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검은머리 기사왕 69화
지금도 뇌리에 박혀있다.
엘프라는 종족과 함께 태어났다고 알려진 불멸왕의 존재가 기사단과 정예 북방군을 찢어발기는 모습을 말이다.
놈은 한 자루 검을 마치 제 손처럼 다룰 줄 알았고 누구는 평생을 수련해 다루는 오러를 마치 바람처럼 뿜어내었다.
만약 살아있는 신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엘프들이 놈을 세계수의 아들이라 부르는 이유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죽음을 각오한 그 순간, 불멸왕 앞을 가로막은 인간이 있었다.
바로 북방의 상징이고 희망이었으며 동시에 그 누구보다 강했던 기사왕.
그가 모든 인간을 대신해 검을 든 것이다.
‘놀랍군, 인간이 맞나?’
불멸왕은 진심으로 놀랐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한낱 인간이 이런 경지까지 올라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렇게 목숨을 건 치열한 격전은 무려 반나절이 넘도록 이어졌고 세상이 지켜보는 아래 종족 전쟁은 끝이 났다.
기사왕은 그날 죽었다.
물론 불멸왕 또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채 세계수 아래 잠들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절망, 엘프는 치욕이었던 역사.
아무리 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했다.
회색 늑대가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목을 베어 돌려보내야 한다.”
원래 국가 간 사절은 해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저 엘프 놈들과 우리 사이에 그런 불문율 같은 게 통할 리가 없었다.
감히 축하 사절을 보내? 그것도 북방을 침공할 때 사용했던 뱃길로?
이건 말만 축하 사절이지 사실상 왕국을 우습게 본 도발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색 늑대 말대로 당장 목과 귀를 베어 돌려보내도 모자랄 만큼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기억하는 새만큼 흥분한 우리를 진정시키며 섣부른 행동을 제지했다.
“진정하세요. 도발에 넘어가시면 안 돼요.”
“재상······!”
“알아요. 지금 느끼시는 그 기분, 저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으니까.”
그 누구보다 기사왕을 존경했던 재상이 이 모욕을 모를 리 없다.
그녀도 우리만큼이나 분노했고 당장이라도 사절단을 찢어 죽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실이란 것이 그랬다.
백색 관문도 되찾아 오지 못한 마당에 전선을 두 개로 나눌 수는 없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참아야 하지 않겠는가.
고개를 숙인 재상 앞에 우리는 애써 분노를 삼키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가만히 이야기만을 듣고 있던 눈투성이가 미약한 들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궁전으로 부르세요. 직접 상대할게요.”
“······허나, 폐하.”
“제가 나서지 않으면 트집을 잡겠죠. 최대한 빨리 돌려보내 볼게요.”
눈투성이는 1세대 영웅들을 배려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나설 때임을 알았다.
그 모습에 걱정을 덜어낸 재상은 현명한 기사왕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절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 * *
또각, 또각, 또각.
“흥, 참으로 볼품없군.”
“설마 기대하셨습니까?”
“기대는 무슨!”
사절 대표인 두 엘프 남녀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왕궁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노골적인 언성으로 북방 왕국을 헐뜯으며 화려한 부채를 펄럭인다.
온갖 예술 작품으로 장식된 자국 궁전과는 다르게 참 삭막하기 그지없는 북방 왕궁.
역시 인간 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풍류와 예술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두 번을 오기 싫은 장소다.
바삐 돌아다니는 인간 시종들을 혐오스럽게 바라본 사절 하나가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시지요. 더 이상 여기 있다가는 두드러기가 생길 것 같아요.”
“동의하오.”
명목상 단순한 축하 사절이니, 서신과 함께 선물만 전달하면 임무는 끝난다.
하루라도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절들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복도 끝에는 육중한 문이 있었다.
미리 창을 들고 대기 중이었던 근위병들은 싸늘한 눈빛으로 사절을 맞이했고 이내 명령받은 대로 알현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쿵!
기사왕과 대신들은 이미 앉아있었다.
그들을 향해 고개를 추켜세우려 했던 사절 하나가 급히 침음성을 삼킨다.
“으음.”
알현실은 마찬가지로 검소했다.
