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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64화 (64/181)

64화

검은머리 기사왕 64화

오그마르가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명령을 받은 오크 족장들은 다분한 노력을 통해 오크 본대를 스노우가든 근처 경계면 아래까지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북방군은 그런 오크 본대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도록 집요하게 괴롭혔고,

행군으로 지친 족장들은 결국 한 이름 없는 숲속에 고립되고 말았다.

차라리 정면으로 싸워주면 좋겠건만, 기습, 매복, 야습, 요격과 같은 온갖 치사한 방법으로 오크 본대를 괴롭히는 북방군들.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던 오크 군대는 마치 굶주림 생쥐 앞에 빵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갉아 먹히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식량이 다 떨어졌소.”

보급품이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다.

설상가상 겨울과 함께 찾아온 동(冬)장군에 얼어 죽는 자들이 속출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전의는 완전히 사라졌다.

오크들이 자랑하던 강철 병기가 도리어 살가죽과 전사의 사기를 뜯어내는 차가운 흉기로 변하고 만 것이다.

얼굴이 피폐해진 족장들은 드디어 다가온 한계를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오그마르가 오기 전까지는 그 어떠한 대책도 방법도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은 천막 안.

그나마 북방 근무 경험이 많은 한 늙은 족장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전쟁은 우리가 졌다. 부족원을 살리기 위해서는 본토로 후퇴할 수밖에 없어.”

후방인 총관은 점령당했고 총사령관인 오그마르마저 연락이 끊겼다.

거기다 본대 상황까지 좋지 않으니 전쟁의 승패는 이미 정해졌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많은 부족원이 자신들만 바라보며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그들의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북방에서 벗어나 본토로 후퇴해야 했다.

“본토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우리를 그냥 보내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빌어먹을 인간놈들!”

저 북방군이 이 많은 오크가 본토로 돌아가는 꼴을 보고만 있을 리 없다.

분명 악귀처럼 끝까지 붙잡아 뼈조차 남기지 않고 뜯어먹을 게 눈에 훤하다.

겨우 전쟁 한 번으로 북방군을 향한 두려움을 느끼고 만 오크 족장들.

그들은 불안한 얼굴로 놈들이 진을 치고 있는 반대쪽 숲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숨을 푹 내쉰 늙은 족장이 그나마 승산이 있는 방법을 말했다.

“전력은 아직 우리가 유리하다. 그러니 본대를 반으로 나눠, 한쪽은 놈들을 막고 한쪽은 수도를 다시 점령하자.”

오그마르쪽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수도 부근에서 활동하는 북방군은 흰 뿔 사슴 기병대가 다다.

지금이라도 본대를 이끌고 진군해 공격할 수 있다면 본토로 후퇴하거나 버틸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족장들 또한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알아서들 병력을 차출해 북방군의 발을 묶어둘 부대를 편제했다.

두두두두두두 - - - -.

“?”

하지만 그 순간 발굽이 만들어낸 진동이 소리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북방군이 없는 남쪽에서 한 기병 무리가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 방향은 분명 이틀 전 오그마르가 이끄는 기마대가 출정했던 방향일 텐데!

얼굴을 활짝 편 족장들은 서둘러 천막을 빠져나와 드디어 돌아온 총독을 반기려 했다.

“총독!”

“괜한 걱정을 했군!”

그래, 본토에서도 알아주는 오그마르다.

그런 위대한 전사가 한낱 사슴을 탄 인간에게 패배할 리가 없지 않은가.

족장들이 다급한 발걸음과 함께 걸어가자, 추위와 굶주림에 골골거리던 오크 전사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몰려들었다.

총독 오그마르! 굶주리고 지친 자신들을 구해 줄 유일한 전사의 귀환이다.

기대에 찬 오크들은 다시 한번 싸우기 위해 무기를 높이 들었다.

“어······?”

