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검은머리 기사왕 66화
한참 승리라는 영광에 취해 있었다.
8년간 이루지 못했던 북방 수복이라는 염원을 드디어 이룬 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들춘 장막 뒤에는 전쟁이 남기고 간 화마와 어둡고 칙칙한 전황만이 미래를 잠식하고 있었다.
북방 왕국과 인간들의 미래를 논하기도 전에 당장 먹고 살기 위한 발버둥을 쳐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만 것이다.
많은 주민이 유랑민이 되었다.
인구 대부분이 숙영지 노예 출신이던 주민들은 오크 놈들의 철저한 말살 정책으로 인해 돌아갈 고향이 잃고 말았다.
당연히 식량 공급은 한동안 지체되었고 피난민들을 수용한 스프링 로드는 한동안 식량 배급제를 이어나가야 했다.
내년 봄을 위한 파종은커녕 당장 겨울을 보낼 고민부터 하게 생긴 우리.
모두가 기대하고 있던 수도 입성 행사는 자연스레 취소되었으며 눈투성이의 대관식 또한 내년 봄으로 미뤄지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맨땅에서 왕국을 만들어낸 걸출한 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딸이 무사히 살아있음을 확인한 기억하는 새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눈투성이를 향해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하며 기꺼이 재상직을 맡았다.
‘흠!’
9년 만에 왕궁 집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길게 자란 머리를 질끈 묶었다.
그리고 마치 현역 시절로 돌아간 듯한 얼굴로 왕국 내정은 선두지휘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급한 불을 끄는 것이다.
소방수로 투입된 기억하는 새는 가장 먼저 흩어진 정보를 수집했다.
‘모든 정보를 가져오세요. 각 영지 생산량, 농지, 인구, 바구니 숫자까지요.’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관리되던 행정 기록과 서류가 전부 수도로 이관되었다.
재상은 그런 기록을 모아 체계화된 하나의 문서로 만들었고 심지어 양식까지 통일시켜 앞으로 이뤄질 행정 업무에 힘을 보탰다.
마치 어지럽던 방을 정리하듯 버려야 하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정리가 필요한 건 세심하게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꼬이고 누락되고 사라졌던 물자와 인력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으며 북방 왕국은 100% 효율을 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말 차원이 다른 역량을 가졌다.
엘프마저 탐냈던 능력을 다시 한번 실감한 나는 최선을 다해 행정 일을 도왔다.
그리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또 두 달.
정신없는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갈때쯤 북방에는 드디어 안정이 찾아왔다.
비록 척박한 농지와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지만, 대규모 혼란이 일어나는 것만큼은 끝내 막아낸 것이다.
희망은 인내라는 양분을 먹고 자란다.
봄에 뿌릴 씨앗을 지켜낸 북방 인간들은 절제된 궁핍함에서 잠재된 풍요를 보았다.
어머니 북방이여 영원 하라.
참으로 힘겨웠던 겨울이 지나, 얼어붙은 눈을 녹이는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끼익, 덜컹.
오전 일찍 나와 함께 집무실을 빠져나온 눈투성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재상님 너무 무서워요.”
“하하.”
행정 일을 배웠다는 이유로 졸지에 붙잡힌 나와 눈투성이는 한동안 재상과 함께 열심히 내정 일을 도와야 했다.
하지만 왕국 상황이 서서히 안정되면서 인력 여유가 많이 생겼는데,
나와 눈투성이는 대관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핑계로 해방될 수 있었다.
이 얼마 만에 자유인가.
싱글벙글 웃은 나와 눈투성이는 가장 먼저 왕궁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꽤 오랜 시간 검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오늘 왕궁 연무장을 소개해줄 겸 검이라도 한번 나눠볼 생각이었다.
9년 만에 여는 곳인데 괜찮겠지.
내가 두꺼운 문을 힘껏 밀자 익숙한 풍경과 함께 연무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스승님 너무 멋져요.”
붉은 강철이 말하길 연무장 건설 당시 신비하고 기묘한 힘이 깃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왕궁 연무장은 9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흰 눈처럼 하얀 대리석 바닥과 빛의 오로라가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창문.
어디선가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은 퀴퀴한 공기와 세월조차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의 성지가 아닌가.
