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한때 한 개인, 한 무장, 한 영웅이 전장을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있었다.
오러라는 규격 외 능력은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전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수록 진보하는 철기와 전쟁 기술은 오러와 검술은 물론이고 지휘 능력까지 겸비한 뛰어난 전사를 원했다.
대전사가 왜 서전트로 바뀌고 유망한 전사들이 왜 앞다투어 장군이 되고자 하겠는가.
뛰어난 개인보다 뛰어난 개인이 이끄는 집단이 훨씬 더 강한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전쟁으로 제국을 이룩한 오크들은 전쟁사라는 흐름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고,
이제는 상식이라는 선 안에서 변화는 어느새 법칙, 기준, 당연한 것이 되어갔다.
‘성벽 함락.’
‘관문 돌파.’
하지만 그 상식이 오늘 무너졌다.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개인’이 기어코 전세를 기울이게 한 것이다.
‘검성.’
전율이 이는 무위였다.
수많은 군대도, 서전트도 놈의 검을 막지 못했고 무리하게 나선 오크 장군마저 목이 잘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떤 정병과 어떤 전사를 보냈어야 검성을 막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놈이 문을 열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이것은 정해진 결과였을지도 몰랐다.
와아아아아 - - - - -!!
사슴 기병이 지나간 자리에 수많은 북방군이 물밀 듯이 밀고 들어왔다.
처음부터 수적으로 열세였던 오크 군대는 불리한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물러나지 마라! 물러나면 끝이다!”
양측 군대는 성안 공터에서 격돌하며 서로가 뒤엉킨 혼란스러운 난전을 만들었다.
더군다나 하늘에서 내린 비는 바닥을 진흙밭으로 만들었고 기병이 쉽사리 진입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제는 정말 힘과 힘의 싸움이다.
사기가 꺾인 병사들을 독려한 오크 장군들은 난전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단 황금 여명이 이끄는 기마대는 후방을 노리는 적 기병대를 추격하기 위해 잠시 전장에서 이탈한 상태다.
그렇다 보니 성안 공터에는 오직 아군과 적의 보병대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오크 군세가 미미하게 밀리는 추세였다.
내성으로 퇴각해야 하나?
아니, 그 용도가 퇴색된 지 오래인 장소라 그 어떠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지금은 결국 적 기병대와 교전 중인 황금 여명과 기마대를 믿고 성안 공터에서 결사 항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대열을 유지하라, 방진을 구성하라!
젊은 오크 장군들은 서서히 전의를 되찾아가는 정예 오크들을 결속하려 했다.
와아아아아 - - - -!
채앵! 챙!
하지만 놈들이 여전히 간과한 것이 있었다.
저물어가는 영웅의 시대에 아직 살아있는 또 다른 낭만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쾅! 콰지지직!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두르던 서전트 하나가 갑옷과 함께 반으로 갈라진다.
잘려 나간 단면 뒤로는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는 거대한 검이 있었다.
츠즈즈즉!
단순히 베는 것이 아닌 오러로 불태우고 힘으로 짓누르는 파괴적인 위력.
전장으로 뛰어든 회색 늑대는 한 마리 상처 입은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허스칼! 적을 섬멸하라!”
“형제들의 원한을 갚아주어라!”
기사단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회색 늑대는 피눈물을 흘렸고 그들이 남기고 간 명예를 지키고자 몸소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진입을 막아라!”
“동시에 찔러!”
관문을 지키는 오크 군대는 북방 식민지와는 차원이 다른 정예병이다.
한순간 당황도 잠시 강철 갑주로 무장한 놈들은 날카로운 장창으로 진영을 만들었다.
콰직! 쾅!
하지만 회색 늑대는 날이 피부를 베고 창이 살을 파고드는 것을 무시하며 오직 전진, 전진, 그리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불사한 이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맨손으로 창대를 잡고 이빨로 목을 물어뜯는 광기 앞에 놈들은 차갑게 질렸다.
“어?”
그리고 그 폭발하는 무력은 촘촘하던 방진에 한순간 빈틈을 만들고 말았다.
반응하기에는 늦었다.
이미 그 빈틈에는 눈이 돌아간 북방군이 꾸역꾸역 몸을 욱여넣고 있었다.
‘이겨야 한다.’
