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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65화 (65/181)

65화

검은머리 기사왕 65화

사박.

눈이 그친 것을 확인한 남자는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나무를 조용히 한쪽으로 치웠다.

그러자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 숲이 좁은 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꿀꺽.

평소와는 달리 숲은 조용했다.

간혹가다 보이는 오크 사냥꾼조차 이틀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걸 보니, 정말로 무슨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설마 전쟁이 끝나기라도 한 걸까.

차가운 이끼와 벌레로 끼니를 겨우 연명 중이던 남자는 혹시 모를 희소식만을 기다리며 다시 한번 틈을 막았다.

그리고 동굴 안쪽으로 다시 들어가자, 작은 호롱불에 의지한 아내가 잠이 든 오목눈이를 정성스레 돌보고 있었다.

“아이는 좀 어때?”

“으응, 여전히 열이 있어.”

힘든 삶을 살아온 부부에게 있어 이런 고난은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직 작고 여린 오목눈이는 이런 험한 환경을 버틸 수가 없었는지 결국 열이 오르는 병을 얻고 말았다.

그나마 부부가 정성으로 돌봐주어서 다행이지, 만약 혼자였다면 벌써 북방 하늘 아래 외로운 별이 되지 않았을까.

아내는 웅크린 채 잠이 든 오목눈이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듬었다.

누군가는 짐이라고 말하겠지만, 부부에게 있어 아이는 힘들고 고된 도피 생활에 활력을 주었던 소중한 활력소였다.

친자식을 잃고 한동안 방황하다, 우연히 만난 아이 덕에 활력을 찾은 아내.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남편은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가죽 가방을 챙겼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밖에 나가서 뭐라도 사냥해서 올게.”

바깥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하려면 지금이 기회다.

남편은 주변을 좀 둘러볼 겸 제대로 된 식량과 약재를 구하고자 했다.

“미, 미쳤어? 절대 안 돼!”

당연히 기겁한 아내는 나가려는 남편의 발목을 부여잡으며 극구 반대했다.

아무리 억척스럽게 살았다고 한들 오크 사냥꾼이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괜찮다니까!”

“안돼! 절대 안 돼! 나갈 거면 차라리 같이 나가! 당신 죽으면 나는 못살아.”

결국, 발목이 붙잡혀 나가지 못하는 남편과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내.

조용하던 동굴은 옥신각신 싸우는 부부로 인해 시끄럽게 변하고 말았다.

사박.

“?”

하지만 그 순간 동굴 밖에서 눈을 밟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사박, 사박.

“- - - - - - -!”

남편은 얼굴을 굳히며 단검을 쥐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아내는 오목눈이를 꼭 끌어안은 채 마찬가지로 돌을 쥐었다.

누군가 동글 근처까지 왔다.

발소리 이후로 무리가 웅성거리는 소음이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크 사냥꾼인가?

제발 아무런 의심 없이 돌아가 주면 좋으련만, 하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묵직한 무언가가 걸어오는 소리에 부부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거기 사람이오?”

횃불로 인해 동굴이 밝아진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오크 사냥꾼이 아닌 한 늠름하게 생긴 북방군이었다.

설마 이곳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는 그 병사.

순간 다리가 풀린 부부는 눈부신 횃불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여기에 사람이 숨어 있을 줄이야. 이봐! 여기 따뜻한 물이라도 가져와!”

“댁, 댁들은 누굽니까?”

“아······. 그래, 소식을 못 들을만하군. 북방군이 전쟁에서 이겼소.”

전쟁에서 승리한 북방군은 가장 먼저 병사들을 파견해 오크 영역에 고립되거나 숨어 있던 주민들을 구출해냈다.

하지만 그것을 알 턱이 없는 부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말 북방군이 이겼다고?

그 무서운 오크 놈들을 물리치고?

얼떨결에 북방군 병사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생소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웅성웅성.

덜그럭, 덜그럭.

“아······.”

거짓말이 아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어있던 길에는 늠름한 북방군 병사들과 함께 수많은 피난민 무리가 수레를 끌며 걸어가고 있었다.

