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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72화 (72/181)

72화

검은머리 기사왕 72화

새로운 세력인 북방 왕국의 등장으로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던 대륙 정세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진척이 없는 제국 내전 상황에 다시 한번 불을 지핀 것은 물론이며 수년간 서부에 틀어박혀 있던 엘프들의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게 했다.

우리와 이미 여러 차례 군사적으로 충돌한 2황자와 북쪽 해양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엘프를 상대로 토벌 명령을 내린 3황자.

물론 그것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던 1황자는 한동안 미루고 있었던 소규모 군벌들을 토벌하며 영토를 늘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던진 작은 돌멩이 하나가 대륙이라는 커다란 호수를 다시 한번 혼돈으로 이끈 것이다.

싸우지 않으면 도태된다.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한 북방 왕국은 다시 한번 지키기 위한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눈이 녹는 봄이 지나 북방을 초록으로 물들인 여름이 찾아왔다.

새벽 일찍 채비를 갖춘 북방 기사단 전원이 정문 옆 마구간으로 집결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무장과 갑옷은 가볍고 등에 메고 있는 짐은 무거웠다.

이번 작전에 가장 큰 고비는 전투가 아닌 고산을 넘어야 하는 행군이었기 때문이다.

날붙이는 오직 검 한 자루뿐.

철저한 준비를 끝낸 나와 기사단은 사슴 위에 올라타 정문을 통과했다.

푸르륵!

다각, 다각, 다각.

“아······.”

그러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한 무리가 쓰고 있던 로브를 걷으며 다가왔다.

왕궁에서 몰래 빠져나온 왕과 재상이었다.

“스승님!”

기록에 남지 않는 비공식 출정이었다.

다른 주민과 병사들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도 이번 작전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내용을 아는 왕과 재상만큼은 사지로 떠나는 기사단을 배웅하기 위해 새벽 일찍 왕궁을 빠져나왔다.

시선을 맞춘 눈투성이가 내게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세요.”

“최선을 다해보마.”

매번 지켜야 했던 체통과 존칭은 오늘 하루만큼은 가볍게 생략되었다.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으면 마음이 약해진 눈투성이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으니까.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다른 기사들도 독려해줘. 다들 무심한 척 저래도 무척 기다리고 있으니까.”

“헤헤, 네!”

왕궁도 아닌 이런 한미한 자리에 무려 왕이 직접 행차해 떠나는 길을 배웅한다.

충성과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들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포상은 없을 것이다.

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눈투성이가 다른 기사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재상 기억하는 새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내 안장 앞에서 속삭였다.

“준비는 전부 끝났어요. 본대는 회색 늑대 경이 복귀하는 날에 맞춰 출진할 거예요.”

“······타이밍이 중요하겠군.”

“반드시 신호를 보내주세요.”

생각보다 엘프 놈들 움직임이 활발하다.

수상함을 눈치챈 여왕이 하루에도 수십 번 정찰 선박을 보내온 것이다.

그 덕에 해안가 방어선을 건설한 회색 늑대는 벌써 한 달째 그곳에 묶여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방어 병력을 지휘 중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퇴역병 출신 부장들의 진급으로 발령이 확정되었으니 때에 맞춰 수도로 복귀할 수가 있게 되었다.

결전의 날은 정확히 한 달 뒤.

북방군의 모든 총력을 동원한 관문 전투가 우리 기사단 손에 달렸다.

슬슬 출발할 시간이다.

눈투성이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재상이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검성, 만약에라도······.”

“아니.”

무슨 말을 할지 뻔하다.

위험한 임무인 만큼 아무리 그녀조차 성공을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만약을 고려하라는 재상의 충고를 가볍게 거절하며 고삐를 쥐었다.

제자가 목숨을 걸었던 대의인데 스승인 내가 감히 도망칠 수 있겠는가.

명예가 우리를 부른다.

나는 기사왕을 향해 검집을 들어 올린 뒤 기사단과 함께 평원을 달렸다.

