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검은머리 기사왕 75화
현 오크 제국의 가장 큰 문제점은 호랑이가 개를 낳은 것이 아닌 하필 ‘같은’ 호랑이도 여럿을 낳았다는 것이다.
황제의 자질이 없는 첫 번째 아들과는 다르게 각자 출중한 능력으로 두각을 발휘하고 있는 다른 형제, 자매들.
특히 제국 동쪽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2황자 그리그만은 다음 황제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가진 자식 중 하나였다.
특히 그는 비범한 능력을 지닌 인재라면 오크, 엘프, 인간 구분할 것 없이 전부 부하나 부족원으로 두기 유명했는데,
그 안목과 인품이 어찌나 뛰어난지 그리그만의 부하들은 종족이라는 구분을 버리고 진정한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지금도 보아라.
다양한 종족과 출신의 부족원들이 한자리에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 하나 함부로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들의 눈은 오직 한 자리로 향했다.
바로, 강철로 만든 왕좌에 앉아 서신을 읽고 있는 그리그만을 향해 말이다.
“조짐이 분명하군.”
“맞습니다, 영민하신 폐하.”
그리그만은 북방 왕국이 다시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경계를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감히 존엄한 황제이자 존경하는 아버지를 죽인 인간 종족의 가능성은 어릴 때부터 일상처럼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계심은 북방 왕국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을 대륙 그 누구보다 빨리 감지하는 정도까지 올라섰다.
‘출정 준비 중.’
‘규모는 총동원령 급.’
북방 왕국이 거대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출정 목적인 당연히 자신이 소유한 백색 관문의 완벽한 탈환일 것이다.
“그리고 무모하다.”
하지만 2황자는 내전과 전쟁을 동시에 치러야 하는 상황임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백색 관문은 수천 명, 수만 명이 몰려와도 뚫을 수 없는 난공불락이었다.
“흠.”
그리그만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딱 막는 왕좌에 앉아 고개 숙인 부하들을 바라봤다.
자신이 죽으라 명령하면 지옥 불구덩이에도 뛰어 들어갈 충성스러운 부하들.
한동안 말을 아끼던 그리그만은 그중 가장 신뢰하는 부하 하나를 불렀다.
“황금 여명.”
“······예, 폐하.”
호명과 함께 한 남자가 일어났다.
그리그만이 가장 신뢰하는 부하는 오크가 아닌 인간이었고 심지어 북방의 이름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북방인이었다.
황금 여명, 얼마나 오만한 이름인가.
하지만 그에게 이런 거창한 이름이 붙은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듣자 하니 검성이 아직 살아있다더군. 생각해보니 너에게는 희소식이 아닌가?”
“이미 잊은 이름입니다.”
“하하, 그래도 스승이었는데.”
북방 검성의 첫 번째 제자이자, 기사왕의 후계 후보 중 하나였던 황금 여명.
뛰어난 실력과 타고난 오러 재능을 지닌 놈은 기사왕과 가장 가깝다는 평을 들었던 부러지는 검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오만한 심성과 차가운 심장은 폭군의 씨앗을 보였고 끝내 인간을 변절하여 쫓아온 검성과 검을 맞대야 했다.
황금 여명은 일그러진 웃음을 감추며 얼굴 중앙을 양단한 끔찍한 흉터를 어루만졌다.
자신을 향해 살초를 날렸던 옛 스승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끌끌 웃던 2황자 그리그만이 왕좌에서 일어났다.
능력, 동기, 목적, 그 어떤 것도 모자라지 않는 황금 여명은 이번 일에 적임자였다.
“기회를 주겠다.”
“명하십시오, 폐하!”
“군단 하나를 줄 테니, 백색 관문을 사수해라. 검성의 목이면 보답으로 충분하겠지.”
명을 받듭니다, 폐하!
황금 여명은 왕좌 앞에 무릎을 꿇었고 다른 부하들 또한 한목소리로 대답하며 위대한 그리그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크 제국이여 영원 하라.
아무리 분단된 영광이라 할지라도 하나 된 빛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회색 늑대는 오늘 아침 수도에서 출발한 서신을 읽으며 피식 웃었다.
글에는 온갖 격식과 미사여구가 즐비했지만, 왕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았다.
‘목숨이 우선, 알죠?’
