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검은머리 기사왕 73화
감히 하늘과 가까워지려는 건방진 인간을 신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철학적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이 높은 고산에 있었다.
‘너희를 시험하마.’
자연 앞에 성취는 의미 없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자부심, 유대감은 하늘 아래 맹목적인 시험을 강요받았다.
고(古)라는 이름이 붙은 산과 그 속에 잠재되어있는 셀 수 없이 세월.
대륙을 아우르는 어머니 북방 앞에선 깨달음 말고는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맹렬한 추위도, 거센 바람도 산을 넘어야 한다는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기사에게 있어 한계를 넘는 쟁취는 숨을 쉬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오늘은 100m, 내일은 50m를 걷는다.
살기 위해 눈을 파서 숨고, 얼어붙은 건량을 녹여 먹으며 최적의 속도를 유지한다.
희박해지는 산소, 반대로 농후해지는 자연.
고통과 깨달음에 연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지닌 모든 감정을 체감했다.
그리고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걷기를 또 일주일, 드디어 오르막길이 끝이 났다.
목표로 했던 가장 낮은 능선까지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느낀 것은 환희도, 뿌듯함도 아닌 눈앞이 아찔한 아득함이었다.
가장 낮은 능선 뒤로는 온 세상을 가득 채운 산봉우리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오지 맙시다.’
‘좋은 생각이다.’
도전 욕구가 싹 사라졌다.
우리는 고산을 오르는 임무가 이번이 최초임과 동시에 최후이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협곡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산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운을 차린 기사단은 부지런히 움직였고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인 비명의 협곡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양쪽으로 높이 선 가파른 절벽과 마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협곡.
바람이 불 때마다 들려오는 끔찍한 소리는 이곳이 왜 비명의 협곡이라는 이름이 가지게 되었는지 실감하게 했다.
나는 가장 먼저 협곡으로 들어갈 수 있는 초입에 작은 야영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떨어졌던 체력을 회복하며 앞으로 있을 임무를 위해 상태를 점검했다.
“남은 물자는 얼마나 되지?”
“식량은 이틀 치밖에 없습니다. 특히 무기를 잃어버린 게 가장 뼈아프네요.”
보급품은 넉넉하게 챙긴다고 챙겼다.
하지만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보급 썰매를 잃어버렸고 개인당 소모하는 식량과 식수 또한 예상치보다 많았다.
잘 먹지 못해 수척해진 얼굴과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는 꾀죄죄한 머리.
우리를 누가 기사단으로 보겠는가.
그나마 유일한 무기인 단검마저 품속에 숨기니 딱 피난민과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턱을 어루만지며 기사들과 함께 웃었다.
“적어도 들킬 염려는 없겠어.”
이 정도야 위장이라고 치면 된다.
다들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에 의미를 둔 나는 리처드를 향해 물었다.
“근처에 마을이 있나?”
“협곡 초입에 큰 도시가 있습니다. 제국 본토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죠.”
“출입은?”
“노예들이 즐비한 곳입니다. 몰려다니지만 않는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다행히 내 수중 안에는 재상이 챙겨 준 순금 조각들이 몇 개 있다.
순도가 높은 것들이니 질 좋은 무기와 식량을 구매하고 관문행 위장 상단을 꾸리는 데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거친 귀리를 불렀다.
“인원을 둘로 나눈다. 경은 기사들과 함께 이 야영지에서 합류를 기다려라.”
“직접 가십니까? 부하들을 쓰시죠.”
“아니, 내가 가지. 돌아올 때 동안 주변 지형 좀 살피고 있어라.”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적어도 내가 직접 가서 상황을 살피고 철저히 작전 준비를 해오는 게 나았다.
거친 귀리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고 나는 이동을 명령했다.
남은 기간은 불과 보름, 북방군이 도착하기 전 반드시 관문을 열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임시 야영지를 떠나 비명의 협곡 아래로 내려갔다.
수년 만에 다시 찾는 동부 지역이었다.
* * *
“다들 체구가 크군, 북방 노예인가?”
“맞습니다, 운 좋게 구했죠.”
