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검은머리 기사왕 70화
북방 왕국의 수도 스노우가든은 오늘도 한참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물론 진척 상황은 이제 겨우 5% 남짓이지만, 시공 날짜가 올해 봄인 것을 고려한다면 정말 엄청난 속도였다.
거기다 이런 국가 주도 사업 덕에 여러 피난민이 일자리를 얻지 않았는가.
돈이 생긴 노동자는 당연히 수요를 발생했고 수요는 자연스레 생산을 불렀다.
여관, 술집, 잡화점, 음식점, 상설 시장.
왕국이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사람들은 필요한 것을 찾아 움직였고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람은 언제든지 있었다.
거의 죽었다시피 했던 북방의 시장 경제는 안정적인 치안과 적절한 국가 정책으로 조금씩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게 마치 하나의 심장 같지 않은가.
동부 왕국에서 온 왕자 리처드는 후드를 벗으며 혼잣말로 읊조렸다.
“사람들이 전부 웃고 있어.”
도시의 규모와 인프라는 당연히 오랜 역사를 지닌 동부 왕국이 우세했다.
하지만 북방 왕국에는 그들이 가질 수 없는 넘치는 생동감이 있었다.
비록 오늘은 굶주리고 추울지언정 내일은 더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이 웃으며 일하는 북방 인간들에게 여실히 보였다.
“······정말로 부럽군.”
평생 배부른 돼지만을 보며 살았던 리처드는 오늘 처음 스스로 족쇄를 자른 북방 인간들을 동경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품은 것은 단순한 동경이 아닌 고통받는 동부인을 향한 대의였다.
반드시 내 백성들에게도 이와 같은 자유와 희망을 느끼게 해주리라.
좋은 목표를 찾은 리처드는 그리 다짐했다.
“왕자님.”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바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격을 따돌리느라 하루 늦은 로날드가 미리 약속했던 장소에 나타난 것이다.
“하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네.”
“하늘이 도왔습니다.”
사주했던 상단 직원이 막바지 배신을 한 탓에 행렬에서 급히 도망쳐 나와야 했다.
만약 로날드의 분투가 없었다면 수도 입성은커녕 국경도 넘지 못했을 것이다.
리처드는 기사 로날드가 입은 상처에 손수 약과 붕대를 감아준 뒤 주민들이 바삐 돌아다니는 수도 한가운데를 걸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상단에서 급히 도망치느라, 왕실 인장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몰려오는 갈증과 허기짐.
왕자와 기사라고 보기에는 수척한 얼굴과 더러운 꼴이 정말 말이 아니었다.
“일단 여관에라도 들어가시죠, 왕자님. 제가 알아본 바로는 오후는 되어야 왕궁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는군요. 그사이 의복을 바르게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경은 돈이 있나?”
“예? 그게······.”
“우물가나 찾아보세.”
괜찮다, 이런 고생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리처드는 표정이 어두워진 로날드를 위로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일단 사람 꼴이 되는 게 우선인가.
다행히 물 양동이를 든 아낙네들이 보이니 공용 우물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먼 동부에서 온 왕자와 기사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사람 냄새가 잔뜩 풍기는 수도 스노우가든을 구경했다.
킁킁.
하지만 우물가에 도착하기도 전 무언가 맛있는 냄새와 함께 주민들이 북적거리는 공터가 그들의 시선을 잡았다.
커다란 냄비에 무언가를 잔뜩 끓이고 있는 봉사자들과 집에서 가져온 나무 그릇을 하나씩 든 채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릇 위에는 따뜻한 빵과 함께 먹음직스러운 수프가 넉넉히 담겨 있었다.
꿀꺽.
리처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평소에는 먹지 않을 음식이 너무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무려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리처드와 로날드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순서를 기다리는 줄 뒤로 다가갔다.
다들 기다림이 익숙해 보인다.
온갖 귀한 광물이 넘쳐나는 동부 왕국도 하지 못한 배급을 북방 왕국에서 꽤 오랫동안 정책으로 시행해온 모양이다.
주변을 엿본 로날드가 감탄했다.
“음식 질이 괜찮습니다.”
백성을 위한 정책이다.
리처드는 머릿속 커다란 메모장에 배급이라는 단어를 급히 적어두었다.
