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검은머리 기사왕 67화
‘개굴개굴.’
동면에서 깬 개구리는 놀랐다.
봄이 온 줄 알고 일어났는데 눈이 녹기는커녕 추위조차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후손을 남겨야 하는데!
본인의 멍청함을 탓한 개구리는 쌀쌀한 초봄 추위와 함께 얼어 죽었다.
‘깩!’
하지만 덧없는 죽음은 아니었다.
멍청한 개구리가 남긴 교훈은 파종만을 꿈꾸던 농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인내하는 하루, 기다리는 이틀.
그렇게 보름이 지나 북방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진정한 봄이 찾아왔다.
바야흐로 파종의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어머니 북방께 감사합니다.’
농부들은 열심히 농지를 갈았다.
그리고 촉촉한 농지를 맨발로 거닐며 생명이 될 씨앗을 열심히 뿌렸다.
농사는 언제나 고된 노동이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한 파종을 지겨워하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북방 인들에게 있어 푸르른 봄은 착취와 절망의 계절이 아니었다.
독려와 재촉은 필요하지 않았다.
눈이 쌓여 하얗던 토지는 어느새 씨앗이 뿌려진 갈색 농지로 변했고 쟁기를 든 농부들 사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물론 그런 희망찬 분위기 뒤에는 대대적인 국가사업을 주도한 재상이 있었다.
기억하는 새는 9년간 수탈당했던 식민지 북방의 체질 개선을 시작한 것이다.
‘대계를 그리려거든 천년 위에 그려라.’
토질 조사가 시작되었다.
허술하던 농, 휴경지 구분은 조사된 자료를 기반으로 적절하게 분배가 되었고,
지력을 많이 잡아먹는 기호, 사치 농작물들은 품목에서 과감하게 배제했다.
넘쳐나는 천연자원도 빼먹을 수 없다.
왕국 주도하에 지어진 대규모 벌목장과 제재소에는 남아도는 인력들이 전부 동원되어 수많은 목재를 생산했다.
북방이 수복되었는데 무엇이 걱정이랴.
그동안 숙영지만을 지어오던 목수들은 드디어 오크 놈들이 아닌 왕국 주민을 위한 터전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따악! 딱!
어어! 넘어간다! 제대로 잡아!
왕궁에서 내려다본 수도 풍경은 정말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물론 북방의 보석이라 불리던 옛 모습은 아직 찾아볼 수 없었지만, 다시 일어선다는 희망이 그 풍경마저 아름답게 만들었다.
이제야 한 발자국이다.
안개처럼 흐릿하던 왕국 재건의 길이 쌓아 올린 터전 아래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록색으로 물들던 북방 땅에 아기자기한 꽃들이 필 무렵.
우리는 그 시기가 왔음을 짐작했다.
내가 꾸었던 춘몽이 나비가 되어 날아왔다.
* * *
척, 척, 척, 척!
와아아아아아 - - -!!
수도 외곽 병영에서 출발한 북방군이 중앙 큰길을 지나쳐 왕궁으로 걸어왔다.
새로운 기사왕의 위엄을 널리 퍼트리고자, 아침 일찍 열병식을 벌인 것이다.
당연히 수도 주민들은 거리로 나와 해방 이후 처음인 열병식을 구경했고 늠름한 병사들을 향해 아낌없이 환호를 보냈다.
사방에서 던져대는 아름다운 꽃들과 즐겁게 웃으며 돌아다니는 아이들.
엄숙함 대신 자리 잡은 자유분방함은 눈투성이가 추구하고자 한 가치와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듯했다.
척! 척! 척!
“부대, 정지하라!”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주민들과 웃으며 행진하던 병사들은 인솔자인 거친 귀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걸음을 멈췄다.
마치 강철과 같은 굳센 부동.
거리를 노닐던 주민들은 눈치껏 뒤로 물러나 왕궁이 잘 보이는 지붕 위로 올라갔다.
곧 대관식이 시작된다.
샛별처럼 반짝이는 주민들의 눈에는 설렘과 환희가 별처럼 깃들어 있었다.
끼이이익, 쿵!
척! 척!
굳게 닫혀있던 왕궁 문이 열렸다.
그 순간 기립하고 있던 북방군은 왼쪽 손으로 무기를 들었고 오른쪽 손으로는 절도와 존경이 느껴지는 예를 보냈다.
타박, 타박, 타박.
