째앵!
“- - - - - - -!!”
합격을 마주한 제국 검술이 흔들린다.
순간 당황한 황금 여명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잡고 공세를 풀어내려 했다.
하지만 대응하기엔 이미 늦었다.
내가 곁눈질로 살핀 눈투성이는 이미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5형이다.”
형(形)이 변화한다.
놈을 얼어붙게 했던 공격은 맹렬한 칼바람으로 변해 살갗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바람을 두 손으로 어찌 막으려 하느냐.
미련하게 공격을 막은 놈은 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날에 팔이 베였다.
가뜩이나 왼쪽 팔밖에 없는 황금 여명은 종횡무진 휘두르는 5형에 먹잇감이었다.
그제야 이성을 되찾은 놈이 주춤주춤 물러나며 거칠게 울부짖었다.
“검, 검에다 무슨 짓을 했지?”
황금 여명은 철저히 부정했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은 나약한 북방 검술이 아닌 사술을 부리는 검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나는 이제 제자의 흐름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눈투성이는 내가 평생을 추구하고자 했던 검술을 완벽하게 대행해 주고 있었다.
5형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채앵!
뾰족한 날이 손잡이를 뚫고 들어간다.
동시에 위로 추켜올리자 끝을 쥐고 있던 새끼손가락이 그대로 잘려 나간다.
서걱!
“끄아아아아악!”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처절하게 비명을 지른 황금 여명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기마대! 나를 도와라! 말! 말을 가져와!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아아아악!”
죽음 앞에 오만은 무너져 내린다.
한순간 전세가 뒤집힌 황금 여명은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이었던 오크 기마대마저 대부분이 전장에 묶여 있었다.
그토록 믿던 알량한 무력이 무너져 내린 순간 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쿨럭.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나는 눈투성이가 한동안 정체했던 경지를 뚫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10형.”
자세와 움직임은 알고 있다.
이제는 그 속에 담긴 원리와 힘을 이용해 적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사박.
우리는 검을 고쳐 잡았다.
싸움을 포기한 놈이 뒤늦게 도착한 기마대를 미끼로 남기고 물러나려 했지만, 우리는 굳이 안장에 오르지 않았다.
사박, 사박.
10형은 열여덟 걸음과 열여덟 합.
까다로운 구분 동작을 물 흐르듯이 이어가야 하는 어려운 경지 중 하나다.
하지만 할 수 있다.
나는 마치 물이 흐르듯 상단을 취하는 눈투성이를 보며 눈을 감았다.
다각, 다각, 다각!
“이랴! 이랴!”
“꿰뚫어 죽여라!”
황금 여명이 후퇴할 시간을 벌기 위해 투입된 오크 기마대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그 숫자와 기세는 검밖에 없는 우리가 상대하기에는 조금 벅차 보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원래 이치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스스스스.
사박.
호흡을 힘껏 들이마신다.
우리는 무언가를 준비할 겨를도 없이 발을 내디뎠고 돌격하는 기마대 사이로 한 걸음, 두 걸음, 깊숙이 들어간다.
쒜에에엑!
창대가 미간을 노린다.
말이 내뱉는 거친 투레질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충돌을 예고했다.
하지만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서걱! 사각!
히히히히힝 - - - -!!
10형은 눈사태를 보고 만들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눈투성이를 찌르려던 모든 창대는 베어졌고 거대한 전투마와 기수들 또한 살덩이가 되어 바닥에 떨어진다.
내가 100자루 검이 있어야 간신히 펼칠 수 있었던 북방 검술의 묘수를 녀석은 겨우 한 자루 검과 오러를 펼친 것이다.
그리고 검무와 같은 형을 함께한 나와 눈투성이는 어느새 마지막 합을 남겨 두었다.
목표는 당연히 얼굴이 경악과 공포로 물든 마지막 적 황금 여명이었다.
눈사태처럼 몰아쳐,
단숨에 목을 베어야 한다.
‘마지막 합.’
채앵!
상단에서 내려찍는 날카로운 공격.
황금 여명은 서둘러 오러를 뽑은 톱날 검으로 내 공격을 막아냈다.
지지직!
쨍그랑!
그 순간 내 검은 부러지며 영원할 것 같은 놈의 오러에 균열을 만들어 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내 한계다.
평생을 베고 싶어 했던 오러는 오늘도 내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부러트렸다.
하하.
하지만 나는 시원하게 웃었다.
뒤이어 날아오는 눈투성이의 검은 나약하지도 부러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서걱! 콰직!
붉은 오러가 잘렸다.
톱날 검 또한 잘렸다.
황금 여명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읊조렸고 동시에 목이 잘려 나갔다.
서걱!
툭.
전장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공간을 짓누르던 황금 여명의 오러와 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져 흩어진다.
이게 진정으로 가능한 승부였는가.
눈투성이는 그제야 눈을 뜨며 참고 있었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허억, 헉!”
끝내 베어낸 오러는 마치 나비처럼 흩어져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눈투성이의 뒷모습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기사왕을 보았다.
‘이어받을 자가 있을 것이다.’
‘뒤는 네게 맡기마.’
땡그랑!
나는 부러진 검을 놓았다.
그리고 서서히 흐려지는 시야와 함께 한 단계 성장한 눈투성이를 칭찬했다.
“훌륭하다.”
순간 몸에 힘이 빠진다.
나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눈투성이는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달려왔다.
“스, 스승님!”
호들갑 떨지 마라, 졸린 거니까.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눈투성이를 보며 후련한 웃음을 입가에 달았다.
오늘만큼은 온종일 자고 싶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 몰려오는 수마는 결국 내 눈을 감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