* * *

리처드는 요즘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해왔던 수련이 결실을 보아 북방 검술 1형에 입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는 재능이 있었던 걸까?

왕국 왕실에서 배웠던 장난들과는 차원이 다른 북방 검술은 우물 안 개구리였던 자신을 강인한 전사로 성장시켜주는 듯했다.

현명하고 강인한 기사왕과 그런 왕을 충성으로 따르는 신하와 기사들.

그들이 이끄는 북방군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몰랐으며 왕국의 백성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 얼마나 이상적인 나라인가.

손에 굳은살이 더해갈수록 리처드는 북방 왕국에 매료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동안 겪어온 수련은 오늘 임무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단 것을 말이다.

휘이이이잉- - - -!

또 눈보라가 몰아친다.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낸 로날드가 얼굴이 창백한 리처드를 향해 물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말, 말을 놓으십시오, 로날드 경. 저는 수습 기사 리처드입니다.”

임무를 위해 출정한 기사단은 한참을 달려 동부와 맞닿는 고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초입에 도착하자마자 짧은 휴식 후 등반을 시작했는데, 하루 만에 사슴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끊겼다.

당연히 선택권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타고 온 사슴을 돌려보낸 기사단은 미리 챙긴 설산 장비를 착용한 뒤 다시 고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떨어지는 기온과 서서히 모습을 감추는 동식물들.

분명 녹아야 할 눈들은 사방에 쌓여 있었고 바람은 칼과 비견 될 정도로 날카로웠다.

하지만 절망스러운 것은 고산을 오른 지 이게 겨우 이틀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나마 목적지는 고산의 제일 낮은 능선은 일주일은 더 올라가야 도착했다.

“휴식!”

고도가 높아질수록 몸이 요구하는 열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일정 시간마다 휴식을 명령한 검성은 주기적으로 건량을 씹게 했다.

드디어 휴식이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던 리처드는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다른 기사들은 평소에 어떤 행군을 해왔기에 땀 하나 흘리지 않는 것일까.

그간 얻은 성취에 꽤 자부심이 생겼던 리처드는 빠르게 겸손해졌다.

“리처드 경.”

그 순간 로날드가 다가왔다.

그리고 수척해진 얼굴에 무언가 끈적한 것을 덕지덕지 발라주기 시작했다.

“이게 뭡니까?”

“짐승 기름입니다. 건조하고 추운 지역에선 필수로 발라야 한다더군요. 단장님이 주신 거니까, 나중에 꼭 돌려드리세요.”

“아······.”

무심한 듯 보여도 참 섬세한 사람이다.

리처드는 선두에서 주변을 경계하는 단장을 선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기사왕과 함께 찾아왔던 검은 머리 종자는 어느덧 검성이 되었고 조그맣던 자신은 그의 뒤를 따라 길을 걷고 있었다.

아직 어린 자신조차 세월을 실감하는데, 그는 어떤 기분으로 검을 들었을까.

입술을 우물거린 리처드는 반들반들해진 얼굴을 매만지며 다시 한번 힘을 얻었다.

쿠르릉.

“- - - - - -?”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 순간 원인을 알 수 없는 떨림이 발을 붙잡았다.

분명 멀지 않은 곳에서 거센 바람과 함께 무언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급류? 아니다, 쓸려 내려오고 있는 고체다.

주변을 경계하던 검성이 일어나려는 기사들을 옆으로 밀치며 외쳤다.

“눈사태다!”

쿠르르르르르릉 - - - -!!

진동이 격한 파동이 된다.

저 멀리 산 위에서는 커다란 눈사태가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허둥지둥 옆으로 몸을 날리는 기사들.

깜짝 놀란 로날드는 리처드와 함께 경사가 서 있는 길옆으로 벗어났다.

“모두 꽉 잡아!”

“으아아아, 시발!”

됐다, 하늘이 도왔다.

길옆에는 기사들이 몸을 피할 경사가 있었고 도망칠 시간 또한 충분했다.

“잠, 잠시만!”

