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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71화 (71/181)

71화

검은머리 기사왕 71화

엘프 여왕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 사제들을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출항 전 죽임을 당했다? 원숭이보다 못한 한낱 야만인 새끼들한테?”

“정, 정황상 그렇습니다.”

북방으로 떠났던 사절이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선박 안에는 장담하고 떠난 엘프 사절이 아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부패한 고기가 뒤엉켜있었다.

처음 현장을 목격한 항구 여직원이 기절했을 정도로 참혹했던 선박 내부.

왕실은 급히 조사관을 파견해 출항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게 했다.

북방 놈들이 기어코 일을 저지른 게 분명하지 않은가, 당장 군대를 보내 사절을 해친 죄를 물어야 한다는 성토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외였다.

이틀 동안 심도 있는 조사를 끝낸 엘프 조사관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은 것이다.

‘부패 정도가 모두 같습니다. 그리고 사인(死因)도 발견한 무기와 일치하고요.’

‘현장에서 죽은 야만인들 짓이 분명합니다.’

사절단은 화물 적재 중 습격을 받았다.

습격한 주체는 북방군이 아닌 수많은 야만인이었고 급히 떠나려 한 사절단은 선박 위까지 올라탄 놈들과 공멸했다.

실리다 만 화물, 무기와 자상이 일치하는 양측 시체, 거기다 본국으로 고정된 돛.

조사관들이 내놓은 정황 증거와 재구성은 그 말이 모두 진심임을 말하고 있었다.

엘프의 학문은 대륙 제일이다.

해부학에 정통한 조사관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건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었다.

‘미개한 북방답군요.’

‘얼마나 못났으면 한낱 야만인에게 당하나요? 어머, 이 말을 비밀로 해주세요.’

진실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귀족들이 성토하던 분노는 곧 혐오와 비웃음으로 바뀌었고 냄비처럼 들끓었던 관심 또한 한낱 유희처럼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엘프 여왕만큼은 딱딱 들어맞아 들어가는 이 진실에 수상함을 느꼈다.

마치 거미가 짜놓은 거미줄처럼 원인과 결과가 너무 완벽했기 때문이다.

‘수상하다.’

상황이란 반드시 변수가 존재해야 한다.

여왕이 쌓아온 정치적 연륜은 도리어 그 완벽함을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까드득.

만약 이 모든 것이 누군가 짜놓은 촌극이라면 도대체 어떤 놈의 작품인가.

자신이 아는 북방 인간 중 이런 치밀한 짓을 벌일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다.

이를 간 엘프 여왕은 속을 거슬리게 하는 원인을 찾지 못해 두 눈을 감았다.

분명 물로 헹궜던 입안에는 그날 씹었던 돌가루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았다.

* * *

에취!

코가 간지러워 재채기를 했다.

그러자 함께 복도를 걷던 거친 귀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감기 걸리셨습니까?”

“킁, 그럴 리가.”

최근 건강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듣기는 했지만, 감기에 걸릴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

나는 간질거리는 코를 킁 삼키며 분주함이 느껴지는 복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다들 바쁘군요.”

“그럴 시기지.”

재상의 집무실을 중심으로 구성된 행정부는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관리와 서기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몰려드는 행정 일을 감당하지 못해 연장, 철야, 휴일 업무를 넘어 결국 행정부에서 밤을 새우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하지만 말단부터 재상까지 그 누구 하나 불만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지금 이 모든 준비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북방의 운명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색 늑대 경은 떠나셨습니까?”

“새벽 일찍 출정했다.”

물자를 챙긴 회색 늑대는 북방군과 함께 엘프 사절단이 상륙했던 해안가로 떠났다.

아무리 철저한 정황으로 엘프 사절단의 죽음을 위장하기는 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배가 상륙할 수 있는 해안가에는 요새와 함께 군대가 주둔할 것이며 내륙으로 이어지는 강바닥에는 말뚝이 박힐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후방이 불안하다.

여름이 오기 전 백색 관문을 점령하려는 우리는 모든 변수를 철저하게 예방했다.

