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검은머리 기사왕 74화
추적을 따돌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경비 얼굴을 이쁘게 다듬어준 우리는 그대로 자리에서 벗어나 화물과 식량이 적재된 마차를 가지고 도망쳤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위장 상단의 문양을 새기고 깃발을 꽂은 뒤 한참 혼란으로 쑥대밭이 된 도시 소돔을 빠져나왔다.
조금만 늦었어도 도시 안에 갇힐뻔했다.
나는 온갖 민폐를 저지르고 간 그 범인 놈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동부 까마귀, 도대체 무슨 집단이길래 이런 대책 없는 혼란을 야기하는가.
내가 건넨 종이를 한참 살피던 로날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비슷한 단체도 없었나?”
“있었다면 제가 먼저 알았을 겁니다.”
발이 넓은 로날드가 처음 듣는 정도면 발족한 지 얼마 안 된 신생 단체거나, 정말 소돔에서만 활동하는 소규모 조직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귀한 종이를 사용할 만큼 자본력이 있었고 선동문 내용 또한 고등교육을 받기라도 한 듯 고상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나는 영향권 밖 변수를 그냥 넘겨야 할지 아니면 짚고 넘어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자 마차 짐칸에서 한참 종이를 뒤적거리던 리처드가 내게 물었다.
“경, 내용은 괜찮지 않습니까? 저희랑 추구하는 바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뜻만 같다.”
“예?”
“그들이 원하는 건 민중을 주체로 한 변혁이지, 왕실의 변화가 아니야.”
내가 선동문이 적힌 이 종이를 위험한 폭탄이라고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은 불합리한 상황 속 불만은 물론이고 현 체제에 대한 부정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장담컨대, 이 개념에 조금만 더 다양한 계몽과 사상이 깃든다면 대륙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이르고 생소하며 왕실과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대륙 위 모든 종족이 경계하고 적대할 형태가 말이다.
“······어렵군요.”
내 대답에 한참을 고민하던 리처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너무나 옳기에 그만큼 위험하다, 어린 왕자가 온전히 이해하기엔 어려운 내용이었다.
이쯤 왔으면 됐다.
나는 뒤따라오는 마차를 향해 외쳤다.
“정지! 여기서 휴식한다!”
소돔에 일어난 사태 때문에 따뜻한 수프 한 그릇 먹이지 못하고 도망만 쳤다.
나는 협곡으로 완전히 진입하기 전 기사단을 향해 반나절 휴식을 명령했다.
웅성웅성.
덜컹!
순식간에 마차를 중심으로 한 야영지가 건설되었고 불 위에 커다란 냄비가 걸렸다.
그러자 팔을 걷어붙인 로날드가 궂은일을 도맡고자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솜씨 한번 발휘해보죠. 자고로 동부에선 동부 음식을 먹어야죠.”
“오,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습한 기후 탓에 향신료가 많이 발달했습니다. 이건 박하라고 하는 건데······.”
그사이 남아있던 어색함도 전부 사라졌다.
나는 이제 격 없이 어울리는 동부인과 북방인을 바라보다 이내 품속에 소중히 품어 두었던 두루마기를 꺼내 들었다.
현지 적응은 충분히 끝났다.
이제 한동안 미뤄두고 있던 정보를 갱신하고 작전을 구체화할 때다.
[백색 관문.]
[상세한 내부구조.]
듣기로는 뒤쪽 전진 기지가 많이 사라졌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백색 관문의 내부구조는 그렇게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
다만 동부 왕국의 물자를 쪽쪽 빨아오는 주둥이답게 관문 뒤쪽으로는 보급 거점 하나가 마치 도시처럼 확장된 게 보였다.
남쪽을 막기 위해 설계된 관문이 이제 북쪽을 막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보급 기지를 내부에서 외부로 옮긴 것이다.
혼란을 일으키기 딱 좋은 구조다.
만약 불이라도 지른다면 관문을 지탱하는 보급품은 물론이고 대기 중인 수비 병력까지 전부 불구덩이에 처박을 수 있었다.
나는 쓸만한 무기를 구하는 시간, 행군하는 시간까지 전부 고려해 북방군의 행군과 동시에 맞물릴 시기를 그려보기 시작했다.
사박.
“- - - - - -?”
하지만 그 순간 잠자코 앉아있던 내 신경 사이로 무언가 알 수 없는 게 잡혔다.
기사단원이 아닌 누군가가 임시로 건설한 야영지에 접근해온 것이다.
