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검은머리 기사왕 68화
만약 이 대륙에 할 일없는 인류학자가 있었다면 평생을 고민하며 살 것이다.
인간과 엘프 그리고 오크를 구분하는 척도가 목, 과, 속, 종 중 과연 무엇인지.
아니면 타 종족을 아종으로 두고 그 기준이 누가 되어야 하는지를 연구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 기준조차 없는 대륙이 인정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북방’에 사는 인간과 ‘동부’에 사는 인간은 분명 같은 종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짤막한 체구, 순수한 눈망울.
태생이 부지런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동부 인간은 태초 북부 인간이 태동했듯 광맥이 풍부한 동부에 터를 잡았다.
그들은 작은 체구를 이용한 채광과 뛰어난 손재주를 이용한 제련으로 그 어떤 종족보다 빠른 철기 시대를 열었다.
당시 수렵과 채집에 의지하던 북방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성세였으며 무려 한 시기 빨리 인간 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울타리가 없는 양 떼는 좋은 먹잇감이듯,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동부 왕국은 집어삼키기 딱 좋은 약자였다.
‘모조리 삼켜라.’
중앙대륙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오크 종족은 인간들이 사는 동쪽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평화롭던 왕국 전역을 집어삼켜 동부 인간을 노예로 삼았다.
광물과 광산은 모조리 착취당했다.
수백 년간 쌓아온 철기 기술은 탐욕스러운 오크가 그대로 흡수했고 쓰임을 다한 장인들은 대를 잇지 못하도록 손이 잘렸다.
무력이라는 절대적인 힘과 강철을 다루는 기술까지 겸비하게 된 오크 종족.
동부 인간이 가진 여력을 모조리 뽑아 먹은 오크 놈들은 유목 민족에서 벗어나 중앙대륙을 지배하는 커다란 제국을 세웠다.
하지만 그런 비참한 동부 왕국이 딱 한 번 오크에게 저항하던 역사가 있었다.
바로 북방 왕국을 세운 인간 영웅, 기사왕이 준동하는 영광스러운 때 말이다.
‘북부 형제.’
‘동부 형제.’
같은 인간이라는 유대감은 그 어떤 동맹과 맹약보다 강한 힘을 발휘했다.
북부 왕국은 동부 왕국이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왔고 동부 왕국은 북부 왕국이 싸울 수 있도록 열심히 강철을 생산했다.
긴 역사를 가진 대륙에서 인간이 가장 큰 성세를 자랑하던 시기인 황금시대.
‘강철 동맹’이라 명명된 그 두 왕국은 영원한 영광을 이룩하는 듯했다.
하지만 기사왕이 죽고,
북방 왕국은 멸망했다.
대륙 위에 홀로 남은 동부 왕국은 결국 살기 위한 항복을 선택했다.
그렇게 9년이 지난 지금.
동부 왕국은 허울뿐인 속국으로 남아 오크 제국을 위해 운영되고 있었다.
“폐하, 작년보다 생산량이 줄지 않았습니까? 광부들을 독려하시지요.”
“독려보단 채찍이 낫습니다. 원래 때려야 말을 듣는 게 인간인지라.”
때려야 말을 듣는 게 인간이라.
이게 과연 같은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심히 의심이 든다.
하지만 국무회의에 참석한 신하 중 그런 그를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이 제국에 아부하며 살아온 간신들뿐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번 달 물량은 어떤 분에게 가져다줘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저번처럼 2황자가 맞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영민하신 분이던데.”
“그래도 서열을 따져야죠. 누가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중앙대륙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은 2황자가 다스리는 영토인 비명의 협곡뿐이다.
그렇기에 한참 내전이 진행 중임에도 동부 왕국에서 넘어오는 풍부한 조공 물자는 전부 2황자가 독점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유리한 상황에도 현 세력은 균형은 2:1:1를 지키는 묘한 상황이었다.
