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검은머리 기사왕 79화
기지 분위기가 급변했다.
마치 둑이 뚫린 급류 같은 흐름은 후방에 침입한 1조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허억, 헉!
리처드는 눈앞이 흐려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폐부와 머리는 한 줄기 산소를 계속해서 갈구한다.
붉은 피로 흠뻑 젖은 어두운 세상.
들리는 것이라고는 단원들의 고함과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거친 숨결뿐이었다.
서걱-!
끄아아악!
추격, 후퇴, 추격, 후퇴.
오크라는 개미들은 굴을 파고들어 온 이방인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단원들은 좁은 골목을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놈들을 뿌리쳐야 했고 동시에 창고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야 했다.
어디가 북쪽이고, 어디가 표적인가.
모든 여력을 다해 오러를 뽑은 기사들은 피로 물든 하늘 아래 계속 분전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불리한 상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결속을 느슨하게 만들었고 대열 뒤에선 낙오되는 단원들이 속출했다.
퓨웅!
“크으악!”
오크와 혈투를 벌이던 한 수습 단원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못해 넘어진다.
피격 부위는 하필 오른쪽 허벅지.
깜짝 놀란 리처드는 넘어진 단원 구하기 위해 황급히 손을 뻗으려 했다.
“안, 안돼······!”
하지만 절뚝절뚝 자리에서 일어난 단원은 리처드의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뒤에서 맹렬히 추격해 오는 오크 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 - -!!!”
눈동자에 귀기가 어린다.
이미 죽을 각오를 다진 그는 다른 단원들에게 짐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를 태우고 적을 태우는 불꽃.
맹렬히 검을 휘두른 기사는 목이 잘리는 그 순간까지 적과 함께 산화했다.
리처드는 넋이 나갔다.
위대한 승리가 무엇을 대가로 만들어진 것인지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버려서면서까지 자신은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걸까.
숨이 턱하고 막힌 리처드는 순간 모든 것을 전부 내려놓고 싶었다.
“정신 차려!”
“아, 아······!”
“당장 움직이라고!”
하지만 로날드가 풀린 멱을 잡았다.
그리고 평생 처음 들어 보는 거친 욕설과 함께 차가웠던 뺨을 후려친다.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질긴 목숨은 아직 심장에 붙어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검성과 기사왕은 후방에 불이 타오르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노력을 헛되게 하지 마라.
순간 정신이 번쩍 돌아온 리처드는 이를 악물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었다.
손잡이에는 피와 흙이 흥건했다.
날은 핏물을 너무 많이 머금어 검인지, 몽둥이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휘둘렀다.
베고 또 찌르고, 죽이고 죽고,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단원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화르르륵!
“불, 불이다!”
“불을 꺼!”
그리고 수평선에 찾아온 여명이 짙어질 무렵 기지 곳곳에서 화마가 솟아올랐다.
기름과 발화 장치를 설치해둔 창고 여덟 곳에서 동시에 불이 붙은 것이다.
화르륵!
맹렬하게 불어오는 새벽바람을 타고 그 몸집을 불려 나가기 시작한 화마.
오크 놈들은 침입자를 추격하다 말고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건 어머니 북방이 주신 마지막 기회다.
마침 표적인 창고는 멀지 않은 지척에 있었고 가방 속 기름도 아직 넉넉하다.
이미 온몸이 피로 젖은 거친 귀리는 함께 죽음을 결의한 단원을 바라봤다.
그리고 기름 가방과 검을 제외한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최후의 오러를 쥐어짰다.
거친 귀리가 입을 열었다.
“길을 뚫겠다.”
츠즈즈즉!
동시에 기사들이 오러를 뿜는다.
푸르게 타오른 오러는 하늘을 밝히는 여명처럼 주변을 환하게 비췄다.
“기사단! 돌격하라!”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거친 귀리를 필두로 한 단원들이 커다란 고함을 내지르며 돌격을 감행했다.
동시에 오크 놈들은 피와 살점이 분리되었고 촘촘한 포위진은 찢겨나갔다.
서걱!
까드득, 콰직!
죽음을 각오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오러는 방패 채로 오크를 자른다.
그 빈자리는 합을 맞춘 다른 기사가 물어뜯어 전우가 지나갈 길을 만든다.