그러자 줄이 줄어든다.
헛기침을 몇 번 내뱉은 왕자와 기사는 잠시 체통을 잊으며 그 줄을 따라가려 했다.
“저기요, 그릇 안 가지고 오셨어요?”
하지만 그 순간 천막 밖에서 온 식자재를 옮기던 한 여성 봉사자가 맨손으로 서 있는 리처드와 로날드를 발견했다.
“······그릇?”
“다들 들고 계시잖아요.”
줄을 선 사람들은 모두 집에서 가지고 온 그릇과 수저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것을 알 턱이 없는 리처드와 로날드는 두 눈을 껌뻑이며 말을 더듬었다.
“가서 가지고 오세요, 아셨죠?”
“잠, 잠깐.”
가지고 올 그릇이 있을 리가 없다.
바보 왕자와 바보 기사는 억울하다는 듯 온몸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그들을 구원해준 것은 왕자라는 신분과 왕실 인장이 아닌 검은 머리를 야무지게 묶은 한 인자한 소녀였다.
“처음 오신 분들 같은데 너무 그러지 마세요. 자, 여기 이 그릇으로 식사하세요.”
검은 머리 소녀는 깨끗한 나무 그릇과 수저를 허우적거리는 그들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여성 봉사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고 사람들 또한 공손히 소녀에게 인사했다.
이 배급소를 책임지는 관리인가?
얼떨결에 그릇과 수저를 얻게 된 로날드는 자조가 섞인 한숨과 함께 타국에서 고생하는 자신의 주군을 먼저 챙기려 했다.
“음?”
하지만 그곳에 현명한 왕자는 없었다.
오직 처음 만난 소녀 앞에 얼이 빠져버린 젊은 소년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
마치 흑요석으로 짠 비단처럼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와 평범한 옷으로는 감출 수 없는 새하얗고 순수한 아우라.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풋풋한 들풀과 야생꽃향기는 마치 있지도 않은 첫사랑을 연상케 하는 그리움마저 가지고 있었다.
존재 자체로 빛이 난다.
그 말이 무엇인지 오늘에서야 알게 된 리처드는 그릇을 로날드에게 넘긴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검은 머리 소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 자신이 느낀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아, 아름다우십니다.”
“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솔직함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때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친 솔직함은 무례함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왕자로서 사랑만 받아온 리처드는 그런 것에 상당히 둔감했고 책에서 읽어온 멍청한 사랑 이야기를 맹신하는 남자였다.
꿀꺽.
로날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왕자가 벌인 갑작스러운 촌극에 당황스러우면서도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평상복의 기사와 리처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주민들.
주변은 어느새 밥을 먹다 말고 몰려든 사람들이 빠져나갈 길을 막고 있었다.
검은 머리 소녀는 푸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는 분이시네요.”
“아아······.”
제발 그만해 이 멍청한 놈아.
로날드는 그 웃음마저 좋다고 빠개는 왕자를 데리고 황급히 빠져나가려 했다.
다각, 다각, 다각.
하지만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발굽 소리와 함께 잔뜩 화나 있던 사람들이 홍해처럼 양쪽으로 갈라졌다.
방금 출정을 끝내고 왔는지 투구를 벗으며 다가오는 한 중년 기사.
그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검은 머리 소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늦으셨군요, 폐하. 서두르시죠.”
“아! 지금 가겠습니다, 경!”
폐하? 방금 폐하라고 한 것인가?
환한 웃음으로 스승을 반긴 눈투성이는 손을 뻗어 사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백성들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었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저 선명한 검은 머리가 북방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정신을 차린 로날드는 넋이 나간 리처드와 함께 허둥지둥 그 뒤를 쫓아갔다.
적어도 지금은 로맨스 소설이 아니었다.
* * *
“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아뇨,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한바탕 촌극이 있었지만, 다행히 왕실 인장과 검성의 기억력 덕분에 리처드와 로날드는 무사히 왕과 알현할 수 있었다.
물론 용서를 구하는 리처드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었고 로날드는 주름살이 짙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인상을 주어도 모자랄 판에 대놓고 사랑 고백을 하다니, 평소에는 그토록 현명하던 주군이 바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다행히 기사왕은 자비로웠고 대신들 또한 하하 웃고 넘기는 분위기였다.
