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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76화 (76/181)

76화

검은머리 기사왕 76화

혼혈의 삶은 외로웠다.

날 때부터 부모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평생을 도망치며 살았고 태생이 저주받았다는 이유로 차별과 배척을 받아야 했다.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비참한 삶.

세상을 미워하게 된 검은 화살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추방자들을 모아 아무도 오지 못하는 깊은 숲에 숨어들었다.

그 숲은 엘프도, 인간도, 오크도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하는 추방자들의 성이자 고통받는 혼혈을 위한 마지막 성지였다.

하지만 평생을 숨어 살 것만 같은 그들에게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왔다.

바로 우연히 숲 근처를 지나가던 검은 머리 종자가 물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가.

증오로 가득 찬 검은 화살과 추방자들은 숲으로 들어온 이방인을 향해 화살을 발사하고 오러가 섞인 검을 휘둘렀다.

‘무모한 짓을 멈춰라.’

물론 추방자 중 검은 머리 종자를 이길 수 있었던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러조차 흘려버리는 아름다운 검술은 그들이 생전 처음 보는 신묘함이었다.

검은 화살을 포함해 덤벼드는 모든 추방자를 제압하고 얌전히 검을 집어넣은 종자.

그는 목을 자르는 대신 이토록 세상을 증오하게 된 이유를 물어봐 주었다.

‘어찌 그리 삶을 비관하는가.’

‘세상이 나를 미워하니까.’

그리고 왕의 종자, 대륙의 이방인, 자신을 부러지는 검이라 소개한 검은 머리 남자는 추방자들을 위한 길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세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라.’

같은 피가 섞여서가 아닌 같은 피를 흘렸기에 진정한 형제라 말한 남자.

그는 넋을 놓은 추방자들을 자신이 모시는 검은 머리 기사왕 앞으로 데려갔다.

‘함께하자.’

그렇게 같은 깃발 아래 모였다.

부러지는 검은 가족을 만들어주었고, 또 친구를 만들어주었으며 어깨를 맞대고 싸울 수 있는 진정한 동료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행복은 영원하지 않았다.

기사왕이 죽고 평생을 함께하리라 생각했던 이들이 하나둘 떠나간 것이다.

북방 왕국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부러지는 검은 승산이 없는 싸움을 끝까지 계속했고 그를 위해 활을 잡았었던 검은 화살은 무모함을 지켜만 볼 수 없었다.

‘나랑 함께 떠나자, 응?’

아무도 모르는 숲으로 돌아가면 오크도, 엘프도, 같은 인간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부러지는 검이 정말로 살기 원했던 검은 화살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하지만 부러지는 검은 끝내 거절했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신으로 착각한 검은 화살은 그렇게 북방 왕국을 떠났다.

끝까지 부정하고자 했던 그리움 속에서 서서히 지쳐만 가던 그녀.

아직 ‘그’가 살아있다는 작은 계기는 떠났던 철새를 돌아오게 만들기 충분했다.

덜컹.

한동안 상륙을 망설이던 검은 화살은 굳은 각오와 함께 쪽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회색 늑대를 향해 다가갔다.

사박, 사박, 사박.

“검은 화살.”

“안, 안녕.”

기사왕 아래서 복역하던 시절 털털한 성격이 괜찮아 꽤 친하게 지냈던 녀석이다.

하지만 세월이라는 간극은 그 깊었던 친분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회색 늑대는 말했다.

“돌아왔구나.”

“······너도 돌아왔네.”

서로 왕국을 떠났던 마당에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저 오랜만에 만나는 친우와 고향이 반가울 뿐이었다.

“일단 들어가지, 정리해야 할 것도 있고.”

“응.”

어색한 시간은 잠깐이었다.

금세 어색함을 거둬낸 둘은 한참 전후 처리로 바쁜 해안가를 걸으며 수년 동안 나누지 못했던 해우를 조용히 풀었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도대체 북방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른 영웅과 퇴역병이 그랬던 것처럼 정말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저기 있잖아······.”

“음?”

하지만 그 순간 늑대 뒤를 잘 따라오던 검은 화살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뭐 마려운 똥개처럼 애꿎은 손가락만을 만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 이걸 말해주지 않았구나.