나는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발을 디디며 연무장 중앙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기사왕도 여기서 수련하셨나요?”
“그래,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셨지.”
이 커다란 왕궁 연무장은 무기를 다루고 싶은 자라면 누구든 입장이 가능했다.
물론 그것은 정점이었던 기사왕도 마찬가지였는데, 전쟁이 없는 날이면 언제나 새벽 일찍 일어나 이곳을 방문했다.
참 그리운 시절이다.
수많은 인간이 모여 대련하고 열띠게 토론하던 그 젊었던 시절이 말이다.
나는 문득 몰려오기 시작하는 그리움에 방긋 웃으며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다가온 눈투성이를 향해 미뤄두고 있었던 말을 물었다.
“오러의 응집을 보았구나.”
“예, 스승님.”
“장하다. 역시 내 제자야.”
오러를 느낄 수만 있었던 눈투성이가 드디어 오러 응집 단계에 들어섰다.
드디어 오러를 형상화해 어머니 북방으로부터 무명(武名)을 받은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휘둘렀다.
채앵!
눈투성이가 기다렸다는 듯 반응한다.
하지만 그 자세는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유연함과 강직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더 빨라지고 더 강해졌다.
내 기술을 빠른 속도로 흡수한 제자는 어느덧 5형의 경지까지 엿보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눈투성이와 함께 계속해서 검무를 나누었다.
9년간 조용했던 연무장은 검과 검이 나누는 대화 소리로 가득해졌다.
챙! 채앵!
파르르······!
휘두르고 막고 찌르고 벤다.
그저 단순한 과정이지만, 모든 형은 이런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다.
한가지 이치가 세상사 진리를 관통하듯 단순함 또한 모든 경지의 기반이다.
그리고 눈투성이는 그 사실을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깨닫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노력까지 겸비한 왕의 후계.
아니, 이제 진정한 왕이라고 봐도 좋았다.
채앵!
나는 몰려오는 뿌듯함에 힘을 더했다.
그러자 눈투성이는 입술을 꽉 깨물며 진지한 태도로 검을 나누었고 결국 손가락 하나를 접듯 간단히 오러를 응집했다.
지지지지지직 - - - !
오러는 백색이었다.
잡기가 아니라는 것을 뜻하듯 무명은 분명 새겨져 있었고 그 날카로움 또한 강철로 만든 검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하나, 읽을 수 없는 무명과 마주한 눈투성이는 표정이 시무룩했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게 분명한 기색, 나는 가볍게 검을 집어넣으며 그 이유를 물었다.
“걸리는 게 있니.”
“······마음이 어지러워서요.”
웬만하면 혼자 고민해보고 나중에 그 해답을 찾는 편인 눈투성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먼저 말을 꺼낸 것을 보아 고민이 꽤 깊은 듯 보였다.
혼자 무슨 고민을 하고 있길래 가장 몰두하던 검술마저 주저하고 있는 걸까.
한동안 입술을 우물거린 눈투성이는 마찬가지로 검을 집어넣으며 내게 물었다.
“무명은 앞으로의 길인가요?”
“·········절대적인 건 아니다. 그렇다고 허구인 것 또한 아니지.”
무명은 세상이 주는 이름이라 했다.
회색 늑대가 이름을 바꿨듯 한 사람의 운명을 멈출 수도 혹은 역으로 변할 수도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무명이다.
이런 짧은 말로 설명되었을까.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눈투성이는 한 가지 더 내게 질문했다.
“저는 왕이 되려고 해요.”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지.”
“그럼 그걸 무명도 알아줄까요?”
선대 기사왕의 무명이 ‘북방의 왕’이었다는 것은 유명한 전설이다.
아니, 즉위식 때 수많은 영웅이 함께 있었으니 분명한 사실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그 어떤 출신과 명분보다 기사왕의 정통성을 상징해주었던 거룩한 무명.
나는 눈투성이가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 뒤늦게 눈치챌 수 있었다.
“대관식을 걱정하는구나.”
곧 다가올 대관식, 눈투성이는 왕의 왕관과 기사의 무명을 동시에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기사임과 동시에 왕인 기사왕의 자격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실망할까 봐요.”