새하얀 대리석 바닥을 밟는 작은 보폭,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
붉은 강철이 밤낮없이 두드려 만든 새하얀 플레이트는 빛을 받아 반짝였고,
선대가 내린 왕의 검은 그 빛과 함께 세상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참으로 눈부신 광경이었다.
참으로 벅차오르는 순간이다.
한낱 노예였던 소녀 눈투성이는 자신을 따라온 군과 만백성 앞에 당당히 섰다.
‘너희와 운명을 거스르겠다.’
길게 불어온 훈풍이 바닥에 늘어진 야생화들을 살포시 들어 올렸다.
마치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후우······.”
이제 우리가 나갈 차례다.
회관에 모여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은 순금 왕관을 운반하는 붉은 강철의 뒤를 따라 어두운 정문 복도를 걸었다.
뚜벅, 뚜벅, 뚜벅.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여전히 실감이 되지 않는 동료들은 어울리지 않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표정을 굳힌 회색 늑대는 이 말만큼은 꼭 해야겠다는 듯 무거운 입을 열었다.
“검성.”
“······말해라.”
“네가 옳았다.”
무엇이 정답이었을까.
어떤 방법이 옳았던 걸까.
모든 여정은 선택의 연속이었고 선택은 항상 내 앞길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누더기가 된 꿈 앞에서 나는 진정한 정답이 무엇인지 찾았다.
그것은 늙고 낡은 이 손안이 아닌 끝내 왕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킨 아이에게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
나는 발을 디뎠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가 방황이라는 어두운 통로를 이제야 벗어났다.
옅어지는 빛 번짐.
어두운 통로의 끝.
커다란 정문마저 당당하게 넘어 빛과 수많은 군중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입에서 주체할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심장이 떨렸다, 숨이 가빠온다.
그 어떤 고통보다 아픈 이방인의 번데기가 지금 이 순간 한 꺼풀 벗겨져 내렸다.
“스승님.”
눈투성이가 조용히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여전히 스승이라 부르며 한쪽 무릎을 조용히 꿇는다.
왕관을 받기 위한 조아림이 아닌 새로운 시대를 이끈 인간을 향해 경의를 표한다.
어느덧 한자리에 모인 일행들이 기사들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눈투성이가 입을 열었고,
그 뒤에는 기사왕이 있었다.
“지고한 검성, 제 경의를 받으세요.”
‘명예로운 검성, 내 경의를 받아라.’
“당신은 홀로 왕의 유훈을 따랐어요.”
‘무거운 책임마저 너 혼자 짊었지.’
“오로지 당신만이.”
‘오로지 한 기사만이.’
“그 끝내 책무를 다했군요.”
‘기어코 맹세를 지켰다.’
나는 떨리는 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북방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왕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어떠한 함성도 소음도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 나 혼자만이 남겨진 듯 하늘은 그 어떤 때보다 가깝게 있었다.
9년간 흐르지 못했던 설움이 흘러내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뿌옇게 물들었고 끝내 이루어냈다는 성취가 나를 비로소 웃음 짓게 했다.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기사왕이 왜 내게 무거운 책임을 맡겼는지, 왜 머나먼 길을 돌아오게 했는지.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로 그동안 쌓였던 설움과 고통을 모두 흘려보낸다.
그리고 새롭게 일어설 북방과 새롭게 태어날 기사왕을 위해 기꺼이 외쳤다.
“네가 흘린 피가 적통을 증명했고 네가 흘린 땀이 정통을 증명했다! 수많은 선조가 스러져간 이 땅 위에 왕이 되고자 일어난바! 맹세한 자는 지금 이 자리에서 검을 뽑으라.”
나는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양손을 내려 오늘 새로 태어날 눈투성이 머리 위에 순백으로 빛나는 왕관을 올려두었다.
그 순간 흐릿하게 남아있던 눈투성이의 모습은 사르륵 녹아내렸고 눈이 오는 날 약속했던 새로운 기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릉!
기사왕은 망설임 없이 왕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은 뒤 반짝이는 날과 이마를 조용히 맞대었다.
치지지직.
하얀색 오러가 끓어오른다.
손잡이에서부터 시작된 오러는 왕의 검을 집어삼켰고 날에는 직인을 찍은 듯 선명한 무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방이 남기는 운명의 또 다른 이름.
왕국의 대장장이 붉은 강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검 앞으로 다가갔다.
모두가 간절히 기도하던 그 순간,
눈투성이는 세상을 향해 물었다.
“내 무명(命)은 무엇입니까?”
무명과 운명.
운명과 무명.