하지만 유일하게 뒤쪽 후방을 살피고 있던 초병만큼은 함께 기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숲을 향해 달려오는 기병은 오크가 이끄는 무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장대 위에 걸린 목은 누구 것인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초병은 다급히 기병 무리의 정체를 외쳤다.

“적, 적이다! 북방군이다!”

방금 내린 눈처럼 하얀 털과 하얀 뿔, 그 위에 타고 있는 북방 인간.

자랑스러운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온 그들은 바로 흰 뿔 사슴 기병대였다.

뿌우우우우우 - - - -!!

전쟁의 끝을 알리는 우렁찬 기병 나팔이 오크 본대 한가운데를 강타했다.

숲을 지나친 기병대는 그대로 쐐기 진을 형성했고 이내 오크 본대로 들이닥쳤다.

쿵! 콰직!

으아아아악!

연이은 전투로 인해 사슴 기병대의 숫자는 반절 넘게 줄어든 상태였다.

하지만 수라장을 넘어온 그 투기만큼은 첫 출정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시위를 힘껏 당긴 부러지는 검이 숲 한가운데 하늘을 향해 효시를 쐈다.

삐이이이이이이 - - -!

둥! 둥! 둥!

드디어 때가 왔구나!

신호를 전해 들은 북방군 본대는 드디어 진격을 시작했고 오크들은 어지러운 숲 한가운데 그대로 포위당하고 말았다.

북방 오크의 끝을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하늘에 낀 검은 먹구름은 태양을 가리고 눈을 뿌려 세상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이 뿌려대는 저주였고, 산자 들이 휘두르는 설움이었다.

오크 전사들은 드디어 전의를 잃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 도망쳐!”

“으아아아아!”

“흩어지지 마라! 흩어지면 전부······! 컥!”

족장들은 도망치는 이들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비겁한 자는 이미 부족원과 함께 도망쳤고 끝까지 싸우고자 한 자는 끝내 목이 베어 장대 위에 효시했다.

그렇게 그날 오후, 오그마르가 소집한 숙영지 연합 부대는 완전히 패퇴했다.

살아남은 오크는 부족 단위로 도망친 소수의 패잔병뿐이었고 족장 중 본토로 돌아간 자는 단 한 놈도 없었다.

* * *

작은 화전민 마을을 다스리던 촌장은 어느새 거대한 영지인 노스플롬을 총괄하는 행정관 자리에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촌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으며 이전과 변함없이 일개미처럼 영지를 발전시켰다.

후방으로 후송되는 피난민들과 부상병들을 최선을 다해 돌보고 지휘관들이 요구하는 모든 물자를 전방으로 보내준 촌장.

덕분에 남진한 북방군은 아무런 걱정 없이 전투에만 집중할 수가 있었다.

최초의 영지 노스플롬과 촌장은 후방 기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하지만 야속하기만 한 세월은 그런 촌장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깃펜을 내려놓은 촌장은 손으로 입을 막고 거칠게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기침한 손바닥에 피가 남았다.

깜짝 놀란 한 앳된 서기가 황급히 깨끗한 천을 들고 다가와 피를 닦아냈다.

“괜찮으세요, 촌장님?”

“······괜찮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시죠. 올해 겨울 날씨가 유독 춥습니다.”

북방군이 영토 수복을 위해 출정한 이후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해온 촌장이다.

덕분에 후방은 빠르게 안정되었지만, 그는 회복하지 못할 폐병을 얻고 말았다.

되돌릴 수 없는 노환과 지난날 야만인에게 입은 부상의 후유증 때문일까.

촌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 북방도 무심하시지,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자신을 데려가려 하다니.

희미하게 웃은 촌장은 세월과 고생이 느껴지는 깃펜을 다시 잡았다.

“간단한 업무니 서둘러 끝내자꾸나.”

“네, 촌장님······.”

자신이 안전한 영지에서 삼시 세끼 잘 챙겨 먹을 동안 전방으로 떠난 병사들은 피와 먼지를 뒤집어쓰며 싸우고 있다.