밝은 미소, 힘찬 발걸음, 숲을 가로지르는 행렬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제야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한 부부는 피난민 행렬을 따라가려 했다.

“잠깐만, 그 아이.”

그 순간 동굴로 찾아왔던 북방군 병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길을 막았다.

두꺼운 그의 손에는 어느새 정말 정밀하게 그려진 초상화가 들려있었다.

“친딸이오?”

“아, 아니요. 혼자 남겨져 있어서······.”

숲속에 혼자 방황하던 아이다.

깜짝 놀란 아내는 솔직한 사실을 털어놓으며 오목눈이를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북방군 병사는 그걸 탓하려는 게 아니라는 듯 환한 얼굴로 웃었다.

“두 분 덕분이었구려.”

“예?”

“따님을 찾았다! 재상님께 전령을 보내!”

재상? 오목눈이가 딸?

우연히 아이를 보호하게 된 화전민 부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이송되었다.

때로는 하찮은 자의 양심이 고귀한 자의 명예보다 빛나는 법이었다.

* * *

길었던 전쟁이 끝이 났다.

참상을 벌였던 오그마르는 목이 잘려 길거리에 효시 되었고 도망치던 족장들 또한 한 놈도 남김없이 붙잡아 처형당했다.

물론 우리는 영향력 행사도 잊지 않았다.

북방군 아직 운용이 가능한 병사들을 전부 추려 남은 숙영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리고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국경 상황을 문서화 해 북방 전체를 영향권 안에 놓았다.

안정화되어가는 치안,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는 피난민과 주민들.

딸을 찾은 기억하는 새는 서둘러 북방 재건의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토를 완전히 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눈투성이는 수도 입성과 대관식을 거부하며 전쟁이 끝난 폐허 위에 남았다.

이 자리까지 온 우리에게는 먼저 떠나간 이들을 위한 인사가 남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기부와 자발적 노동이 줄을 이었다.

물론 북방군은 모두 제값을 치렀지만, 주민들은 그마저도 유족을 위해 기부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려 했다.

‘내 형제를 위해, 내 가족을 위해.’

순식간에 조성된 드넓은 공동묘지와 정성을 다해 만들어진 떡갈나무 관.

보름이 걸릴 거라 예상했던 장례 준비는 겨우 일주일 만에 끝이 났다.

참석을 원하는 모든 이들이 모였다.

그들 앞에는 순백 밀에 감싸진 수백 개 관이 줄을 이었고 무장한 북방군은 전우들 곁에서 마지막 깃발을 휘날렸다.

오늘만큼은 살을 에워는 추위도, 눈을 휘날리게 하는 칼바람도 불어오지 않았다.

오직 고요한 아침과 숭고한 이들을 위한 침묵만이 조용히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참석한 이들은 관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 자신의 배우자, 자식, 형제, 친우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벌써 3번째 추모식.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던 눈투성이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스승님.”

“그래.”

“저를 원망하셨겠죠?”

나와 눈투성이 앞에는 다른 전사자들과 똑같은 떡갈나무 관이 있었다.

하지만 관에 새겨진 이름과 친필 문구만큼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았다.

[용맹한 허스칼, 푸른 손.]

[명예를 위해 살다, 형제를 위해 죽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오직 한 허스칼만이 검을 뽑아 달렸다.

그 용맹한 허스칼은 죽음을 각오하며 대 전사 오그마르를 막아섰고 왕과 형제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다.

살아서는 명예를 지키고 죽어서는 형제를 지켰던 용맹할 허스칼 푸른 손.

눈투성이 앞으로 다가간 나는 명예로운 전우를 대신해 맹세할 수 있었다.

“아니, 기꺼이 죽었을 거다.”

그 말에 눈투성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수많은 상실로 잊었다고 생각한 슬픔이 한순간 찾아온 것이다.

당황한 거친 귀리가 외쳤다.

“기사단! 고개를 숙여라!”