“흐흐, 좋다. 통과!”
동부 정세를 잘 아는 로날드는 노예 상인을 능숙하게 연기하며 경비를 매수했다.
덕분에 우리는 별 제지 없이 동부 도시 ‘소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동부와 중앙 대륙을 연결하는 유일한 도시 소돔은 참으로 큰 도시였다.
하지만 도시 안으로 발을 들인 나는 이내 리처드가 말했던 숨 쉬지 않는 왕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제, 제발 자비를······.
콜록콜록!
거리에는 흙먼지와 오물이 가득했다.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먹을 것을 구걸했고 그나마 일을 할 수 있는 성인은 전부 노예가 되어 고된 노동에 동원되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더 화나게 한 것은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그 주체가 다름 아닌 같은 종족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리처드와 로날드는 몰려오는 모멸감을 참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숙였다.
동부 왕국의 왕족으로서 감히 이 광경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툭, 툭.
무언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내리자, 조그마한 소녀가 어린 동생과 함께 바지를 붙잡고 있었다.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인가.
그런 것치고는 그 어떠한 기대감도 희망도 소녀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는 그저 태어났기에 살았고 빛을 본 기회조차 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가만히 걸음을 멈춘 나는 주머니에서 건량을 쪼개 그 둘의 입으로 넣어주었다.
“······입안에 넣고 천천히 녹여 먹여라. 절대 뱉지 말고 여기서 다 먹어.”
괜히 들고 다녔다가는 기회를 본 다른 부랑아들에게 뺏기고 말 것이다.
그 현실을 너무나 잘 아는 나는 남매가 건량을 다 먹기를 기다려주었다.
안다, 겨우 한 끼 식사라는 것을.
하지만 이런 작은 호의마저 베풀지 않는다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우물우물, 꿀꺽.
남매가 건량을 전부 녹여 먹은 것을 확인한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공허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소녀와 한동안 눈을 마주치다, 이내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향해 걸어갔다.
한없이 바닥을 치는 기분이 이 비참한 현실을 향한 차가운 분노로 바뀌었다.
나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나선 망국의 왕자에게 훗날 있을 고난을 충고했다.
“리처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언제든 올 거다. 하지만 바닥을 기고 빌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는 것을 멈춰서는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포기하지 마라, 순응하지 마라.
싸우는 것을 멈추는 그 순간 늑대는 언제든지 울타리를 넘어 양을 물어갈 것이다.
우리는 선조의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더러운 소돔 거리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동부의 덥고 끈적한 공기가 자유로운 영혼마저 옭아매는 것 같았다.
* * *
“50자루 해서 큰 조각 두 개. 어떻소?”
“지금 나랑 장난하나?”
“하, 이런 물건도 못 구하는 사람 천지요. 다른 곳에서 찾아보던가.”
상인이 판매하는 병장기들은 하나 같이 저급한 철로 만든 쓰레기였다.
거기다 가격까지 폭리를 취하니 욕이 나오지 않으려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 화가 나는 건 이 쓰레기 같은 상인의 말이 대부분 옳다는 것이다.
이건 현 대륙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나의 완벽한 오판이자 실수였다.
내가 작게 수신호를 보내자 로날드는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순금 조각을 던졌다.
일단 급한 대로 마차라도 구매해야 했다.
“마차나 주시오.”
“하하, 감사합니다. 손님.”
표정을 싹 바꾼 상인은 재빨리 순금 조각을 챙긴 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마차와 말을 가지고 오기 위해 가게 밖 마구간으로 걸어간다.
참으로 약삭빠른 작자다.
로날드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가게 한쪽에 앉아있던 나를 향해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단장. 상인 놈들이 담합이라도 한 모양인데, 더 작은 가게를 찾아보죠. 분명 매물이 있을 겁니다.”
“아마 그쪽도 상황은 같을 거다.”
대륙에서 가장 큰 영토인 오크 제국이 내전 중인 상황에서 질 좋은 병장기를 쉽게 구할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대부분 매물이 이미 중앙 대륙으로 흘러갔거나, 대장간에서 생산되는 족족 오크 놈들에게 가져다 바치고 있겠지.