노상강도인가? 걸음이 제법 은밀하다.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자, 한참 웃고 떠들던 기사단 또한 행동을 멈추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풀벌레 소리가 거짓말처럼 멈춘다.
오직 타닥타닥 불똥 튀기는 소리만이 침묵의 무게를 덜어주고 있었다.
1초, 2초, 3초, 이어지는 대치.
나는 결국 단검을 뽑아 들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놈들을 향해 다가가려 했다.
사박, 사박, 사박.
하지만 내가 공격 명령을 내리기 직전, 어두운 수풀에서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절묘하게 무기를 숨긴 놈들은 한 여성을 필두로 한 정체불명의 집단이었다.
선두에 선 여성이 입을 열었다.
“······피부가 다 저리네요. 분명 멀리 있었는데 목이 잘리는 줄 알았어요.”
“누구냐.”
“진정하시고 검을 거두세요, 기사님. 위협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니까요.”
“무기나 제대로 감추고 그런 소리를 하지. 진짜 목을 잘라주기 전에 말해라.”
바다처럼 푸른 눈,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금발 머리, 전사처럼 탄탄한 체구.
흐릿한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성은 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름이 궁금하신가요? 동부 왕국에선 헬레나라고 불리고 있어요.”
참으로 특이한 조합이다.
동부인처럼 입고 꾸몄지만,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성은 분명 북방인이었다.
그리고 헬레나라고 불리는 여성 또한 이 핏줄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는 듯 미묘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북방에선 금색 여우라고 불렸죠.”
나는 겨누고 있던 살짝 단검을 내렸다.
그리고 먼 동부에서 만난 북방 형제를 향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북방 출신인가?”
“네, 노예로 팔려 오기 전까지는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힘과 이국적인 용모를 가진 북방 인간은 길들일 수만 있다면 비싼 가격에 팔리는 노예 중 하나였다.
그 덕에 왕국 멸망 초기, 수많은 북방 인간이 타국 노예로 팔려나갔는데 헬레나 또한 그런 케이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나는 측은한 감정이 몰려왔다.
소문으로만 듣던 ‘흩어진 형제’를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살벌한 기세를 뿜는 기사단을 진정시킨 뒤 뽑았던 단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헬레나를 향해 우리를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그래서 용건은?”
“용서를 구할 게 있어서요.”
용서? 초면인 내게 무슨 용서.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죄, 죄송합니다. 기사님!”
그러자 얼굴이 익숙한 한 청년이 허겁지겁 달려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했더니 소돔에서 종이 뭉치를 던지고 도망쳤던 그 범인이 분명했다.
“동부 까마귀?”
“편견과는 달리 똑똑한 새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찾아온다고 한발 피하기로 했던 폭탄이 제 발로 찾아왔다.
미간을 찡그린 나는 불쏘시개로 사용하려 했던 종이 뭉치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어떻게 야영지를 찾아왔나 싶었더니, 소돔에서부터 따라온 것이었나.
나는 의도치 않은 접점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여기서 현지 단체와 충돌해봤자, 중요한 침입 임무에 방해만 될 뿐이다.
나는 소돔을 혼란으로 물들였던 종이 뭉치를 헬레나를 향해 거칠게 던졌다.
“고맙습니다. 힘들게 필사했거든요.”
주고받을 것은 다 주고받았다.
용건이 끝난 나는 실눈을 뜬 채 웃고 있는 헬레나를 향해 무언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경계선을 대놓고 자극한 것이다.
“북방에서 오신 기사님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무기를 구하려 하셨을까요.”
“······뒤를 캤나?”
“상인들은 원래 입이 가볍답니다. 돈을 준다면 뭐든지 다 파는 족속들이죠.”
헬레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가 상단을 위장한 북방 기사라는 것과 무기를 구하려 했다는 것을 말이다.
소돔에 겨우 반나절 남짓 있었을 뿐인데 도대체 어디까지 뒤를 밟은 것인가.
다시 한번 지울 수 없는 불쾌함을 느낀 나는 잠시 넣어두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한마디만 더 내뱉어봐라.
살인 멸구만큼 확실한 건 없다.
챙!
깜짝 놀란 상대 무리가 제각기 무기를 뽑아 들며 헬레나 앞을 막았다.
설마 저 짧은 단검을 가지고 중무장한 자신과 싸우려 한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다들 무기를 내려놓으세요.”