“인간 기사다!”
“겨우 소규모 부대다! 이 무슨 추태냐?!”
검이 부러지면 적의 검을 뺏는다.
그 검마저 부러지면 눈알을 파낸다.
정예 전사들조차 기가 질린 기사들의 분전은 드디어 창고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덜컹!
더 이상 명령은 필요 없었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은 리처드는 들고 온 가방에서 마지막 기름병을 꺼냈다.
그리고 기름을 흠뻑 먹인 천에 붙을 붙인 뒤 창고 안으로 망설임 없이 던졌다.
쨍그랑! 쨍그랑!
화르륵!
봄 동안 잘 건조해둔 식량이다.
동부의 피와 눈물이 서린 밀알과 염장 고기들은 불과 만나 신나게 타올랐다.
화르르륵!
불이 옮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커다란 창고는 검은색 연기로 범벅이 되었고 화마는 커다란 몸짓을 일으킨다.
시체와 타오르는 불, 수라와 지옥도다.
졸지에 모든 보급 기지가 불타버린 오크들은 허망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 허무함은 이내 사태를 벌린 인간 놈들을 향한 분노로 바뀌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묵직한 말발굽 소리는 그들의 최후를 예고하는 듯했다.
“서전트가 오셨다!”
“크아아아아 - - - !!”
거대한 창을 들고 다가오는 중기병들과 오러를 뿜어내며 다가오는 오크 서전트.
기세가 오른 오크 놈들은 거센 함성과 함께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기사들은 불을 등지고 서로를 바라본다.
20명으로 시작한 전투는 이제 피로 젖은 10명만이 겨우 남아있었다.
갑작스러운 변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어진 임무는 완벽히 수행했다.
죽음이라는 암흑이 경각에 달한 순간, 거친 귀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아마 마지막 보급 창고를 포기하고 도망쳤다면 반절은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부하들을 향해 죽으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후회하는 자가 여기 있는가?
거친 귀리를 따라 웃은 단원들은 부러진 검에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담았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모조리 죽여라!”
“돌격! 돌격하라!”
살려서 보낼 수 없다.
기사들을 포위한 오크 방진이 열리고 거대한 창을 앞세운 중기마대가 돌격해왔다.
두두두두두두두 - - -!
겨우 10명이 막기에는 너무나 많은 숫자.
기사단은 해일처럼 몰려오는 검은색 무리와 정면충돌을 앞두고 있었다.
“- - - - - - -!!”
그 순간 거친 귀리는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는 오러를 내뿜었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창고 기둥을 베어 건물을 완전히 무너트려 버렸다.
츠즈즈즈즉!
화르륵! 쿵!
파스스스스 - - -!
무너지기 직전이던 창고 건물이다.
거기에 기둥을 자르는 행위까지 더해지자, 거대한 창고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마치 비처럼 떨어지는 불똥들과 날아오는 화염 파편에 깜짝 놀라는 전투마들.
단원들은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오크 기수들을 낙마시켰다.
털썩
히히히힝!
역시 그냥은 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고함을 내지른 리처드는 단원들과 함께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려 했다.
“- - - - - - -?”
하지만 걸음은 어느샌가 멈췄다.
어둠을 먹고 일어난 여명이 완전히 떠오른 때, 모든 세상을 등진 단원들은 마치 작별을 고하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제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나요.
리처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퍽!
목덜미에 강한 충격이 전해온다.
리처드는 하얗게 물드는 시야를 마지막으로 굳게 쥐고 있던 검을 놓았다.
털썩!
“로날드 경!”
거친 귀리는 적에게서 뺏은 전투마의 엉덩이를 강하게 내리쳐 뒤쪽으로 보냈다.
동시에 로날드는 달려온 말 고삐를 낚아챘고 자신이 기절시킨 리처드를 태웠다.
“가시오!”
화마와 연기로 아비규환인 상황이다.
거친 귀리와 단원들은 그대로 적에게 돌격해 말이 빠져나갈 틈을 만들어주었다.
다각! 다각! 다각!
로날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피와 함께 흘러내리는 눈물을 삼키며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완전히 떠오른 새벽녘과 함께 검을 높이 든 북방 기사들이 있었다.