비록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촌장은 마지막까지 일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자 서기는 시무룩한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가 열심히 깃펜을 놀렸다.

사각, 사각.

작게 타오르고 있는 호롱불 하나.

커다란 영지가 내려다보이는 창문은 겨울바람과 함께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똑똑.

하지만 그 순간 아무도 없어야 할 집무실 밖에서 누군가 노크했다.

원래라면 퇴근했어야 할 전서구 담당자가 급히 촌장을 찾아온 것이다.

“촌장님!”

“음? 이런 늦은 시간에······.”

“전방에서 온 전서구입니다. 연이어 날아온 것을 보니 급한 일이 있나 보네요.”

보통은 날이 밝은 아침에 보내 정시나 오후쯤 도착하는 전서구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이런 밤늦게 전방에서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다.

“고맙네.”

“아뇨, 제 일인데요. 내일 뵙겠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순간 불안함을 느낀 촌장은 다급히 손을 뻗어 단단히 밀봉된 서신을 받았다.

“응?”

처음 보는 문양이다.

기존에 받아오던 투박한 실링 왁스가 아닌 아름다운 부러지는 검과 불꽃 문양이 서신 입구를 단단히 밀봉하고 있었다.

툭.

의문을 느낀 촌장은 서둘러 실링 왁스를 떼어낸 뒤 전장에서 온 서신을 꺼냈다.

그러자 침침했던 시야가 환해지며 짧은 서신 내용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용을 읽은 촌장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수도 수복, 북방 탈환.’

영광과 명예를 좇는 초년을 살았고 후회만 남은 말년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과 함께 찾아온 한 남자와 소녀는 그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북방을 재건합시다.’

‘오직 인간을 위한.’

촌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말이 허무맹랑해서가 아닌 죽을 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촌장은 끝까지 노력했다.

비록 범인으로 태어나 평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촌장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인간을 위해 헌신했다.

그렇게 창밖 계절이 덧없이 바뀌던 어언 2년, 끝내 그 약속은 지켜졌다.

그들은 오크가 무참히 찢어놓았던 북방을 다시 인간 곁으로 돌려둔 것이다.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촌장은 서신을 정성스레 접었다.

그리고 앞으로 날아갈 일만 남은 젊은 왕 눈투성이를 위해 기도했다.

그래, 하늘이 야속하지만은 않았구나.

이 수명이 허락하는 때, 인간의 왕이 인간의 왕관을 쓰는 모습을 보게 해주었으니까.

어머니, 내게 조금만 시간을 주시오.

저 멀리 수도까지 가려면 부지런히 걸어 수많은 평원과 산을 넘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끝낸 촌장은 오랜만에 환히 웃으며 서기를 향해 말했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구나.”

“예?”

“먼저 들어가렴. 내일 새벽 일찍 보급 마차를 따라 수도로 내려가자꾸나.”

“······네, 촌장님.”

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서기는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어린 나이라지만, 촌장 눈가에 촉촉이 고여있는 물기를 보지 못할 만큼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끼익, 덜컹.

그리고 서기가 밖으로 나가자, 촌장 또한 마지막 호롱불을 끄고 밖으로 나섰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입김을 후욱 내뱉은 촌장은 눈이 소복이 쌓인 내리막길을 천천히 걸었다.

“- - - - - - -.”

회관이 있는 언덕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북방의 영지 노스플롬.

주민들이 흘린 땀으로 성장한 이곳은 이제 도망친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군대를 먹여 살리는 북방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이 풍경도 올해가 마지막이겠구나.

촌장은 내일 일찍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에 다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부러지는 검과 함께 손을 맞잡고 미래를 약속했었던 그 날이 말이다.

촌장은 기분 좋게 웃으며 이제는 추억이 된 기억을 조용히 되새겼다.

‘그 아이는 제자겠군.’

‘······좋은 왕이 될 겁니다.’

‘부러지는 검이라면 맡길 수 있지. 마을 사람들을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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