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기사왕-63화 (63/181)

63화

검은머리 기사왕 63화

챙!

단순 흉내만 낸 것이 아니다.

아직 성취가 얕다 해도 분명 깊이가 있었고 튼튼한 뿌리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누군가를 닮은 이 검술.

분명 북방 검술을 기본으로 한 토대와 기본기는 한 남자를 연상케 했다.

‘검성.’

도끼를 막는 눈투성이 뒤로 젊었던 검성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스쳐 지나갔다.

경악한 오그마르는 오러와 힘을 있는 힘껏 모아 황금 도끼를 내려찍었다.

쾅! 채앵!

눈투성이는 오러를 일으켰다.

그리고 검을 뻗은 기사들과 함께 그 공격을 막아내며 흔들릴뻔한 중심을 잡았다.

푸르륵!

역량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하지만 주변으로 모여든 노련한 퇴역 기사들은 막강한 오그마르를 상대로 버틸 힘과 시간을 보태주었다.

흔들리되 부러지지 않는 묘한 균형.

빠르게 전투를 끝내려 했던 오그마르는 거대한 초조한 얼굴을 애써 감췄다.

‘여기서 죽여야 한다.’

아직 작은 떡잎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목이라 한들 성장에는 한계라는 기준이 존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 마주한 눈투성이는 오그마르가 알고 있던 모든 상식을 깨부쉈다.

저 나이에 오러를 응축한 것도 모라자, 감히 검술의 끝을 노리고 있는 눈투성이는 기사왕의 전신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기사왕은 오크 황제를 벴다.

그 후계는 무엇을 베게 될까.

오크 제국의 드리운 먹구름을 느낀 오그마르는 여기서 싹을 잘라야 함을 직감했다.

그대로 도끼를 추켜든 놈은 말을 박차 눈투성이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막아라!”

콰직- ! 챙!

모든 수가 살초다.

두 합으로 기사 하나를 죽인 오그마르는 날아오는 검날을 모두 뿌리쳤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눈투성이를 향해 도끼를 휘둘러 단번에 베어내려고 했다.

여기까지다.

이 오러를 막아낼 수 없으리라.

쿵!

히히힝!

“- - - - - - -!!”

하지만 그 순간 하반신을 지탱해주고 있던 안장과 몸이 거칠게 뒤틀렸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자신의 전투마가 어느새 자세가 뒤틀려 중심을 잃었다.

시야에 닿은 것은 새하얀 뿔!

눈투성이가 타고 있던 하얀 바람이 상대 전투마를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다.

푸르륵!

‘웃어?’

하얀 바람은 오그마르를 비웃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스스로 기수를 돌려 엄청난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칼을 추켜든 눈투성이가 명령했다.

“산개하라!”

다각! 다각! 다닥!

한참 열중하던 기병들은 전투를 멈췄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기수를 돌려 산개하기 시작했다.

대열도 없고 정해진 순서도 없다.

산개하라는 그 명령 한마디에 기수를 태운 흰 뿔 사슴들은 사방으로 도망쳤다.

도리어 당황한 것은 오크들이었다.

“추, 추격해라!”

“쫓아가라! 쫓아가서 전부 죽여!”

전투에는 공격과 방어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둘만큼 중요한 게 바로 피해를 줄이는 후퇴고 작전상 퇴각이었다.

하지만 북방 기병대는 거른 상식을 모조리 깨부수며 마치 근본 없는 산적 무리처럼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목할 표적이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추격 명령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결국, 당황한 오크 기마대는 제각기 목표를 쫓아 산발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전투는 순식간에 와해하였다.

그렇게 승리를 도둑맞은 오그마르는 더 이상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붉게 변한 눈에는 오직 혼자 도망치고 있는 눈투성이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말을 내놔라!”

“총, 총독!”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나를 따르라! 왕의 목을 베어 전쟁을 끝내겠다!”

전열을 재정비할 틈이 없다.

한 오크 전사의 전투마를 뺏은 오그마르는 그나마 주변을 지키고 있는 기마대와 함께 눈투성이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린 전장, 오랜 행군으로 지쳐 침을 질질 흘리는 전투마.