거친 귀리의 마지막 외침이 불타오르는 영광 한가운데 울려 퍼졌다.
“우리를 기억해주시오, 동부의 기사여! 오늘 우리가 무엇을 위해 죽는지!”
* * *
뚝.
주르륵.
무언가가 끊겨 나간 기분과 함께 코에서 나온 코피가 인중 사이로 흘러내렸다.
물론 뛰어가느라 바쁜 나는 대수롭지 않게 코피를 닦고 주변을 살폈다.
1조가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다.
그 덕에 관문을 수비하는 병력 중 일부분이 후방으로 급히 파견되었고 하늘에는 붉은 화마와 함께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둥! 둥! 둥! 둥!
척! 척! 척! 척!
관문 밖에서 전쟁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수도에서 출정한 북방군 본대가 우리가 보낸 신호를 확인하자마자, 본격적인 공성전을 위해 진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공성전은 어디까지나 눈속임이다.
눈투성이는 내가 당부한 대로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것이다.
화공에 성공한 오늘이 고비, 후방에 일어난 혼란이 진정되고 날이 바뀌기 전 우리는 반드시 굳게 닫힌 백색 관문을 열어야 했다.
두둥! 두둥! 두둥!
와아아아아 - - - -!!
거센 함성이 가까워진다.
진격을 시작한 북방군의 움직임이 진동하는 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하늘 위로 보이는 불안한 먹구름.
관문 바로 위 서전트가 볼트를 장전한 오크 궁수를 향해 발사 명령을 내렸다.
“발사!”
퓨우우웅!
화살이 발사된 지금이다.
모든 시선이 북방군에 집중된 순간 나는 걸리적거리는 로브를 벗어던졌다.
그러자 단원들 또한 로브를 벗어던지며 내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깨를 짓눌러오던 중압감은 벗어던진 로브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스르릉!
최대한 빨리 성문에 도착해야 한다.
재빨리 검을 뽑은 나는 바삐 궤짝을 옮기고 있던 오크 놈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서걱!
여기에 어떻게 인간이 들어왔는가.
오크 병사는 깜짝 놀라 고함을 외치려 했지만, 오러를 뿜어내며 달려드는 기사들 앞에 입을 뻥긋하기 전 목이 잘린다.
“커억!”
후웅, 콰직!
파죽지세, 그나마 적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초병들은 사전에 차단된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보급으로 바쁜 성곽 그림자에 숨어 은밀히 나아갔다.
“- - - - - - -!”
그리고 성곽을 끼고 달린 지 5분, 나와 단원들은 드디어 성탑과 정문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인간?”
“크르륵!”
하지만 성탑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을 우리만 이용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이미 길 한가운데에는 중무장한 오크 전사들이 정문을 향해 행군하고 있었다.
머릿수가 얼마나 많은지 우회할 수 있는 틈조차 보이지 않는구나.
나는 별다른 동요 없이 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놈들을 향해 뛰어갔다.
이 순간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불리한 상황도, 수세도,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이 박동 아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가벼운 동부의 검을 한 자루 더 뽑아 두 개가 된 검을 손아귀에서 돌렸다.
후웅.
처음 북방 검술을 배우는 수련생 대부분이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바로 형(形)마다 붙은 명칭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북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조화를 담은 철학이 담겨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검술은 검무가 아니듯 내가 평생을 수련한 이 행위는 한가지 목적만이 담겨있었다.
바로 적의 확실한 죽음.
사냥감을 물어뜯는 송곳니처럼, 맹수를 들이박는 사슴의 뿔처럼 오직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만들어진 수단이었다.
후웅!
발을 뻗어 바닥을 디딘다.
순간 중력을 잃는 몸은 공간을 갈라 창을 들이민 놈들을 향해 쏟아진다.
하지만 창날은 나를 꿰뚫지 못했다.
서걱!
스걱!
오른쪽 검을 움직여 창대를 베어낸다, 수십 개 창대가 두둥실 떠오른다.
왼쪽 검을 움직여 오크의 목을 벤다, 두 가닥 핏물과 함께 목이 떠오른다.
뒤이어 내 뒤를 따라온 기사들이 뚫린 방진 사이로 오러 가닥을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