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형제들이 목숨을 던져가며 후방을 교란한 것도, 북방군이 무모한 공성을 감행한 것도 모두 이 한 시위 화살을 위해서였다.
끼기기긱.
나는 화살이 걸린 시위를 힘껏 당겼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촉을 조준한 뒤 검은 기름이 끓고 있는 강철 솥을 쐈다.
퓽!
콰아앙 - - - -!!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폭발이 오른쪽 성벽을 집어삼켰다.
화염은 하늘 위까지 솟구쳤고 터져나간 검은 기름은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끄아아아아악!
살, 살려줘! 살려줘어어!!
오크 놈들이 비명의 왈츠를 춘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타오르는 살은 그 어떤 고통보다 끔찍한 것이었다.
나는 잠시 상념에 빠져 오크 놈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불의 화신과 마주했다.
놈들이 자랑하는 불과 기름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 채 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단장님! 놈들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상념도 잠시뿐이었다.
뒤늦게 우리의 정체를 알아챈 오크 놈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저 멀리 말발굽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다각! 다각! 다각!
오크 기마대가 분명하다.
나는 서둘러 화살을 내려놓은 뒤 후미를 지키고 있던 단원을 향해 달려갔다.
“서두르세요!”
나는 빠르게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성벽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쪽문을 통과한 뒤 몸에 묻은 뜨거운 불똥과 잿가루들을 빠르게 털어냈다.
“고맙다.”
“아닙니다, 빨리 올라가시죠.”
가장 위험했던 고비를 넘겼다.
놈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강철 쪽문을 걸어 잠근 나는 단원과 함께 가파른 돌계단을 통해 관문 성벽 위로 올라갔다.
채앵, 챙!
그러자 먼저 도착한 단원들이 벌써 오크 놈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숨 가쁘게 뛰어온 끝에 오크와 북방군이 격돌 중인 성벽에 도착한 것이다.
와아아아아 - - - -!
미친 듯이 화살을 쏘고 있는 오크 궁수들과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북방군들.
겨우 열 명 남짓한 우리의 존재감은 호수 한가운데 떨어진 물방울보다 못했다.
“기사단! 목표는 성탑이다!”
이제야 전장에 온 기분이다.
나는 커다란 외침과 함께 돌격을 시작했고 제각기 싸우고 있던 단원들 또한 그 뒤를 따라 성탑을 향해 달려갔다.
“뭐, 뭐야! 어느 쪽이 뚫린 거야!”
“서전트! 이쪽입니다!”
온몸이 피와 땀투성이다.
탈진과 함께 몰려오는 피로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단원들은 성벽 위 오크 놈들을 차근차근 베어 죽이며 내가 나아갈 길을 만들어주었다.
서걱! 콰직!
크아아악!
성벽 위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격돌 상황 중 난입한 나와 단원들로 인해 수성에서 우위를 점하던 오크 놈들 진영에 커다란 혼란을 불러온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여파는 자연스럽게 빈틈을 만들어냈고 드디어 성벽 위로 올라오는 북방군들이 속출했다.
“막, 막아!”
둑에 뚫린 구멍은 점점 커진다.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떡갈나무 보병 뒤로 정예인 허스칼 부대마저 난입하자 그 구멍은 더 이상 메꿀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
물론 그런 난전 속에서도 내 시선을 오로지 오른쪽 성탑에 고정되어 있었다.
산을 오르기 결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가 노려왔던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땡그랑!
나는 이가 나간 검을 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오크 검을 주운 다음 격전이 펼쳐지는 성벽 한가운데를 달렸다.
놈들을 전부 밀어내면 늦는다.
북방군이 성벽 한쪽을 점거한 이 기세를 타, 성탑까지 곧바로 노린다.
“단장님을 호위해라!”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 - - !!!”
내 생각을 읽은 단원들은 마지막까지 분전을 펼치며 오크 놈들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성탑과 가까워질수록 나를 따라오는 기사들의 숫자는 줄어들었고 정신을 차릴 때쯤 어느덧 성탑 앞에는 나 혼자였다.
허억, 헉.
숨이 한없이 거칠다.