하지만 헬레나만큼은 침착한 얼굴로 부하들의 오판을 바로잡아주었다.
북방 출신인 그녀는 기사라는 명칭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네?”
“살아서 돌아가고 싶으면 물러나요.”
겁박이 아닌 현실 직시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하들을 제지한 헬레나는 이제는 대놓고 선을 넘어 내게 걸어왔다.
탁.
그녀가 내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한다.
인제 보니 실눈 뒤에 뚜렷한 초점이 없다.
사라진 빈자리에는 가식과 웃음으로는 숨길 수 없는 광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저희와 같은 목적이 있지 않으세요?”
표정을 숨기는 여우인 줄 알았더니, 멀쩡한 가죽 안에 다른 모습을 숨긴 뱀이다.
어느덧 단검 바로 앞까지 다가온 헬레나가 내 귓가에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기를 원한다면 무기를 드릴게요. 전투마도, 갑옷도, 필요한 건 말만 하세요. 기사님들은 원하는 바를 얻고, 대신 아주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돼요.”
“내 형제들이 도구로 보이나?”
“그것도 아주 튼튼한 도구요.”
까드득.
“제대로 미쳤군.”
“미치지 않고야 살 수가 없었죠.”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불쾌함이 극에 달한 나는 헬레나를 거칠게 밀쳐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라.”
증오에 미친 자들은 주변을 파멸로 이끈다.
이딴 작자에게 도움을 구하느니, 차라리 혼자 관으로 뛰어들어 문을 열 것이다.
감히 형제들을 이용하려 한 헬레나를 향해 짙은 살의를 보이자, 그녀는 언제 웃었냐는 듯 밀랍 인형처럼 차가운 얼굴을 굳혔다.
“현실적인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판단이 틀렸던 모양이군요, 기사님.”
“영원히 틀리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치지지직!
내 신호와 함께 기사단이 오러를 뿜는다.
그것은 여기서 더 말을 이어간다면 정말 끝이라는 마지막 경고였다.
마치 살얼음이 서릴 것 같은 분위기.
야영지에 켜둔 모닥불만이 눈치 없는 불똥을 타닥타닥 뱉어내고 있었다.
“꺼지라면 꺼져드려야죠. 베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요?”
헬레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이 이끌고 온 무리와 함께 어둠 속에 녹아들었고 자신 또한 검게 칠한 수채화처럼 형체를 일그러트렸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이 가득한 숲에선 헬레나의 마지막 읊조림이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실망하게 될 거예요. 황금이라 지칭한 핏줄은 항상 결말이 비슷했죠. 당신이 옳은 길은 찾는다면 민중을 외면하지 마세요.”
후우우우우웅 - - -!
동부 왕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
나는 파면 팔수록 검은 속내를 드러내는 동부 정세 앞에 피곤함을 느꼈다.
그러자 내 어두운 표정을 읽은 리처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들려온 헬레나의 마지막 말을 녀석 또한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경, 제가.”
“그만.”
왕국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북방에서 여기까지 따라온 리처드다.
백성에게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이는 녀석인 만큼 왕실 핏줄을 비난하는 그녀의 말에 동요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리처드를 단호히 막아서며 스스로를 향한 질책을 그만두게 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기사왕 눈투성이가 왕자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번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선왕의 조언을 리처드와 함께 되새겼다.
“위대한 자는 핏줄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든 요람으로 결정될 것이다.”
“그래, 그걸 잊지 마라.”
나는 단검을 가볍게 털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침침한 분위기가 날과 함께 씻겨나갔다.
“로날드!”
“말씀하십시오, 경!”
“음식은 완성되었나?”
로날드는 때아닌 음식 타령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냄비를 서둘러 가지고 왔다.
북방 기사들이 썰어 넣은 온갖 재료들과 동부인들이 먹는 향신료가 들어간 수프.
나는 시무룩한 리처드의 등을 힘껏 쳐준 뒤 단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었다.
어떤 맛인지는 상관없었다.
함께 나눠 먹는 수프와 그릇에는 쉽게 가시지 않는 따뜻함이 남아있었다.
원래 여정은 고난을 동반하는 법.
나는 바삐 수저를 놀리며 어머니 북방이 이들을 보호하기를 기원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있다.
나는 한참 수프를 퍼먹다 말고 유난히 신경 쓰이는 한 향기를 로날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 향신료 이름이 뭐라고?”
“박하(Mint)입니다.”
“으음, 다음에는 넣지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