워낙 1황자가 가진 영토가 넓기도 했고 또 다른 형제인 3황자 또한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과연 어떤 황자에게 빌붙어야 영원한 영달과 부를 지키며 살수있을까.
신하들은 왕국이 겪는 고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물론 곡물을 쪼기 전 허수아비한테 의견을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폐하?”
“······경들의 뜻대로 하시오.”
“생각하신 바가 없으십니까?”
“······경들의 뜻대로 하시오.”
왕좌에는 동부 왕이 앉아있었다.
하지만 왕관만 쓰고 있을 뿐 추레한 몰골과 생기 없는 목소리는 왕이 아닌 시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볼품없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제 손으로 백기를 들어 왕국을 가져다 바친 왕이 무슨 의지가 있겠는가.
동부의 왕 빌헬름 2세는 같은 말만은 반복하며 회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럼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흐뭇하게 웃은 간신들은 어디에 물자를 바치면 좋을지 열띤 토론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통치하지 않는 왕과 간신뿐인 신하.
이미 멸망했어야 할 망국은 그렇게 동부 인간들의 고혈을 쥐어짜며 역겹고도 불쾌한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변화하는 북부의 흐름은 동부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소문을 들은 한 신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 소식들 들었나?”
“예?”
“북방 왕국이 다시 건국되었다는군.”
오크 식민지를 멸망시킨 새로운 기사왕이 멸망했던 북방 왕국을 다시 건설했다.
과거 그들과 함께했던 동부 인간들은 그 소문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이 간신들은 일관적이었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습니다.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랬답니까?”
“쯧, 무식한 북방 놈들이 그렇지. 우리한테 피해만 없었으면 좋겠군.”
강철 동맹은 옛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축하 사절은커녕 제 안위만 걱정한 간신들은 그렇게 국무회의를 파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은 왕과 신하들뿐만이 아닌 듯했다.
모두가 떠난 왕궁 한편,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서 한 동부인 청년과 함께 중년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뚜벅, 뚜벅, 뚜벅.
작지만 당당한 어깨, 순수함과 열정이 공존하고 있는 빛나는 눈동자.
동부 왕국의 왕자 리처드는 유일한 우군인 기사 로날드를 향해 물었다.
“······저들 말이 사실인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왕자님.”
저 간신 놈들은 왕과 자신의 귀를 막고자 궁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소문을 통제했다.
하지만 멀쩡한 이 두 귀로 직접 듣는 것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다.
기사왕의 후계가 왕국을 다시 세워졌다.
어린 시절을 황금시대와 함께 한 리처드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건 무능한 왕인 아버지와 저 간신들을 끌어내리고 고통받는 동부 인간과 속국인 왕국을 구원할 유일한 기회다.
리처드는 드디어 무언가 결심이 선 듯, 굵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들과 만나야 한다.”
“기사왕과 말입니까?”
“그래, 만나서 도움을 청할 것이다.”
작금의 상황이 과거와 다르지 않다.
동부 왕국이 오크 지배하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사왕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문제는 리처드는 왕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명할 권리도 공식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도 없었다.
워낙 무능한 왕인 아버지와 간신인 신하들 간에 잦은 다툼으로 인해 대부분 권력을 빼앗긴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축하 사절을 보낼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동부 왕국,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마땅한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절망하는 리처드와는 달리 기사 로날드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왕자님, 방법이 있습니다. 왕국 밖으로 나가는 상단이 있지 않습니까?”
“상단? 왕국 상단을 말하는가?”
말이 좋아 왕국 상단이지 오크 놈들에게 물자를 가져다 바치고 얻은 저급 식량을 동부인에게 비싸게 파는 간신들 돈주머니다.
다만 개똥에도 쓸 일이 있다는 듯 기사 로날드는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상단 중간 관리직에 제게 빚을 지운 직원이 있습니다. 상단과 동행해 저와 함께 북방으로 빠져나가시죠.”