주인을 알 수 없는 핏물로 인해 파르르 떨리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몇 명을 베었지? 어디까지 걸어왔나.
나는 뿌옇게 변한 시야를 고정하고자 핏물이 흥건한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그러자 내 주변은 어느새 사방을 포위한 오크 놈들과 함께 강철 걸쇠로 굳게 닫힌 성탑 입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뒤늦게 눈치챈 황금 여명이 이미 장군 여럿과 서전트 다수를 보내 진입로를 막은 것이다.
“궁수부대!”
끼기기긱.
흉흉한 기세를 뿜어낸 장군 하나가 손을 들자 궁수부대가 시위를 당겼다.
방어를 아예 원천 봉쇄하려는지 사각에서는 석궁을 든 놈들까지 보인다.
“- - - - - - -.”
나는 날숨을 아꼈다.
그리고 피로 범벅이 된 검을 들어 올려 언제나 그렇듯 나아갈 준비를 했다.
포기할 생각이었다면 일어나지도 않았다.
나는 죽어간 형제들을 기리며 굳게 닫힌 성탑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발사!”
퓨웅, 퓽!
슈슈슈슉 - - - !!
‘다 못 막는다.’
날아오는 화살은 직사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등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살을 주고.’
나는 온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평생을 쳐왔던 설움의 검무를 가속하고, 가속하고, 또 가속했다.
스걱! 서걱! 피잉!
검날이 화살의 경로를 바꾼다.
검 끝이 날아오는 화살을 쪼갠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단 한 순간 펼친 나는 등에 날아오는 화살을 무시했다.
푸슉! 푹!
화살이 갑옷을 뚫고 들어온다. 뿌연 시야와 함께 붉은색 피가 세상을 물들인다.
하지만 나는 비명을 지르는 신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발을 디뎠다.
죽음의 두려움을 마주해라.
내가 몸을 날린 곳은 오크 장군과 서전트가 모인 밀집 진형 한가운데였다.
“무, 무슨!”
‘뼈를 취한다.’
서걱! 두둥실.
모든 정수를 실은 한 합을 내지른다.
그리고 그 한 합은 급히 응집 오러를 전개하려는 오크 장군의 목을 베었다.
종이 한 장이 들어갈 좁은 틈으로 검날을 집어넣는 신기와 같은 검술.
베어진 놈의 머리는 경악이라는 마지막 감정과 함께 하늘 위로 떠 올랐다.
‘20형.’
핏물이 새겨진 하늘이 보인다.
진형 한가운데 착지한 나는 두 눈을 감았고 세상은 거짓말처럼 멈춘다.
‘한 발자국 더.’
모든 무위에는 경지가 있다.
그것이 오러든, 검술이든 무기를 든 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달콤한 과실이다.
물론 나 또한 그랬다.
오로지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경지를 쫓아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리고 숱한 죽음을 밟고, 북방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려는 지금, 예상치 못한 균열이 나를 옭아매고 있던 족쇄를 부쉈다.
위로 자라지 못하는 나무가 뿌리를 넓혔다.
나는 담담한 마음으로 새로운 경지인 21번째 형을 손아귀에 쥐었다.
무거웠던 검의 무게가 사라졌다.
나는 이미 그려졌던 먹의 경로를 따라 짙은 선을 남길 검을 휘둘렀다.
후웅! 서걱!
후웅! 츠즈즈즉.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창, 검, 고함, 성가신 모든 적이 한낱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지금, 이 순간 오러는 내 약점이 아닌 그저 거추장스러운 연장선이었다.
주변에 산재하던 모든 오러가 내가 휘두른 사선 뒤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털썩.
주르르륵.
눈을 뜨고 날이 나간 검을 놓았다.
그리고 버릇처럼 또 다른 검을 쥐자, 숨 막히는 적막이 성벽 위에 찾아왔다.
꿀꺽.
화살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적군도 아군도 21번째 형이 만들어낸 여파 앞에 잠시 전쟁을 멈추고 넋을 놓았다.
하지만 내 눈동자는 성취감과 기쁨이 아닌 지독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형제들의 죽음으로 찾은 또 다른 경지는 내게 있어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서걱!
쿵!
검을 들어 성탑 문을 잘라냈다.