터벅, 터벅, 터벅.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행정부를 지난 나와 거친 귀리는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연무장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끼이익, 쿵.

연무장에는 기사들이 모여있었다.

침묵을 지킨 그들은 나와 거친 귀리가 들어오자마자 절도 있는 몸짓으로 경례했다.

척!

상급 기사 2명, 정식 기사 18명, 수습 기사 15명과 기사 지망생 5명.

나를 포함한 총 41명은 북방 기사단을 구성하는 인원의 전부였다.

과거 전성기와 비교하면 참으로 아쉬운 규모였지만,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기사가 20명이나 된다는 건 엄청난 전력이다.

나는 기꺼이 기사단과 합류해준 그들에게 기꺼이 고마움을 표하며 유난히 체구가 작은 동부인 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수습 기사로 임명된 왕자 리처드와 정식 기사인 로날드가 있었다.

“훈련은 할 만합니까?”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그러지 뭐.”

우리는 동부 왕자를 시험했다.

그가 만약 일방적인 도움만을 바라는 인물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쳐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리처드는 눈투성이가 정한 기준을 보란 듯이 통과했고 내가 지휘하는 북방 기사단에 정식으로 입단했다.

단순한 기사 수습 과정이 아니다.

여기서 시사 받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왕자를 성장시킬 밑거름이 될 것이다.

훗날 동부 왕국의 진정한 왕이 되는 영광스러운 그 날을 위해서 말이다.

듣자 하니 가정 먼저 연무장에 나와 가장 늦게 숙소로 들어간다는데, 끝까지 그런 초심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

왕좌는 인내한 자를 위한 것이니까.

뚜벅, 뚜벅, 뚜벅.

나는 왕자 리처드와 그의 기사 로날드를 독려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연단 위로 올라가 갑주로 무장한 40명을 내려다보았다.

“경들도 알다시피 엘프 사절단이 다녀갔다. 비록 불미스러운 사고로 본국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아마 다음 사절은 단순 도발로만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백색 관문에 틀어박힌 2황자는 지금도 수시로 정찰대를 보내 왕국의 국경을 어지럽히고 있다. 우리가 아직 온전하지 않은 것을 아는 거지.”

북방은 불안한 평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 아슬한 형태는 조금만 뒤틀려도 왕국을 다시 불태울 것이고 이 땅을 향유하는 모든 북방 인간을 노예로 만들 것이다.

두 번의 실수는 반복할 수 없다.

나는 뜨거운 눈으로 연단을 올려다보는 기사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왕국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적은 건재하고 위험은 상주하고 있다.”

언제까지 불안에 떨 것인가? 놈들이 북방을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여기는 것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것인가.

뒤로 미루면 늦는다.

전선이 두 개로 나뉘기 전 한쪽을 확실하게 틀어막을 과감한 수가 필요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번 백색 관문 공략에 핵심이 되어줄 북방 기사단을 향해 왕의 뜻을 전했다.

“왕께서 명하셨다. 우리는 다가오는 여름, 왕국이 잃어버렸던 백색 관문을 탈환한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선두.”

북방군은 아직 온전하지 않다.

난공불락인 백색 관문은 모든 북방군과 기사단을 동원해도 뚫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한다면 방법은 있다.

바로 수도를 탈환했을 때처럼 적이 예상치 못한 지형을 이용한 침입이었다.

“고산(古山)을 넘어 동쪽인 비명의 협곡으로 향한다. 그리고 동부 상단으로 위장해 백색 관문으로 들어갈 것이다.”

동부 왕국에서 생산되는 전쟁 물자는 매달 최전선인 백색 관문으로 옮겨진다.

만약 그런 물자를 옮기는 동부 상단으로 위장한다면 오크 놈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관문 접근을 허락할 것이다.

물론 억양이나 겉모습은 문제없었다.

우리에게는 그쪽 길과 절차에 빠삭한 동부인들이 두 명이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중요한 역할 맡아 줄 왕자 리처드와 기사 로날드를 바라보았다.

“현지 도움은 이들이 맡을 것이다.”