패색이 짙으면 망설이지 말고 도망쳐라.
도대체 어떤 왕이 제 영토를 대가로 병사들의 안위를 보존하려 하겠는가.
참 눈투성이답다는 생각이 든 회색 늑대는 기분 좋게 웃으며 서신을 접었다.
그의 개인 서랍에는 눈투성이가 보낸 서신 전부가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달칵.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작은 영지는 어느새 북방 왕국이 되었고 작은 소녀는 기사왕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원수가 된 회색 늑대는 여전히 왕국의 재건이 실감 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불어오는 바닷바람만이 이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말해줄 뿐이었다.
마침 오전 순찰 시간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회색 늑대는 무기를 챙긴 뒤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끼이이익.
터벅, 터벅, 터벅.
요새 분위기는 오랜만에 차분했다.
한동안 엘프 선박이 나타나지 않아 주둔군 전원에게 휴식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놈들도 슬슬 소규모 정찰대로는 지금이 한계라는 걸 알기 시작했나.
어제 오후를 기점으로 북방 해안가에는 더 이상 선박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제 돌아갈 시기가 된 모양이다.
마침 밤새 근무를 서던 부장이 다가왔다.
“경, 좋은 아침입니다.”
“수고했다. 보고할 건?”
“3조 애들이 술 먹다 들킨 것 말고는 이상 없습니다. 곰보 녀석 생일이었다는군요.”
“흐흐, 병영 청소나 시켜.”
힘든 외지 생활에 이런 소소한 행복마저 없으면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회색 늑대는 가벼운 처벌만 내리라 당부한 뒤 부장과 함께 해안 요새를 걸었다.
“슬슬 돌아가 봐야겠다.”
“다른 분이 부임하십니까?”
“부장 셋이서 열심히 해봐. 이제 슬슬 퇴역 딱지는 떼야 하지 않겠어.”
경력과 실력은 차고 넘친다.
조금 모자라다 평가받던 지휘, 전술 이론도 많이 가르쳐 두었으니 어디 가서 무능한 지휘관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회색 늑대는 얼떨떨해하는 부장의 등을 팡팡 쳐준 뒤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정식 부임 명령이 내려오기 전 인계를 전부 끝내버릴 생각이다.
“경!”
하지만 그 순간 뒤따라와야 할 부장이 깜짝 놀란 얼굴로 회색 늑대를 불렀다.
우연히 바라본 해안에 여명을 등진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회색 늑대.
서둘러 난간 앞으로 뛰어가 해안을 바라보자, 커다란 엘프 선박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귀쟁이 새끼들이 정말 작정을 한 모양이다.
평소보다 배는 많은 선박 숫자 앞에 회색 늑대는 난간을 그대로 뛰어넘었다.
“대기조 깨워!”
“어디 가십니까!”
“쟤들 죽게 내버려 둘 거야?”
요새와 이어지는 해안 초소에는 배정된 초병들이 벌써 방어 준비를 끝냈다.
하지만 예상보다 엘프 선박의 숫자가 많았고 그 속도 또한 빨랐다.
요새에서 지원이 출발하면 늦는다.
회색 늑대는 온몸의 오러를 폭발시키며 초소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렸다.
끼기긱!
방패 들어!
기본 수백 년씩 활을 수련하는 놈들이다.
선박 위에서 시위를 당긴 엘프 궁수들은 초병을 향해 날카로운 촉을 조준했다.
떡갈나무 방패가 막아줄 것이다.
초병들은 서둘러 방진을 구성했고 이내 자신과 전우의 몸을 보호하려 했다.
퓽!
쒜에에엑!
콰직!
하지만 튼튼한 떡갈나무 방패는 대기를 가른 날카로운 화살 한 발에 박살이 났다.
방패를 모자라 갑옷마저 관통한 화살, 경악한 초병 한 명이 처절하게 외쳤다.
“엘븐 가드다!”
인간 기사와 오크 서전트와 같은 맥락으로 불리면서도 오러 경지가 가히 수십 년은 차이 나는 엘프 왕국의 엘븐 가드.
자기 키보다 큰 세계수 활을 제 몸처럼 다루는 엘븐 가드들은 가히 전장의 악몽이라 부르기 모자람이 없었다.
겨우 화살 하나로 방진 한쪽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 공격이 끝이 아니라는 듯 엘븐 가드가 발사한 오러 화살이 방진을 향해 직사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콰직! 쾅!