공성전에 참가한 북방군 전원이 성벽에서 벌어졌던 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검도, 결코 가볍지 않았던 죽음도, 끝내 휘날렸던 기사단의 깃발도.
오늘은 이런 평범한 운명이라도 걸지 않는다면 순백 밀 위에 누울 자격이 없었다.
큰 꿈을 꾸는 건 죄가 아니다.
자신들의 왕이 입버릇처럼 해왔던 창대한 이상은 기어코 한가지 기적을 불러왔다.
콰직!
‘뚫렸다.’
오크 방진이 무너져 내린다.
맞부딪히는 전력과 기세에서 패배한 오크 병사들은 뙤약볕 아래 눈덩이처럼 속수무책으로 줄어 들어갔다.
지원이 오지 않는 이상 미래는 뻔했다.
오크 장군은 결국 높게 들었던 검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퇴로 없는 전장에 뛰어들었다.
* * *
‘약자를 위해 싸워라.’
‘기사도를 지켜라.’
참으로 지겨운 말이었다.
기사라는 자들이 지키는 기사도는 뻔하고 나약하며 쓰잘머리 없었다.
왜 빼앗으면 안 되는가?
왜 죽이지 말아야 하는가?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는 것은 자연이 정한 태초의 섭리이며 규칙이었다.
평생을 가축으로 살아온 인간이 그것을 증명했다. 결국에는 죽어버린 기사왕은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 미련한 이들이 벌레처럼 기어 나와 운명을 거스르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가르쳐줘야 한다.
한때 스승이라 불렀던 남자가 틀렸고 운명에 순응한 자신이 옳다는 것을 말이다.
서걱!
황금 여명은 톱날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창을 들이밀던 인간 기병 하나가 상반신이 찢겨 죽는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능숙하게 전투마를 몬 황금 여명은 마치 바다를 활보하는 상어처럼 적이 보이는 족족 톱날과 오러로 물어뜯었다.
살인에서 오는 원초적인 기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에선 그 어떠한 쾌락보다 진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이런 걸 원했다.
꿈을 좇는 멍청이들이 정말 꿈임을 깨닫게 해주는 이 감각이 너무나 그리웠다.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린 황금 여명은 아군이 적과 교전을 벌이든 말든 종횡무진 말을 몰며 북방 기병대를 학살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움직임은 오크 기마대가 우위를 가져가는 데 일조했고 전세는 조금씩 밀려 나가고 있었다.
성문을 열면 무엇을 하겠는가.
가장 중요한 기마전에서 패배하면 보병이 진입한 의미가 사라진다.
하지만 북방 기병대가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최후의 결전, 이곳으로 급히 달려오는 한 남자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 - - - - - -!!”
목덜미가 아릿해진다.
동물 같은 감각으로 위험을 감지한 황금 여명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수년간 원수로 여겼던 옛 스승이 앞을 가로막는 오크 기병을 학살하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역시나 올 줄 알았다.
이제는 백발이 된 검은 머리와 저 뚜렷한 눈동자는 여전히 가증스럽다.
황급 여명은 재빨리 고삐를 당겨 다가오는 옛 스승을 향해 말을 몰았다.
물론 첫인사는 악수가 아닌 역겨운 살점이 엉겨 붙은 특제 톱날 검이었다.
후웅!
챙!
사각에서 들어오는 완벽한 공격이다.
하지만 부러지는 검은 검날을 가볍게 튕겨내며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묘한 대치와 함께 침묵이 이어진다.
치열한 전장 한가운데 다시 만난 옛 스승과 제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 침묵도 잠시 황금 여명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며 이죽거렸다.
스승이 여기까지 들고 온 기사단의 깃발이 참으로 우스워 보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뭘 기리겠다고 들고 오셨습니까? 어차피 죽으면 다 같은 고깃덩이인데,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유난이십니다.”
모욕적인 언사다.
기사단이 전멸한 것을 알고 있는 황금 여명은 굳이 고인을 들먹이며 임무를 위해 죽어간 북방 기사단을 조롱하려 했다.
푹!
하지만 검성은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펄럭이는 기사단의 깃발을 꽂았다.
그 행위는 한때 오욕으로 물들었던 백색 관문을 되찾았다는 뚜렷한 증거였다.
“지켜보라고 들고 왔다.”
놈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절대 뚫리지 않을 거라 장담했던 백색 관문이 누구 손에 떨어졌는지.