길고 치열했던 전쟁은 모든 생명체의 자아와 이성을 잃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적을 죽인다는 본능과 끝이 보이지 않는 증오뿐이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하얀 바람과 눈투성이가 평원을 지난다.

한참 시끄럽던 소음은 잦아들고 바람은 날카로운 격정으로 변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잡을 수 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초조함이 현명하던 오그마르를 미치게 했다.

다각! 다각!

그렇게 한참 도망치던 눈투성이는 빽빽한 숲으로 진입했고 오그마르와 소수의 오크 기마대는 그 뒤를 정신없이 따라갔다.

숲이 태양을 가린다.

하얀 눈과 까만 어둠이 공존하는 불길한 북방의 숲이 그들을 맞이했다.

이상한 기류를 느낀 부관이 외쳤다.

“총독!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전열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시끄럽다! 오늘이 아니면 영원히 끝내지 못한다! 돌아갈 자는 돌아가라!”

북방군에서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자는 오러 확산이 자유로운 회색 늑대뿐이다.

감히 그 누가 자신을 해할 수 있으랴.

긴 세월을 인내하며 성취한 경지는 어느새 오만함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거세던 바람이 멈춘다.

저 멀리 도망치던 눈투성이가 막다른 길목과 공터 앞에서 멈춰 섰다.

다각, 다각, 다각.

더 이상 도망칠 장소는 없었다.

아니, 눈투성이는 도망치지 않았다.

목적지는 처음부터 이곳이었으니까.

꿀꺽.

부관이 침을 삼킨다.

그리고 떨리는 눈으로 눈투성이가 멈춘 공터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무덤의 묘비처럼 놓인 100자루 검.

그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는 백발 남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낀 오크들은 날뛰는 말들을 진정시켰다.

히히힝!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매복한 병사도, 날아오는 화살도 없는 이곳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느낀 것이다.

동요하는 병사들을 독려한 오그마르는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외쳤다.

“검성······!”

자신이 기억하는 젊은 시절 검성은 당시 평범한 서전트였던 오그마르가 감히 올려다볼 수 없었던 대단한 존재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온갖 역경과 고난을 통해 성장한 오그마르는 검성의 치명적인 약점인 오러를 그 어느 때보다 맹렬히 불태우고 있었다.

화르르!

어떤 기행을 펼치려는지는 상관없다.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더 많은 오러, 더 강력한 힘뿐이다.

“네놈 혼자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냐? 참으로 오만하구나!”

세월이 남기고 간 이 망령아.

북방이라는 배와 함께 침몰해라.

고삐와 도끼를 쥔 오그마르는 정신을 차린 기마대와 함께 그대로 돌격했다.

두두두두두두 - - - -!

모든 것을 깨부술 것 같은 기마 돌격이다.

전쟁 고함을 내지른 오크 기마대는 검성을 향해 날카로운 창을 내질렀다.

아니, 내지르려고 했다.

서걱!

찌지지직!

창은 허무하게 허공을 찔렀다.

하지만 그것은 조준을 잘못한 것이 아닌 기수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진 탓이었다.

마치 접근하지 말아야 할 영역에 들어온 듯 무너져 내리는 오크 기마대.

그들이 쓰러진 자리에는 100자루 검이 잔잔한 호수처럼 공명하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웅 - - - -!

철퍽!

히히힝!

살점과 내장이 바닥에 후두두 떨어진다.

순식간에 주인을 잃은 말은 두려움에 눈이 뒤집혀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분명 보이지 않는 영역이 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커다란 성벽이 다가오는 기마대를 순식간에 도륙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순식간에 부하들을 잃은 오그마르는 경악한 얼굴로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쉬이익!

몸이 먼저 반응했다.

빛 번짐과 같은 한줄기 선이 급소인 목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오그마르는 다급히 오러가 전개된 도끼를 들어 그 공격을 막아내었다.

쩌엉!

하지만 부서져야 할 검은 겨우 날 하나가 나가는 것을 끝으로 멈췄다.

수천, 수만 번 오러를 상대해본 묘리가 평범한 검마저 명검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걸 해낼 자가 누구인가.

하늘 아래 오직 검성뿐이다.

털썩!