커억!
엘븐 가드만 무려 다섯이다.
아무리 노련한 방진 보병이라 해도 그 압도적인 화력 앞에 녹아내린다.
일제 사격 두 번으로 초병 절반이 죽은 것을 확인한 회색 늑대는 분노가 가득 담긴 고함을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콰앙!
죽어가는 초병 앞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오러가 깃든 대검을 힘껏 휘두르자 수많은 화살은 물론 오러 화살까지 전부 힘을 잃고 허공에서 소멸한다.
가히 압도적인 오러와 위용.
등장만으로 공격을 저지한 회색 늑대는 피를 흘리는 초병들을 향해 외쳤다.
“후방으로 빠져라!”
오러 사용자와의 싸움은 대부분 누가 더 많은 사상자를 내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 점을 잘 아는 회색 늑대는 부하들이 후퇴할 틈을 만들어주었다.
채앵!
치지지직!
콰앙!
치치치치직!
화살이 초병을 노리고 날아온다.
하지만 마치 사냥감을 잡는 맹수처럼 날뛴 회색 늑대는 단 한발의 화살도 지나갈 수 없도록 사방에 오러를 뿌렸다.
대기가 부르르 떨린다.
모래알이 오러를 따라 폭풍우 친다.
“덤벼라 - - - -!!!”
그 누가 내 앞에 검을 뽑으리오.
왕국 최고의 허스칼은 커다란 선박과 엘프 놈들을 향해 대검을 겨눴다.
꿀꺽.
개인이 전장의 승패를 바꾼다.
열심히 시위를 당기던 엘프들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들고 있던 활을 내렸다.
분명 우리가 공격하는 처지인데 왜 선박 안에 있는 게 더 안전하다 느껴질까.
미간을 찡그린 엘븐 가드는 몰려오는 북방군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화력을 이용한 기습이 실패했다.
지금 괜히 상륙해봤자, 저 괴물한테 목이 잘리거나 고립될 게 뻔하다.
“뱃머리를 돌려라.”
이번 작전을 고안한 대장 격 엘븐 가드는 모든 선박을 향해 후퇴 명령을 내렸다.
아쉽지만, 거슬리는 초병들을 전부 죽인 것에 만족하고 돌아갈 생각이다.
“이런 시발!”
“덤벼, 이 개새끼들아!”
뒤늦게 도착한 북방군은 모래사장에서 비참히 죽어간 전우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도망치는 엘프 선박을 향해 처절한 고함을 내질렀다.
적을 요격할 수단이 없어 죽어간 전우의 복수조차 해주지 못한 북방군들.
회색 늑대 또한 분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거칠게 대검을 내팽개쳤다.
“으음.”
꼴이 꼭 꽥꽥거리는 원숭이 같지 않은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대장 격 엘븐 가드는 마치 들으라는 듯 말했다.
“꼭 자라다 만 원숭이 같군.”
킥킥.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 종족 혐오다.
엘프 병사들은 잠시 엄격한 군율을 잊고 옆 사람과 함께 저들을 비웃었다.
“근처 무인도에 정박한다. 물자를 재보급하고 다시 해안으로······.”
쒜에에에에에엑 - - -!
콰직!
“어······?”
하지만 웃음을 거기서 끝이었다.
뇌수가 튄 고개를 들어 올린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아하게 웃던 엘븐 가드의 머리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파르르르······!
잔상처럼 남은 오러 궤적과 돛대에 꽂혀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검은색 화살.
엘프 병사들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철썩!
엘프 양식이 미묘하게 섞인 한 쾌속선이 이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쾌속선 정면에는 한 하프 엘프가 기다란 무언가를 시위에 걸고 있었다.
발리스타?
아니, 커다란 화살이다.
쒜에에에엑!
콰아앙 - - -!
검은 오러가 잔상과 함께 날아온다.
직사로 뻗은 화살은 그대로 엘프 병사 둘을 관통한 뒤 덜렁거리던 돛대를 파괴했다.
도대체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엘프 병사들은 선박을 향해 날아오는 수많은 갈고리를 보며 경악했다.
“전부 죽여.”
검은 화살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무언으로 복창한 추방자들은 날카로운 외날 검을 번뜩이며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