부러지는 검은 이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뽑았던 검을 여명에게 겨누었다.
그 검 끝에는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던 망설임마저 전부 떨어져 나간 뒤였다.
끄그극.
황금 여명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지치고 다쳐 멀쩡한 곳이 없는 주제에 기어코 무리한 선택을 한다.
또 이것이 그 잘난 기사도이며 신념이라는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황금 여명은 마찬가지로 검을 겨누며 옛 스승을 향해 거친 오러를 발산했다.
“입 닥쳐!”
츠즈즈즈즈즉!
후웅, 채앵! 챙!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잘려 나간 오른손을 왼손으로 바꾸고, 놈이 가르친 검술을 궁극적으로 변형하는 데까지 정말 쓸개를 씹는 심정으로 버텨왔다.
그리고 그 노력은 성취를 배신하지 않았는지 자신이 휘두르는 톱날 검은 피를 흘리는 부러지는 검을 연신 몰아붙였다.
챙! 서걱.
채앵! 챙!
톱날 검은 스치기만 해도 중상이다.
뾰족한 톱날을 따라 형성되는 오러는 부러지는 검에게 치명적인 내상을 입혔다.
챙! 까강!
공격하고 막고, 공격하고 또 막고.
감히 다른 이들이 접근할 수 없는 살벌한 전투가 전장 한복판에서 이뤄졌다.
오그마르와 동급 아니면 그 이상이다.
그런 오러 사용자를 상대로 지치고 다친 몸은 치명적인 제약이 되었다.
주르륵.
검성이 밀려나기 시작한다.
휘두르던 검은 이미 이가 나갔고 입과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으아아아아 - - - -!!”
하지만 황금 여명은 도리어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해 고함을 내질렀다.
분명 자신이 몰아붙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물 흐르듯 가볍다, 빗겨내며 버텨낸다.
과거, 옛 스승이 그토록 강조했던 경지 위 검술이 자신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만약 부러지는 검이 다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올 수가 있었을까.
가슴을 당연하다고 외치면서도 이성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고산처럼 보이지 않던 스승의 어깨는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 - - - - -!!”
황금 여명은 결국 감춰놨던 수를 꺼냈다.
그나마 남아있던 과거의 가르침을 전부 잊은 채 2황자 밑에서 배웠던 오크 황제의 검술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콰앙!
챙! 푸르륵!
그동안 인내하고 있던 악의와 분노가 지금 이 순간 폭발하기 시작했다.
황금 여명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항상 그런 눈이었지! 혼자 착한 척, 혼자 고고한 척! 도대체 뭐가 잘났다고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지?!”
가히 파괴적인 위력이다.
황금 여명이 펼친 검술은 부러지는 검을 금세 몰아붙여 안장 위 자세와 거칠어진 호흡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역시 네가 틀린 게 맞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약해빠진 선함이 아닌 대척점을 찍는 파괴뿐이다.
황금 여명은 겨우 잡아낸 승리를 직감했는지, 이죽거리는 웃음과 함께 검을 들어 올려 마지막 오러를 뿜어내었다.
꼭 이 말을 하고 싶었다.
평생 실패하며 산 퇴물에게 말이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끝까지 고집만 부렸지. 기사도? 북방? 모두 허상이다. 네놈은 세월을 낭비했을 뿐이야.”
철저하게 부정해주마.
부정당한 인생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 아래 그렇게 절망을 느끼며 죽어라.
“평생을 그러고 산 대가가 무엇이냐.”
쨍그랑!
그래, 끝내 마지막 검마저 부러졌구나.
황금 여명은 검이 부러져버린 옛 스승을 비웃으며 마지막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뭐를 이뤘지?”
대답은 듣지 않겠다.
황금 여명은 끝내 검을 내려찍었다.
깡!
파르르르르 - - - - -!!
하지만 목을 향해 날아든 검은 채 닿기도 전, 한 백색 오러 앞에 막혔다.
작으면서도 크고 유연하면서도 단단함을 내포하고 있는 강인한 오러.
채앵!
하얀 바람을 타고 질주해온 눈투성이는 톱날 검을 거침없이 튕겨냈다.
그리고 한낱 이방인이 평생을 바쳐 이룩한 업적을 새하얀 검 끝에 담는다.
“긍지.”
눈투성이는 검을 휘둘렀다.
“포기하지 않았던 자의 신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