하지만 왕좌에 앉아있는 기사왕의 존재는 단순 무형인 분위기를 넘어 맑고 하얀 기운을 사방으로 퍼트리고 있었다.
품격있으면서도 고고하다.
순간 할 말을 잃은 사절들은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알현실 중앙으로 걸어가 외쳤다.
“북방의 왕을 뵙습니다.”
“환영합니다, 먼 서부에서 온 엘프들이여.”
먼 서부에서 온 엘프들.
무례하지 않되, 공손하지도 않다.
작게 미간을 찡그린 사절은 대충 고개를 숙인 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엘프 왕국의 지엄한 여왕께서 선물과 함께 저희를 보내셨습니다. 북부 왕국의 건국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건국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
“선대 기사왕과 북방 왕국은 이미 있었습니다. 우리가 간악한 오크 놈들을 몰아낸 것이니 따지고 보면 탈환이지요.”
그래, 우리는 새로운 건국이 아닌 선대 기사왕의 유지와 왕국을 계승했다.
그것을 잊지 말라는 듯 눈투성이는 방긋방긋 웃으며 순수한 지적을 했다.
분명 뼈 있는 말이다.
거기다 거시적 관점에서는 분명 맞는 말이기에 반박할 명분도 없었다.
함부로 불쾌함을 드러냈다가는 도리어 도발에 넘어가는 꼴이 되지 않는가.
필사적으로 참은 사절은 방긋방긋 웃는 눈투성이를 따라 억지로 웃었다.
계속 그렇게 평정을 유지할 수 있나 보자.
뒤를 향해 손짓한 사절은 미리 준비해둔 선물 궤짝을 과장된 몸짓으로 진상했다.
눈을 현혹하는 온갖 보물들과 북방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약재와 과일들.
이 모든 것들은 국가 간 축하 선물로 쓰이기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궤짝 한가운데 놓인 한 낡은 깃발은 은 모든 선물을 왜곡했다.
사절이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 여왕께서 보내신 축하 선물입니다.”
“······깃발?”
“하하,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불미스러운 일로 사라졌던 기사왕의 깃발입니다. 저희가 잘 보관하고 있었으니······.”
쾅!
참지 못한 회색 늑대가 팔걸이를 내려쳤다.
그리고 재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오러가 섞어 외친다.
“불미스러운 일? 네놈들이 저지른 전쟁이 언제부터 불미스러운 일이었지?”
“아, 아니. 이런 결례를······!”
“하하! 결례? 방금 결례라고 했나? 내가 직접 피로 만든 결례를 보일까!”
서슬 퍼런 위협이다.
손에 일렁이는 오러는 회색 늑대가 진정으로 화가 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원초적인 위협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사절들과 이번만큼은 나서지 않는 재상.
나는 어쩔 수 없이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내키지 않은 입을 열려 했다.
“경, 그만두세요.”
하지만 그 순간 왕좌에서 또 한 번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항거할 수 없는 왕의 목소리였다.
“······폐하.”
“농이 짓궂지 않습니까?”
그 누구도 아닌 눈투성이다.
이 자리가 누가 주도하는 자리인지 상기한 회색 늑대는 금세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왕을 향해 공손히 예를 표한 뒤 주춤거리는 사절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허나 그것은 진정이 담겨있는 사과가 아닌 눈투성이를 위한 맞장구였다.
“실례했소.”
“이, 이······!”
이런 모욕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아니, 더 화가 나는 건 사절 대표로 온 자신이 회색 늑대가 뿜어낸 오러와 살기 앞에 겁먹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단순한 충동이었을까, 아니면 의도한 걸까.
사절은 살며시 눈동자를 돌려 조용히 웃고 있는 어린 기사왕을 살폈다.
순수하고 앙증맞은 외모 속에 속내를 알 수 없는 능구렁이가 똬리 틀고 있었다.
여왕은 과연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눈투성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왕의 호의는 감사히 받았습니다. 연회를 준비했으니, 마음껏 즐기다 돌아가시길.”
“······송구합니다, 폐하. 해류가 걱정되어 본국으로 서둘러 돌아가려 합니다.”
“음, 참으로 아쉽군요.”
더 있고 싶지 않다.
여왕이 내린 임무는 충실히 이행했으니 오늘 받은 모욕과 기사왕의 모습을 본국에 낱낱이 털어놓을 것이다.