회색 늑대는 웃음을 터트렸다.

“검성은 잘 있다.”

자는 시간 빼고는 부러지는 검을 껌딱지처럼 따라다녔던 검은 화살이다.

아마 북방으로 돌아온 이유도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 녀석 덕이 컸을 것이다.

“······물어본 적 없는데.”

“그러시겠지.”

민망해 죽을 것 같다.

고개를 숙인 그녀는 변명했지만, 회색 늑대는 양쪽 어깨를 으쓱이며 걸었다.

그나저나 먼 동부에서 잘 지내고 있으려나.

이제 만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회색 늑대는 힘껏 모래사장을 밟았다.

“결혼은 했대?”

“·········.”

* * *

푸헹취!

킁.

“요즘 재채기가 잦으시네요.”

“······그럴 리가 없는데.”

중요한 순간인데 재채기가 나오고 말았다.

몰려오는 민망함에 머쓱 웃은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다시 자세를 숙였다.

그러자 여전히 을씨년스러운 협곡 풍경이 어둠 너머로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시간은 늦은 밤, 장소는 협곡 길이 내려다보이는 짙은 풀숲이었다.

일단 오늘 정각, 부지런히 마차를 이끈 우리는 야영지 단원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조건 구해오겠다는 포부와는 다르게 가장 중요한 무기를 구매하지 못했다.

잠입할 수 있는 여건과 계획이 모두 마련되어 있는데 겨우 검 한 자루를 구하지 못해 임무를 속행할 수가 없다니.

기사단을 이끌 책임이 있는 내 입장에는 참으로 답답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남은 것은 최후의 수단뿐이었다.

우리는 어느새 동부 출신 꾀주머니가 된 로날드의 지혜를 빌릴 수밖에 없었다.

‘으음······.’

로날드는 한동안 고민했다.

여태 난항을 겪었던 무기 문제는 그리 쉽게 풀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뜩이는 영감은 우연히 찾아온다고, 지나가는 상단 마차를 발견한 로날드는 탄성과 함께 해답을 내놓았다.

‘노예 상단을 텁시다.’

동부에서 가장 크게 성행하는 상단 대부분은 다름이 아닌 노예 거래 상단이다.

그만큼 수요가 많기도 했고 동부 왕국에는 널린 게 노예였으니 말이다.

‘놈들이 밤에 다니는 길을 압니다.’

언젠가는 씨를 말려야 할 놈들이다.

다만 오늘은 미리 상단 하나쯤은 본보기를 보여주어도 손색이 없는 날이었다.

물론 상단 호위병이 가지고 있을 무기는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노획이었다.

“쉿, 온다.”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푸르륵!

로날드의 기억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듯 기사단이 매복한 길 앞으로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차는 총 5대, 돈을 얼마나 처발랐는지 허름한 우리 마차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뿌옇게 뜬 횃불 사이에서 철창이 달린 마차를 발견한 나는 빠르게 수신호를 보냈다.

“- - - - - -.”

노예 상단임이 분명하다.

내가 보낸 수신호에 기사단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오러로 열심히 때려 부숴놓았던 커다란 나무를 힘껏 밀었다.

푸스스, 쿵!

히히힝 - - !

자고로 매복의 꽃은 정면과 퇴로 차단이다.

무너진 나무는 그대로 앞과 뒤를 막았고 말들은 깜짝 놀라 투레질을 한다.

불안함을 암시하며 일렁이는 횃불.

상단을 호위하던 경호원들은 재빨리 석궁과 무기를 꺼내 사방을 겨누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 병기인 기사단이 주변을 포위한 지 오래였다.

거친 휘파람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우락부락한 단원들이 튀어나왔다.

삐이이이이이익- - - !

“습격이다!”

“젠장, 쏴버려!”

나는 짧은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풀숲에서 빠져나와 망설임 없이 상단 마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퓽!

기다렸다는 듯 볼트 한 발이 날아온다.

나는 그대로 몸을 젖히며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볼트를 한 손으로 낚아챈다.

와, 이게 된다고?

석궁을 쏜 당사자만큼이나 놀란 나는 들고 있던 볼트를 주인에게 되돌려주었다.

퓨슉!

“컥, 커억!”

호위병들의 표정이 하얗게 변한다.