과거를 딛고 일어난 내게 앞으로 주어진 운명은 과연 무엇입니까?
눈투성이는 하늘을 향해 간절히 물었다.
그러자 무명을 읽은 붉은 강철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흐흐 웃음을 터트린다.
오늘 본 무명은 평생을 함께할 진실이다.
그는 하늘 아래 맹세하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북방이 다녀가셨다. 오늘 탄생한 무명의 이름은 한 치 거짓 없는 진실.”
그의 입에서 무명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왕.”
위대한 자는 핏줄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선대 기사왕이 그토록 바랬던 왕의 후계가 지금, 이 순간 왕위에 올랐다.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야만의 시대가 지나 인간의 시대가 왔다.
* * *
띠리링, 띠링.
꺄하하하!
천만금을 주어도 사지 못하는 귀한 엘프 술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다.
아픈 자를 금세 낫게 한다는 신묘한 과일 또한 한낱 돌멩이처럼 주변에 널려있다.
악사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하프, 웃음이 마르지 않은 성대하고 화려한 연회.
자고로 이곳은 천국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아름다운 숲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천국은 착하고 신실한 자를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엘프 왕국에선 그런 천국마저 왕족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당연히 영원히 늙지 않는 엘프 여왕 엘렌도르가 있었다.
누워서 포도를 받아먹던 엘렌도르가 자신을 찾아온 사제에게 물었다.
“정말이더냐?”
“예, 순찰대가 확인한 사실입니다.”
“하하, 병신 같은 오크 놈들. 제국을 칭하더니 하는 짓은 여전히 돼지로구나.”
북방 왕국이 다시 세워졌다는 소문은 어느덧 엘프가 있는 서부 숲으로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다양한 반응을 보인 오크 세력과는 다르게 여왕은 태연한 태도로 달관했다.
아무래도 국경이 인접하지 않은 북방 왕국은 엘프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 끽해봐야 바닷길 정도일까.
이미 모든 바다를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는 엘프에게 인간 놈들은 착취의 대상이지, 절대 위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재밌군.”
그리고 그 점을 너무나 잘 아는 엘프 여왕은 재밌다는 한마디로 감상을 끝냈다.
하지만 짧은 감상과는 다르게 두 눈에는 흥미라는 감정이 맴돌기 시작했다.
퉤.
마침 유희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여왕은 먹던 경박하게 포도 씨를 뱉으며 고개 숙인 사제를 향해 말했다.
“즉위했으면 축하 사절을 보내야지.”
“예? 그게 무슨······.”
북방과 엘프는 적대국이다.
기사왕을 죽음으로 몰고 갔었던 인물이 바로 지금은 세계수 아래 잠들어 있는 엘프들의 불멸왕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왕은 그것을 알면서도 북방 왕국의 축하 사절을 보내려 했다.
“뱃길을 건너 축하 사절을 보내라. 선물은······ 음, 그래. 기사왕의 깃발이 좋겠군.”
과거 전쟁에서 기사왕을 죽이고 그 깃발을 노획해 가지고 왔던 엘프들.
여왕은 지금 북방 왕국의 치욕을 축하 사절과 함께 보낸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상 전쟁 도발이나 마찬가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제가 반문했다.
“당, 당연히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사신의 목이 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과거로부터 배운 교훈이 있다면 응당 엎드려야지.”
“아! 역시 영민하십니다!”
치욕을 감내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전선이 두 개로 나뉘었던 과거의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
멍청하게 검부터 들이미는 건 하책이다.
자고로 엘프 왕족의 견제란 이런 고상한 품격을 통해 펼치는 것이다.
비열하게 웃은 엘프 여왕은 다시 나른하게 누워 욕심이 번들거리는 입을 벌렸다.
그러자 억지로 웃은 노예가 입안으로 달콤한 포도 한 알을 넣어주었다.
까드득.
“퉤!”
“아······! 아아!”
하지만 입안에 넣은 포도 안에는 달콤한 과실 속에 숨은 딱딱한 돌조각이 들어있었다.
여왕은 인상을 찡그렸고 포도를 손수 먹여주던 노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왕은 흥이 식은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잘, 잘못했습니다, 여왕님! 제발 자비를! 제발 자비를 베풀······ 꺄아아악!”
겨우 실수했다는 이유로 노예를 죽인 여왕은 껄끄러운 얼굴로 다시 누웠다.
입안에 남은 돌가루는 아무리 뱉고 또 뱉어도 이상하리만큼 찝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