일단 북방에 도착만 할 수 있다면 무릎을 꿇어서라도 도움을 청할 생각이다.
아니, 이런 결심을 한 그 순간부터 목숨을 내놓는 거나 마찬가지다.
벼랑 끝에서 무엇이 두려우랴.
리처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왕실 몰래 지겨웠던 동부를 빠져나갔다.
* * *
대관식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다.
일단 가장 먼저 눈투성이는 내 옆보다 왕좌에 앉아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이제 왕으로서 체통이란 것 또한 지켜야 했다.
처음에는 워낙 자유분방한 아이라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그 점을 고려해준 넉넉한 개인 시간 덕에 다행히 잘 적응해나갔다.
변화는 당연한 거다.
나 또한 새롭게 세워진 북방 왕국과 맞춰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어야 했다.
‘기사단장, 부러지는 검.’
직위와 관련해선 갑론을박이 많았다.
나를 과연 과거 직위였던 단장으로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북방군을 통솔하는 원수로 두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이다.
물론 업무량에 질색한 나는 적절한 권한 분할을 요청했고 졸지에 원수가 된 회색 늑대와 함께 북방군을 꾸리게 되었다.
푸른 손의 빈자리가 참으로 크다.
나는 적보다 업무가 무섭다던 회색 늑대 옆에서 조용히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툴툴거림도 잠시, 성공적인 봄 파종과 마을 재건으로 한숨 돌리나 싶더니 그동안 외면했던 온갖 사안이 쏟아져 내렸다.
재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제일 시급한 건 국경 방어에요. 백색 관문을 되찾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북방은 뒤로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거대한 산맥이 존재하며 양옆으로는 바다가, 앞으로는 높은 산들이 진로를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고립된 북방에도 대륙을 이어주는 넓은 통로가 한 곳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기사왕이 세운 백색 관문이었다.
회색 늑대가 입을 열었다.
“가장 인접한 영토가 2황자라고 했나?”
“네, 음흉한 놈이죠.”
한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험준한 산세는 아무리 북방인이라 해도 감히 넘어가려 하지 않는 천혜의 장벽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점도 북방과 중앙대륙을 이어주는 백색 관문이 없다면 그저 문이 저절로 열리는 헛간에 불과했다.
재상의 말이 맞았다.
국경 방어를 위해서는 관문이 필요했다.
“만약 관문을 되찾는다면.”
그 순간 왕좌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국무회의에 모인 모든 이들이 기사왕 눈투성이를 향해 예를 표했다.
“다시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만약 관문을 되찾는다면 다시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그것은 짧은 순간 모든 핵심을 통찰한 물음이었다.
나는 모든 이들을 대표해 말했다.
“장담합니다, 폐하.”
관문에서 장차 수십 년을 버텼다.
아마 내부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평생 뚫리지 않았을 난공불락의 관문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을 찾아보죠.”
어차피 깨트려야 할 둑이다.
만약 관문 탈환만 성공한다면 오크 본토와의 전면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가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입을 다물었던 대신과 기사들은 자신이 경험한 변수와 주변 지형을 하나둘 내뱉으며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산을 넘는 건 어떻습니까?”
“미쳤나? 다 얼어 죽어.”
“잘 생각해보니 오른쪽 하부 성벽이 많이 약했던 것이 기억난다. 거기를······.”
“다 보수한 지 오래입니다.”
썩 괜찮은 의견이 오고 갔다.
물론 직위 상관없는 자유로운 토론이었고 신이 난 눈투성이 또한 왕좌에 편한 자세로 앉아 이야기를 경청했다.
하지만 그 순간 문이 열린 복도에서 침착하면서도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회의 중 찾아온 이는 부장에서 근위병으로 승급한 낯이 익숙한 중년 병사였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워낙 급한 사항이라 제가 직접 전달을······.”
“괜찮으니, 말하라.”
“엘프 사절이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