하지만 로날드에게 이끌려 경사로 들어가려던 리처드는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수습 기사들과 함께 끌고 올라오던 짐이 실린 보급 썰매가 있었다.

식량이 문제가 아니다.

관문 전투에 사용될 기사의 명검들이 전부 저 보급 썰매에 실려 있었다.

검은 곧 기사의 생명,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수하라 명받지 않았는가.

이를 악문 리처드는 본능처럼 몸을 날려 썰매와 연결된 밧줄을 낚아채려 했다.

“왕자님!”

눈사태는 생각보다 빨랐고 몸을 날린 그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느렸다.

경악한 로날드의 외침과 함께 리처드는 코앞까지 다가온 눈사태와 마주했다.

콰르르르르 - - -!

시야를 덮치는 커다란 눈더미.

그렇게 미련한 리처드는 보급 썰매와 함께 눈사태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 끝에는 죽음을 예고하는 가파른 절벽이 끔찍한 최후를 예고하고 있었다.

로날드는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겨우 눈사태 때문에 평생을 모셔온 주군이 죽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

하지만 동시에 그는 보았다.

떠내려간 눈사태 뒤로 작은 체구의 남성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말이다.

“- - - - - - - -!!”

비명이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벗어날 수가 없다.

유일한 생명줄인 밧줄을 꾹 잡은 리처드는 무력하게 떠내려가기만 했다.

본능도 죽음을 직감했는지 수많은 주마등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주마등 중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인생에서 가장 짧은 순간이었던 북방에서의 생활이었다.

덜컹, 쿵!

재수 없게도 썰매가 먼저 절벽에 떨어진다.

그 밧줄을 꼭 움켜잡고 있던 리처드 또한 반동에 휘말려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대책 없는 부유감이 느껴진다.

아직은 죽음이 두려웠던 동부의 왕자는 미련이 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턱!

서걱!

쿵, 쿵, 쾅!

하지만 그 순간 밧줄이 잘렸다.

썰매는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리처드는 누군가에게 손이 잡혔다.

떨어지기 직전 대롱대롱 매달린 몸.

살며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단검을 든 검성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모했다.”

“아, 아아······!”

검성이 마치 곡예사처럼 미끄러져 내려와 썰매 밧줄을 자르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려는 자신을 낚아챈 것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둘 다 죽지 않았을까.

리처드는 몰려오는 죄책감 때문에 감히 감사하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단장님!”

“수습부터 끌어올려!”

기사들이 급히 달려와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검성과 자신을 끌어올렸다.

달려온 그들의 눈에는 안도가 가득했다.

탁탁.

검성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눈을 털어낸 뒤 밧줄을 잘랐던 단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넋이 나간 리처드를 일으켰다.

“검 때문에 그랬나?”

그 썰매에는 붉은 강철이 수일을 두드려 만든 귀한 명검들이 실려 있었다.

멍청하게도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아 잃어버렸으니 자신의 잘못이 맞았다.

하지만 리처드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동자에는 원망보단 기특함이 담겨있었다.

검성은 어깨를 꽉 쥐며 말해주었다.

“목숨이 검보다 귀한가?”

“명, 명예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기사! 검은 명예가 아니라 도구다. 손보다 긴 연장선이고 그저 적을 베는 수단이지.”

검이 없는 기사는 무엇인가?

리처드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선망이 거센 폭풍과 함께 뒤집혀 버렸다.

검은 명예가 아닌 도구다.

그 끝을 보았었던 남자는 자신이 여태 휘둘러온 명예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콩!

검성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리처드의 왼쪽 가슴팍을 쿵쿵 때려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온몸이 눈투성이가 된 기사들을 향해 명령한다.

“기사단! 아직 갈 길이 멀다! 남은 짐을 챙겨서 다시 올라간다!”

“알겠습니다, 경!”

기사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나마 무사한 짐을 챙겨 다시 대열을 이루었다.

물론 넋이 나간 리처드의 머리와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짜식, 잘했다.”

“멋진 건 혼자 다 했네.”

로날드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물과 콧물을 크응 삼키고 있는 리처드와 함께 그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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