내가 우연히 보여준 말도 안 되는 움직임과 단원들의 무력을 확인한 것이다.

습격이 제대로 통했다.

단검을 빠르게 고쳐 쥔 나는 방패를 들어 올리는 호위병 하나를 걷어찬 뒤 그대로 관자놀이를 찍어 기절시켰다.

히히힝!

끄아악!

내가 상대한 건 두 놈이 끝이었다.

무력한 노예나 다뤄본 호위병들이 북방 기사들을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몇 번의 고함은 함께 현장은 금세 정리가 되었고 협곡을 따라가는 길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메아리치던 비명을 집어삼켰다.

몸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나는 뻐근한 몸을 풀며 말했다.

“포박해.”

최대한 살생은 줄이라 명해뒀었다.

노예 거래를 악독한 짓을 하는 놈들이기는 하지만, 혹시 모를 무고한 이가 있을지 모르기에 저항하지 않으면 살려뒀다.

그리고 그 명령을 잊지 않은 단원들은 저항하지 않는 인원들은 기절시킨 뒤 두꺼운 밧줄로 꽁꽁 묶어두었다.

“음.”

소규모 상단은 아닌지 마차가 꽤 크다.

나는 커다란 잠금장치가 달린 노예용 마차를 하나둘 둘러보며 한 40명쯤 돼버리는 동부 출신 노예들을 확인했다.

“히익!”

“아, 아아······.”

철장 틈으로는 겁에 질린 동부 인간 노예들이 부들부들 온몸을 떨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포박 작업을 끝낸 단원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다들 풀어줘.”

까앙!

끼기긱!

잠금장치가 부서지고 마차 문이 열렸다.

하지만 겁에 질린 노예들은 도망칠 생각은커녕 연신 단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마차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평생을 짓눌린 굴복과 나약함이 동부인을 뼛속까지 노예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나는 로날드와 리처드를 불러 이들을 어찌해야 할지 의논해 볼 생각이었다.

보따리는 주지 못하더라도 삶을 송두리째 바꾼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착잡한 심정을 애써 감추며 다른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상단 대열 후미에서 돼지 멱 따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트린 거친 귀리가 나를 불렀다.

“단장님,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단원들 분위기가 이상하다.

의아함을 느낀 나는 누군가 고함을 내지르고 있는 뒤쪽을 향해 다가갔다.

“정, 정신 나간 새끼들······! 내가 누군지 알아? 이 상단 주인이 누구인지 아냐고!”

그러자 문이 열려있는 한 짐 마차와 함께 후덕한 상인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 - - - - -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짐 마차 안에는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어린 노예들이 마치 짐짝처럼 실려 있었다.

자상을 보아 아킬레스건과 목을 자른 것이 분명한데, 왜 망자에 대한 예의 없이 짐짝처럼 가지고 다니는 것일까.

순간 인지 부조화가 온 내 옆으로 로날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그의 눈가는 이미 지독한 슬픔과 부끄러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오크들이 취급하는 상품입니다.”

“인육이군. 왜 다 어리지?”

“······연한 고기가 잘 팔립니다.”

그래, 도축한 고기라 이거군.

오크 놈들이 별미로 취급하는 인간 고기를 무려 같은 인간이 제공하고 있었다.

“이, 이 개새끼야 - - - -!!”

흥분한 채 단원들에게 붙들려 있던 리처드가 노예 상인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미친 듯이 내려찍으며 비명과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컥, 커억!”

설마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설마 이 정도로 썩고 문드러져 역겨운 구역질을 유발할 줄은 몰랐다.

리처드는 한 마리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많이 뒤늦은 후회와 분노를 쏟아부었다.

“말려라.”

“단장님.”

너무 흥분했다, 나는 리처드를 말리라 지시한 뒤 차가운 눈으로 팔짱을 꼈다.

그러자 로날드와 단원들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놈을 향한 무자비를 요구했다.

다들 오해한 모양이다.

나는 정정을 위해 한마디 말을 보탰다.

“우리 식으로 처형한다.”

매번 적을 도발하거나 농담하려는 용도로 생가죽을 벗겨 전쟁 북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즐겨 하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북방의 유구한 전통을 정말 한번 보여 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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