너무 북방에 오래 있었나.
나는 찡그린 미간을 꾹꾹 누르며 어쩔 줄 모르는 로날드를 향해 말했다.
“일단 구할 수 있는 보급품만 적재하고 협곡으로 출발할 채비를 갖춰.”
“그냥 합류하시는 겁니까?”
“이런 쓰레기로는 싸우지도 못해. 오크 영토 쪽에서 다시 구해보는 게 낫겠지.”
차라리 적의 보급품을 탈취해 무장하는 편이 훨씬 승산이 있었다.
나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음을 상기하며 흙먼지가 묻은 로브를 탈탈 털었다.
기운이 맑고 선선한 북방에서만 있어 습하고 더운 동부 날씨가 적응이 안 된다.
나는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해, 결국 뒤처리를 맡기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끼이익, 덜컹!
팔랑, 팔랑!
“- - - - - -?”
하지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간 내게 불어온 것은 선선한 공기가 아닌 어디선가 날아온 얇고 하늘하늘한 종이 한 조각이었다.
나는 버릇처럼 종이를 낚아챘다.
손바닥 하나 남짓한 그 종이에는 필사가 분명한 글씨가 빽빽이 적혀있었다.
[친애하는 소돔 시민 여러분! 이제 긴 압제의 시간은 끝입니다! 진정한 해방을 위해 분노하고 또 분노하십시오!]
[동부 까마귀는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웁니다. 왕국 압제자에게 영원한 죽음을! 소돔 시민 동지에게 진정한 광명을!]
종이는 엉성한 글씨로 쓴 선동문이었다.
다만 한 자 한 자 눌러쓴 내용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생소한 것을 담고 있었다.
해방, 자유, 압제, 동부 까마귀?
설마 착취의 중심지인 소돔에서 이런 단어를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놀람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꺄아아악 - -!
저기다! 잡아라!
쾅! 콰직!
사방에 뿌려진 종이로 인해 난리가 났는지 중앙 시장이 무척이나 어수선했다.
빠르게 투입된 경비대가 도시에 선언문을 뿌린 범인을 찾은 모양이었다.
찢어지는 비명과 짓밟히는 가재도구들.
사람들은 사방으로 도망쳤고 창을 든 경비대는 범인은 쫓아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고 참 안타깝게도 도망친 범인은 이 가게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순간 고양이처럼 지붕에서 뛰어내린 범인과 우연히 눈을 마주쳤다.
“헉!”
놈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덩달아 놀란 나는 소란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얌전히 가게로 들어가려 했다.
펄럭!
하지만 그 순간 정신이 나가버린 범인은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던졌다.
생전 처음 보는 내게 폭탄이나 마찬가지인 선언문을 통째로 넘겨버린 것이다.
“미,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그게 지금 할 말인가?
나는 담을 넘어 도망치는 뻔뻔한 범인의 뒤를 급히 쫓아가려고 했다.
“공범이다!”
“거기서, 이 새끼야!”
그러나 범인을 쫓아온 경비들은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놈들에게 있어 이성적 생각이란 것은 그저 물건을 건네받은 것으로 끝인 모양이다.
억울하다고 말하면 들어줄까.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어이없어 허탈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으랴아압!”
종이 뭉치를 내려놓자, 기세등등한 경비들이 나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물론 그 창이 내 몸을 꿰뚫는 일은 없었다.
빠각!
“끄아아아악!”
옆에서 나타난 한 덩치가 창을 부러뜨린다.
그러자 또 다른 덩치가 나를 공격하려 했던 경비를 주먹 한 방에 넉 다운시킨다.
순식간에 주변으로 몰려든 덩치들.
내가 로브를 벗자, 함께 따라온 기사단도 덩달아 로브를 벗으며 물었다.
“단장님, 무슨 일입니까?”
“······불미스러운 일.”
딸꾹!
이게 사람인가 괴물인가.
주먹 한 방에 찌그러진 투구를 보며 경비 한 명이 딸꾹질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