사절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 함께 온 일행과 함께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육중한 문이 닫히자, 웃고 있던 눈투성이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기사왕은 웃는 낯 뒤로 그 누구보다 분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타박, 타박, 타박.
눈투성이는 왕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궤짝과 함께 쌓인 보물들은 관심 없다는 듯 옆으로 치우고 그 한가운데 외롭게 놓인 기사왕의 깃발을 쥐었다.
그의 유산은 피와 세월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다시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양손으로 꾹 쥐었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말씀하소서, 폐하!”
“북방에는 아직 많은 야만인이 남아있습니다. 혹여나 사절 행렬이 놈들에게 습격을 받기라도 할까 우려되는군요.”
해안가로 향하는 길에는 야만인이 없다.
아니, 있다고 해도 호위 병력을 지닌 엘프 무리를 습격할 간 큰 놈들은 없었다.
하지만 본뜻은 그것이 아니다.
눈투성이의 눈동자에서 차가운 분노를 읽은 대신들은 기다렸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이 돌려보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당히 모면하려 했다.
웃으며 참으려고 했다.
그러나 북방 왕국의 뿌리마저 건드는 벌레는 감히 곱게 돌려보낼 수 없었다.
“경, 기병을 소집하세요.”
눈투성이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기사왕의 깃발을 돌려주며 오늘 밤 내가 무슨 깃발을 들어야 할지를 명했다.
“그들을 무사히 호위해주어야죠.”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나는 심장 위로 검집을 올렸다.
* * *
“서둘러 옮겨라!”
“식수는 이쪽으로!”
북방 해안가에 임시로 건설된 선착장,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횃불에 의지한 엘프 사절단이 급히 출항을 준비했다.
원래라면 해풍이 부는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해야 하지만, 왕궁에서 돌아온 사절 대표가 오늘 당장 떠날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쉬지도 못하고 동원된 노동에 표정이 좋지 않은 노예들과 엘프 호위병들.
그들은 간절한 술 한 방울을 생각하며 열심히 식량과 식수를 적재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그들과는 달리 왕궁에서 돌아온 사절들은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비싼 독주를 마시고 있었다.
술에 취한 사절이 중얼거린다.
“······건방진 놈들.”
“진정하세요. 다 대가를 치를 겁니다.”
사절로 활동하는 틈틈이 수도로 향하는 길과 병사의 질과 규모 그리고 새로운 기사왕과 나눈 대화까지 모두 기록한 상태다.
수도에서 받은 치욕을 곱씹은 사절은 진한 독주로 화를 달래며 출항만을 기다렸다.
역겨운 산과 싸늘한 바다, 정말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북방 왕국이었다.
찰랑찰랑.
“?”
하지만 술잔을 기울이려던 그 순간 잔에 담긴 술 표면이 파르르 요동쳤다.
분명 배 위가 아닌 지상일 텐데 어디서 흔들림이 전해져 오는 것일까.
술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사절은 문득 일렁이는 횃불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지겨운 산과 함께 선착장으로 바로 이어지는 언덕이 하나 있었다.
찰랑찰랑, 찰랑!
흔들림이 심해진다.
진동이 발아래에서도 느껴진다.
깜짝 놀란 엘프 호위병들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언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있었다.
어둠에서 일렁이는 무언가가.
화르륵!
오직 어둠뿐이던 언덕에 지옥에서 올라온 시뻘건 지옥 불이 밝혀진다.
하얀 털, 하얀 뿔, 칠흑 같은 갑주로 철저하게 무장한 북방 기병대.
그들이 선착장을 향해 돌격을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 - - -!!
사절은 마지막으로 보았다.
자신이 가지고 온 선대 기사왕의 깃발이 당당하게 펄럭이고 있는 것을 말이다.
피에는 피.
모욕에는 모욕을.
보름 뒤 엘프 본국에 도착한 배는 사절단이 아닌 한 주인 없는 난파선이었다.
그리고 그 난파선에는 검성이 직접 가져온 야만인 시체와 함께 철저하게 짓밟힌 엘프 시체들이 마치 한 몸처럼 뒤엉켜있었다.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오던 중 ‘호위’를 받지 못해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