평소 어른처럼 행동하던 녀석이 이럴 때는 어린 애가 되고는 한다.
나는 시무룩 고개를 숙이고 있는 눈투성이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주었다.
“만약 받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좋은 무명을 받으면 좋다.
하지만 받지 못한다고 해서 눈투성이의 운명이 뒤바뀌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눈투성이가 어떤 노력을 했고,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말이다.
“너는 스스로 증명했다.”
“······스승님!”
금세 기운을 차린 녀석이 안겨 온다.
분명 콩알만 하던 아이였는데, 이제 왕이라고 제법 무거워진 게 느껴진다.
나는 픽 웃으며 여전히 체통을 지키지 못하는 눈투성이를 나무랐고 이내 넣어두었던 검을 함께 뽑으며 말했다.
“수련하자. 갈 길이 멀구나.”
“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연무장 바닥에는 어울리는 발자국 한 쌍이 춤을 추고 있었다.
* * *
“삼키세요.”
스읍.
“이제 뱉으세요.”
후우.
내 심장 위에 손을 올려둔 기억하는 새는 한동안 심장 박동과 숨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검진이 끝났는지 작은 한숨과 함께 잡티 한 점 보이지 않는 이마를 가렸다.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학자를 꼽자면 역시 기억하는 새가 손에 꼽힌다.
그렇다 보니 자주 검진을 맡기고는 했는데, 오늘은 무려 9년 만이었다.
증세는 미리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실력이 녹슬지 않은 학자답게 어디가 문제인지 단번에 알아냈다.
“심장과 폐가 많이 약해졌어요. 전투 중 갑자기 숨이 차거나 막히셨죠?”
“검을 휘두르다 보면 당연히······.”
“아뇨, 보통 기사들은 안 그래요.”
한 2년 전부터 오러를 지닌 적과 싸울 때마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프고 한순간 숨을 쉬지 못할 때가 있었다.
물론 증세가 빈번하지 않아 그동안 무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지는 것이 스스로 체감이 될 정도였다.
무언가 큰 병이라도 걸린 걸까.
기억하는 새는 슬픈 얼굴로 이런 증세가 생기게 된 원인을 말해주었다.
“오러에 노출돼서 그래요. 검성 당신은 몸을 보호해 줄 오러가 없으니까요.”
“내상을 말하는 건가.”
“아뇨, 내상과는 조금 달라요. 그건 다스릴 수라도 있지, 이건 아니니까요.”
그래, 이제야 이해가 된다.
사용자의 의지를 받은 오러는 칼이 되기도 하고 화살이 되기도 한다.
검조차 가볍게 두 동강 내는 오러인데, 그것을 막아내는 몸이 오죽하겠는가.
아마 눈에 보이지 않는 오러 조각들이 바늘처럼 내 몸을 쑤시고 있었을 것이다.
부러지는 검이라는 이름을 따라가는 건가.
정작 검이 부러지는 건 알면서도 내 몸이 부러지는 건 모르고 있었다.
한숨을 쉰 기억하는 새가 내게 말했다.
“제가 약을 조금 지어드릴게요. 하지만 그게 근본적인 해결법은 아니에요.”
“다른 방법은?”
“오러 사용자와 되도록 싸우지 마세요. 이건 단순한 충고가 아니에요.”
오러 사용자와 전투를 피하라.
사실상 그동안 내 검술이 추구해온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기억하는 새조차 부상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날카로운 검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덧없이 녹슬 듯 늙어버린 인간은 둘 중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때가 있으니까.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벗어두었던 겉옷과 검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시간을 할애해준 그녀를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시간 내줘서 고맙다. 그래도 덕분에 무엇이 원인인지 알았어. 별 탈 없지?”
“······검성과 폐하 덕분에요.”
“모두 그 녀석 덕이지.”
다행히 오목눈이는 별다른 후유증 없이 잘 적응하며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새로운 터전을 찾은 새들이 별 탈 없기를 바라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럼 대관식 때 보자.”
“조심히 들어가세요, 검성.”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밖을 나서자, 어느덧 많이 따뜻해진 바람이 내 새된 백발을 스치고 지나갔다.
초봄은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