그보다 앞서 자신들을 찾아온 동부인 왕자가 너무나 반가웠기 때문이다.
재상이 리처드를 향해 물었다.
“사절로 오신 겁니까?”
“······아닙니다. 아버님과 신하들은 제가 빠져나온 사실조차 모릅니다.”
“그럼 비공식적인 방문이군요.”
“예, 맞습니다.”
사실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속국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 동부 왕국이 무슨 배짱이 있어서 사절로 보냈겠는가.
아마 북방이 재건되었다는 소식에 혈기를 참지 못한 왕자의 일탈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것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던 재상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 제 역할이 끝났으니, 모든 결정은 존엄한 주군 기사왕이 할 것이다.
눈투성이는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비록 나이는 어려도 선왕의 유지를 잇고자 합니다. 북방 왕국과 동부 왕국은 오랜 동맹이며 동시에 벗이었죠.”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동부 왕국 또한 그러합니까? 왕의 뜻은, 신하들의 뜻은 어떠하죠?”
박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다.
동부 왕국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 강철의 동맹은 쭉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한쪽이 원한다고 한들 한쪽이 의지가 없다면 합은 맞지 않는 법이다.
왕과 신하는 너와 의견이 같으냐?
눈투성이의 질문은 잠시 외면했던 왕자의 처지를 일깨워주는 말이었다.
“······저, 저와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어떤 부탁을 하려고 왔습니까? 왕국의 전복을 원하시나요? 왕위 찬탈? 아니면 신하들을 전부 죽여드릴까요?”
“그건······.”
“만약 해드린다고 한들, 그것이 왕자의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상이 없는 힘은 목적을 모르는 검이다.
힘이 없는 이상은 검이 없는 목적이다.
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온 눈투성이는 그 철학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리처드는 이를 악물었다.
기사왕을 만나면 전부 해결되리라 생각했던 이 아둔함이라는 어항은 기사왕의 꾸짖음으로 인해 산산조각 깨져버렸다.
왕자라는 타고난 신분이 없었다면 인간 리처드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자신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려 한 것일까.
어항에서 빠져나온 금붕어.
퍼덕거리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구나.
리처드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왕국이 처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그 누구보다 황금시대를 갈망한 리처드는 가장 낮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왕은 통치하지 않습니다. 신하는 충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가슴 아픈 건 백성들이 분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리처드에게는 주어진 원죄가 있다.
그것은 백성을 팔아먹은 왕의 핏줄로 태어난 죄, 황금시대를 무심히 지나친 죄, 이 모든 무도함을 외면하고 방관한 죄!
“폐하, 숨을 쉰다 한들 의지가 없는 인간을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까? 저희가 그렇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한 왕실의 생존을 위해 한 세대를 팔아먹은 겁니다.”
이 모든 죄는 죽음으로 갚아 마땅했다만, 속죄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모든 무도를 바꾸고 싶었다.
“어찌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그들을 구할 수 있습니까? 지고한 북방의 기사왕이시여, 제발 지혜를 빌려주십시오. 북방이 다시 일어난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리처드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조아리며 왕자로서 가졌던 모든 자부심과 우월함, 힘이 없던 사명감마저 전부 내던졌다.
그러자 눈투성이가 환하게 웃으며 바닥에 고개를 조아린 리처드에게 물었다.
기사왕은 처음부터 왕자를 가르쳐야겠다는 오만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금 무엇이 보이십니까?”
“······바닥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낮은 곳을 보셨군요.”
눈투성이는 왕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조아린 리처드 앞으로 다가가 살며시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었다.
“왕자님, 타고난 운명은 없습니다.”
강철이 녹슬었다.
본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과 함께 온몸을 두드리는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만 과거,
모든 인간을 엮었던 강철의 동맹이 다시 우뚝 설 수 있다.
눈투성이가 내게 말했다.
“경, 마침 수습 기사(Squire) 자리가 많이 비어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폐하.”
“좋은 기사가 되실 겁니다.”
땀 흘려 성취하고 스스로 일어나라.
동부 왕국의 왕자는 북방이라는 거대한 나무 아래 작은 번데기를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