말없이 안장에서 내려온 오그마르는 옷과 검날에 피조차 묻히지 않은 부러지는 검을 떨리는 눈으로 마주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

숙영지 점령, 티그마의 죽음, 북방군 준동과 봉기 그리고 마지막 전투까지.

그동안 치러온 모든 전쟁과 회상이 눈앞을 빠른 속도 스쳐 지나갔다.

“그래. 지난 9년간 그린 그림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하고 노력했던 그 과정은 전부 한 가지 길로 귀결되었다.

바로 검성 부러지는 검이 수년간 인내했던 북방 재건의 마지막으로 말이다.

“이제 점 하나만 남았구나.”

미완성은 완성을 앞두고 있다.

거대한 그림을 그렸던 검성은 붓 대신 검으로 그 마지막 점을 찍으려 했다.

“여기서 끝을 보자 오그마르.”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모든 감정을 분노로 치환한 오그마르는 거센 고함을 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크아아아아아아 - - - !!!”

콰앙! 콰직!

채앵! 쨍그랑!

검을 휘둘러 오러와 맞부딪힌다.

당연히 검은 세 번째 합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지만, 검성은 차분히 다른 검을 손끝으로 뽑아 오그마르를 상대했다.

챙! 채앵!

베고, 막고, 휘두르고, 바꾼다.

다음 수는 다음 수와 연결되고 또 다른 수는 실처럼 다른 수를 불러왔다.

이걸 과연 검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치 모든 검이 허공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큭!”

오그마르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검들의 영역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것을 폭풍이라 생각하면 그 폭풍의 영향권에서 물러나면 될 뿐이었다.

이제는 눈으로 좇기도 힘든 공격을 힘겹게 막아낸 오그마르는 벗어났다.

“- - - - - - -!!”

하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검성에게 있어 허공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검을 놓을 수 있는 집이자 연장선이었다.

그는 수십 자루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뒷걸음질 치는 오그마르를 놓치지 않았다.

날카로운 검이 손가락 하나를 잘랐다.

서걱!

“크아아악!”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바닥에 부러진 검이 늘어날수록 오그마르의 생채기도 하나둘 늘어났다.

100자루 검을 휘두를 것이 빠를까, 100번 찔리고 베이는 것이 빠를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검성은 마치 놈에게 그렇게 묻는 듯했다.

채앵! 쨍그랑.

또 한 자루 검이 부러졌고,

검성은 입을 열어 그 숫자를 세었다.

“이제 20자루.”

오그마르는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터져버린 상처는 이미 붕대를 붉게 물들였고 영원할 것 같은 오러 또한 흔들렸다.

서서히 한계가 찾아오고 있다.

이 늙고 다친 신체도, 점점 패배를 떠올리기 시작하는 정신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오그마르를 향해 검성은 21번째 검을 뽑으며 담담히 못을 박았다.

“앞으로 80자루 남았다.”

눈앞이 아득해진다.

이길 수 있을 거라 확신했던 과거는 이제 한낱 치기로 변한 지 오래였다.

이곳은 검의 무덤만이 아니었구나.

북방 오크 최고의 전사이자, 총독이었던 오그마르는 결국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

죽음이 다가오자 느껴지는 것은 이제 편히 쉬고 싶다는 허탈함뿐이었다.

웃음을 멈춘 오그마르는 검의 무덤을 향해 걸어가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무엇을 보았지? 예언? 깨달음? 혹시 이런 비기였나?”

북방은 황폐했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러지는 검은 끝없이 싸워 북방 땅 위에 왕이라는 존엄함을 세웠다.

어디서 그런 확신이 있었을까.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검성을 진정한 전사로 인정한 오그마르는 그 비결을 듣고자, 귀를 기울였다.

“내게 알려다오.”

하지만 검성이 가장 낮은 바닥에서 본 것은 탁월한 예언도 깨달음도 아니었다.

한 아이가 내게 준 용기.

참으로 낯간지러운 그 단어.

오그마르를 향해 검을 휘두른 검성은 지난날, 기사왕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네게는 그 누구보다 빛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천년을 사는 엘프도, 강철을 지배한 오크도 얻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훗날 알게 되겠지. 그것은 우리 인간을 이끄는 소중한 등불이 될 테니까.’

야만의 시대.

명예를 아는 자를 기사라 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