왕을 호위하던 모든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 편히 울지 못했던 위대한 왕을 위해 기나긴 침묵을 지켰다.

떠나간 자는 말이 없었다.

그저 기억으로 남을 뿐이었다.

* * *

“으음······.”

위대한 오크 제국의 1황자이자, 가장 큰 오크 세력을 이끄는 아크막은 한 장의 서신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크 대신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하명을 기다렸고 서신을 가져온 전령 또한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처박았다.

“오그마르가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허, 별일이군. 그 오그마르가 죽다니.”

겨우 오그마르가 죽은 것이 아니다.

수장인 총독은 물론이고 북방 식민지를 지배하는 모든 족장이 목이 잘렸다.

하지만 아크막은 너무나 평온했고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서신을 내려놨다.

결국, 당황한 오크 대신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 아크막을 재촉했다.

“폐, 폐하! 선왕이 이루어놓으신 업적입니다! 제때 대응함이 어떠신지요!”

단순한 반란이 아닌 무려 새로운 기사왕과 검성이 개입한 건국 전쟁이다.

심지어 이미 북방 식민지는 토벌을 당했고 총관 또한 빼앗긴 상태였다.

지금 대처해도 늦는다.

나중에 대처하면 더 늦는다.

현명한 오크 대신들은 아크막이 제발 명하기를 바라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또 선왕 이야기요?”

하지만 아크막은 사안의 위급함보다는 또 선왕과 비교하는 대신을 탓했다.

내전을 발생시킨 그의 열등감이 또 한 번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쾅!

“지금 왕위를 위협하는 적도들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경들은 무엇을 잘했다고 큰소리요? 참으로 한심하군.”

술맛이 더럽다는 이유로 죄 없는 시종 여럿을 무참히 죽인 1황자다.

대신들은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 싶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생각이 짧았나이다.”

“모두 저희 불찰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고개를 숙이는 대신들을 보며 만족한 아크막은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앉았다.

그리고 내려놓았던 서신을 다시 한번 읽으며 원숭이나 다름없는 뇌를 굴려보았다.

아, 난 또 뭐라고.

짧은 고민을 끝낸 아크막은 말했다.

“우리 영토가 아니군.”

“······폐하?”

“저 건방진 2황자 놈 영토가 아닌가?”

오크 제국은 한참 내전 중이다.

그리고 그 내전의 세력 분포는 크게 셋으로 나눠 중앙이 1황자, 서쪽이 3황자, 동쪽이 2황자로 그리고 나머지 영토를 각 형제자매가 나눠 다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도를 잘 보아라.

북방과 접경지대는 우리가 아닌 동쪽에서 뻗대는 2황자 놈 영토가 아닌가.

손뼉을 친 아크막은 두툼한 턱살을 푸들푸들 흔들며 기분 좋게 웃었다.

“북방 놈들이 날뛰면 우리야 좋은 것 아닌가? 서로 열심히 싸워줬으면 좋겠군.”

선왕이 누구에게 죽었는지를 잊은 건가?

경악한 오크 대신들은 껄껄 웃고 있는 아크막을 황급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수많은 대신 중 그 누구 하나 직언을 올리는 이가 없었다.

여기서 입을 열기에는 그동안 쌓아온 재물과 권력이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이다.

무능한 왕과 비겁한 신하.

이 모든 게 합쳐진 오크 제국에는 영광을 가리는 먹구름이 짙게 끼기 시작했다.

아크막이 분위기를 환기하며 외쳤다.

“자, 이 사안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동부 식민지 이야기나 합시다. 그놈들은 북방 벌레들과는 다르게 성실하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뱃길을 통해 돌아가면 어떨까 싶은데······! 마침 북방 놈들이 날뛰고 있으니 가능하지 않겠나?”

“······참으로 옳습니다, 폐하.”

“그곳이 금광이면 더 좋겠군, 하하!”

제국이 이 꼴인데, 황자라는 놈들은 제 배를 불릴 생각만 하고 있구나.

호랑이가 개를 낳았으니 다른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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