“맡겨만 주십시오, 경!”

생명이 살지 못하는 고산을 넘고 험준하기로 소문난 비명의 협곡을 통과해야 한다.

어쩌면 출정한 북방 기사단 전원이 전사할 수 있는 무모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무모한 작전에 대해 되묻거나 항명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 또한 이것이 최선임을 아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죽을 각오가 되어있는 모든 기사를 향해 진심으로 예를 표했다.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다.”

“저희도 영광입니다, 검성.”

* * *

“대장, 요즘 이상하지 않아?”

“·········.”

“아니, 무시하지 말고!”

사시사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서북 바다 위 어느 주인 없는 무인도.

해먹 위에 누워있던 한 짧은 머리 여성이 나른한 목소리로 모자를 튕겼다.

“또 뭐.”

꼴은 영락없는 해적 복장이다.

하지만 위로 살짝 돌출된 귀와 길쭉한 팔다리는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다른 피가 섞인 혼혈임을 알려주었다.

아니, 그녀만이 아닌 무인도에서 선박을 수리하는 모든 선원이 그랬다.

그들은 다름 아닌 잡종, 노예, 변절자, 추방자, 온갖 별칭으로 불리는 하프 엘프였다.

“엘프 놈들 선박이 평소랑 움직임이 다르다니까? 계속 북방 부근에서 얼쩡거리잖아.”

“그 새끼들이?”

“그래! 그 귀쟁이 새끼들이!”

엘프는 지독한 순혈주의다.

다른 피가 섞인 혼혈들은 노예가 되거나, 왕국 밖으로 추방당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다른 하프 엘프와는 다르게 대장이라 불리는 여성을 중심으로 뭉친 이들은 생판 다른 운명을 살아왔었다.

바로 종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기사왕 아래 종군하며 함께 싸워온 것이다.

‘검은 화살과 추방자들.’

화살이 사라진다고 하여 붙은 검은 화살.

흩어진 영웅 중 하나인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은 북방을 떠나 주인 없는 무인도에서 덧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검은 화살을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누웠다.

“내가 알 게 뭐야.”

“진짜?”

“가서 일손이나 도와.”

“······대장 변했어.”

북방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게 분명하다.

하지만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검은 화살 앞에 막내인 하프 엘프는 실망했다.

아무리 떠나왔다고 한들 한때 또 다른 고향이라 생각했던 북방과 왕국이 아닌가.

언제나 그곳을 그리워하던 추방자들은 짙은 한숨과 함께 엿듣기를 포기했다.

일주일 뒤에 다시 출항할 예정이다.

선장 검은 화살의 명령이 절대적이었던 그들은 열심히 선박을 수리했다.

“- - - - - - -.”

하지만 모두의 관심이 꺼진 그 순간 모자를 살며시 내린 검은 화살이 살며시 눈치를 살피며 해먹에서 일어났다.

사박, 사박.

그리고 술병을 줍는 척 바닥에 놓인 엘프제 나침반과 지도를 꺼내 위치를 살폈다.

엘프 놈들이 북방 해안가를 어슬렁거린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야 있을 수 없다.

막내 말대로 변화가 생긴 게 분명하다.

검은 화살을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숨기기 위해 푸른색 머리를 질끈 묶었다.

꿀꺽.

나는 북방으로 돌아가려는 게 아니다.

그냥 심심해서 지도를 보는 것이다.

검은 화살은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하며 북방으로 향하는 해류를 확인했다.

그래, 잊기 전에 기록하자.

그녀는 습관적으로 깃펜 끝을 혀로 찍은 뒤 수첩 위에 해류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망치지 않고 숨어있던 개구쟁이 막내와 눈을 마주치고 만 것이다.

“으헤.”

“너, 너 이······.”

그러면 그렇지 대장이 변할 리 없다.

이상한 웃음을 지은 막내는 최선을 다해 도망쳤고 다리에 오러를 운용한 검은 화살은 그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철새도 돌아올 시기가 아닌가.

무인도 위로 날아오른 철새 무리는 광활한 바다를 지나쳐 북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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