안을 지키던 오크 놈들은 알아서 도망쳤고 나는 계속해서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전쟁이란 원래 허무함이다.
뒤에서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만이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검성······.”
터벅, 터벅, 터벅.
성탑 내부는 기억 속 그대로였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내려간 나는 제어장치를 지키는 최후의 초병을 가볍게 베어 죽인 뒤 검을 집어넣었다.
끼릭.
손잡이를 잡고 힘을 준다.
그러자 상처 부위가 벌어지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모든 신경은 쓰라린 고통보다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집중되고 있었다.
쿠르르르릉!
백색 관문이 드디어 열렸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거대한 함성과 함께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뿌우우우우우- - - -!!
두두두두두두두!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이 우렁찬 뿔피리 소리와 대지를 가로지르는 발굽을.
제어장치를 고정해 둔 나는 피로 젖은 문을 열고 성탑 1층으로 나갔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그러자 마침 성문을 통과한 흰 뿔 사슴 기병대가 본진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물론 자랑스러운 북방 깃발 아래 검을 든 기사왕 눈투성이와 함께 말이다.
“부러지는 검!”
“······회색 늑대.”
그리고 뒤이어 진입하는 북방군 옆으로 익숙한 얼굴이 빠르게 다가왔다.
이제는 원수 갑옷이 꽤 어울리게 된 회색 늑대가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상처가 중하다!”
“좀 긁혔다. 물 좀 있나?”
이 정도면 하루 이틀 쉬면 낫는다.
나는 호들갑 떠는 늑대에게서 물이 담긴 가죽 수통을 뺏어 열었다.
주르륵.
머리 위로 물을 뿌리자 덕지덕지 붙은 핏물과 살점들이 씻겨 내려갔다.
그리고 남은 갈증마저 모두 해소하자 흐릿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는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회색 늑대에게 적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주었다.
“적 지휘관이 누군지 알았다.”
“누구지? 휘하 장군 중 하나인가?”
“아니, 황금 여명이다. 놈이 살아있어.”
늑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직접 오러를 가르쳤던 기억이 있는 만큼 놈이 어떤 녀석인지 잘 알고 있는 거다.
결국, 개처럼 죽더니, 개처럼 살아남아 오크 놈들 밑으로 들어간 것인가.
회색 늑대는 얼굴을 악귀처럼 찡그리며 관문 내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난공불락이었던 백색 관문이 열린 이상 놈과의 결전은 이미 예정된 운명이다.
나는 대기하고 있던 허스칼에게 기사단 깃발을 받은 뒤 안장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깜짝 놀란 늑대가 나를 만류했다.
“내가 가겠다, 부러지는 검. 넌 여기 남아서 뒤따라오는 본대를 이끌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회색 늑대를 보내 놈의 숨통을 끊는 게 맞았다.
하지만 나는 단원들과 함께 시작한 임무를 이 손으로 직접 끝내고 싶었다.
“내 형제들과 약속했다.”
“······검성!”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해.”
더 이상 만류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기수를 돌려 흰 뿔 사슴 기병대를 이끈 눈투성이를 따라갔다.
다각! 다각! 다각!
쏴아아아아 - - - - !!
짙어진 먹구름과 함께 비가 내린다.
백색 관문을 붉게 물들였던 핏물은 굵어지는 빗줄기와 함께 쓸려나간다.
세상은 오늘 전쟁을 잊을 것이다.
덧없게 피고 덧없게 졌던 수많은 계절처럼 이 생생했던 현장은 전부 사라진다.
하지만 형제들아, 역사 속 활자로 남을 수 있다면 내가 반드시 증명하겠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살았는지.
너희들이 어떤 명예를 위해 싸웠는지, 무엇을 베기 위해 검을 휘둘렀는지!
죽음을 불사했던 북방 기사단은
그 누구보다 용맹했노라고 말이다.
콰르르르릉 - - - - -!!
벼락이 먹구름 사이로 내려친다.
그러자 저 지휘탑 너머로 황금 여명이 이끄는 중기마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펄럭!
나는 기사단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홀로 백색 관문을 가로지르며 역사가 될 전장에 잊지 못할 점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