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검은머리 기사왕 62화
“오, 오그마르님!”
“닥쳐라!”
상처를 살피던 부관이 다급히 외쳤지만, 오그마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났다.
그리고 임시로 지은 천막을 열고 나가며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을 노려보았다.
챙! 채앵!
날이 바뀌고 공격이 재개되었다.
오그마르는 건재함을 연기하며 전사들을 독려했고 사기를 충전한 오크 군대는 북방군을 향해 다시 한번 돌격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한 패배.
이전에 겪었던 북방군의 기세가 용맹이었다면 날이 바뀐 오늘은 핏빛 어린 증오와 의지만이 전장에 남아 있었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지휘관과 그 죽음에 진정으로 분노할 줄 아는 북방군들.
오그마르가 추구하려 했던 명예의 본질은 오크가 아닌 저들에게 있었다.
족장들이 몰려와 성토했다.
“피해가 너무 크지 않소, 총독!”
“대책이 말해주시오! 책임을 지던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찍소리 못하던 족장 놈들이 총독이 상처를 입었다는 소리에 달려와 저리 큰소리를 내고 있다.
그나마 압도적인 무력과 카리스마로 상쇄하고 있던 연합 부대의 단점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저 지독한 놈들을 다 죽이려면 얼마나 많은 전사가 죽거나 다쳐야 하는가.
증발할수록 진해지는 북방군과는 달리 족장들은 벌써 눈치나 보고 있었다.
끄드득.
보아라, 저 불만 어린 눈빛들을.
권력의 성질을 너무나 잘 아는 오그마르는 불만을 성토하는 족장 놈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은 마치 다치고 늙은 사자를 바라보는 비열한 하이에나와 같았다.
오그마르가 결국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내가 앞장서지. 그러면 되겠나?”
“크흠! 총독이 그러겠다면야······.”
“대신 족장들도 선두 뒤를 따라라. 아니면 여기서 나와 함께 죽던가.”
여태 후방에 처박혀 있던 족장들이다.
오그마르는 이 전장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놈들을 끌고 가고자 했다.
눈치 잴 것 없이 뒤를 따라라.
아니면 여기서 도끼를 뽑겠다.
꿀꺽.
시간이 지날수록 기어오르며 총독이 가진 주도권을 뺏어오려던 족장들이다.
하지만 공멸 선언이 진심이라는 것을 읽었는지 찍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어도 선두는 아니니까.
족장들은 나름대로 타협이 되었는지, 떨떠름한 얼굴로 서전트를 불렀다.
어제와 같은 방법으로 방진을 깎아 먹고 중기병으로 적의 심장을 찌를 것이다.
힘겹게 숨을 내뱉은 오그마르는 말 위에 올라타 부관을 향해 물었다.
“다른 움직임은 여전히 없는가?”
“예! 보이지 않습니다!”
왕의 후계야 후방을 지킨다고 쳐도 도대체 검성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하루가 넘게 지났음에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놈은 자신처럼 늙거나 다쳤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오그마르는 미간을 찡그리며 대열을 이루는 중기병을 이끌려고 했다.
생각할수록 쓰라려 오는 상처는 계속된 의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하지만 그 순간 조용해야 할 진영 뒤에서 한 오크 기수가 급히 달려왔다.
“총독!”
어딘가를 급히 빠져나온 듯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오크 전령.
분명 반나절 뒤에나 와야 할 보급부대 전령이 벌써 본대를 찾아왔다.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적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뭐라고?”
“스노우 가든이 점령당했습니다!”
비틀.
오그마르는 두 눈을 부릅떴다.
기껏 지혈해 둔 붕대에선 붉은 핏물이 번졌고 기껏 다잡은 몸은 힘이 빠졌다.
기병으로 성을 점령했다.
도대체 어떤 지휘관이 그 소식을 믿을까.
하지만 현실은 이미 들이닥쳤고 병신같은 족장들은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총, 총관이 점령당했다고?”
“총독! 어찌해야 합니다! 오그마르 총독!”
생각해야 한다.
순간 이성을 놓을뻔한 오그마르는 아우성치는 족장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급하게 말을 몰며 일단 급한 불을 끄고자 최선의 지시를 내렸다.
“······적 기병대가 반드시 북상할 것이다! 내가 놈들을 요격할 테니, 족장들은 북방군 본대를 막으며 천천히 후퇴해라!”
보급이 끊긴 것은 치명적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급한 건 후방을 점령하고 북상할 검성과 기병대다.
지금도 보아라, 우리 측 진영이 이상한 것을 눈치챈 북방군 본대가 수비적인 태세를 바꾸며 진을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검성이 그려놓은 큰 그림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이랴!”
오그마르는 도끼를 꽉 쥐었다.
그리고 중기병들과 함께 말을 몰며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 * *
수도를 탈환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도륙한 오크 놈들과 보급 물자를 전부 불태운 뒤 다시 북상을 준비했다.
기병은 움직이는 데 의미가 있다.
성벽 뒤에서 웅크리고 있을 생각이었다면 우회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미련 없이 수도를 떠난 기병대는 그대로 북상했고 밤잠을 줄여가며 적의 보급 기지와 역참을 차례차례 불태웠다.
그러자 오그마르가 이끄는 오크 군대는 마치 목줄이 조여져 가는 짐승처럼 공세를 멈추었고 후방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허를 찔렸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일을 수습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그런 놈들을 따라 남진하는 북방군 본대.
마치 샌드위치처럼 위아래로 촘촘히 얽힌 오크 놈들과 우리는 최종 결전을 위해 서서히 경계면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오크 군대 발견.’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 북방 기병대와 오크 기마대가 불과 반나절 거리를 앞둔 채 양측 척후와 위치를 발견했다.
사실상 북방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최후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쉴 틈 없이 북상했던 사슴 기병대는 공격을 멈췄고 이내 숲속에 임시 진을 쳤다.
“여기 있습니다, 경.”
“정말 고맙다.”
스릉 - -!
사박, 사박, 사박.
안장에서 내린 기병대와 기사들이 그동안 들고 다녔던 예비용 검을 뽑았다.
그리고 숲속 한가운데 위치한 공터에 하나둘 꽂아 검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동안 검을 두 개씩 들고 다니느라 많이 번거로웠을 기병과 기사들이다.
나는 그런 그들과 일일이 감사 인사를 나누며 저번처럼 100자루 검으로 공터 위에 원형 무대를 만들었다.
하얀 숲과 검의 무덤.
이 이름 없는 공터와 숲에서 오그마르와 얽혔던 지겨운 악연을 끝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낸 나는 그새 안장 위에 올라탄 눈투성이를 찾았다.
이제 어리숙한 티를 벗은 아이는 어엿한 한 명의 기사가 되어있었다.
“조심하라는 말은 듣지 않겠구나.”
“헤헤, 잘 아시네요.”
“······그래,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총관이 식민을 상징한다면 오그마르는 오크 숙영지 떠받치는 기둥이다.
북방군이 완전히 승리를 거머쥐려면 기둥을 무너뜨리고 숨통을 끊을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실패하면 모든 게 무용지물.
눈투성이는 확실한 미끼를 자처하며 원수 오그마르를 끌고 오리라 약속했다.
다각, 다각!
이제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기병 대열 선두에 선 북방 기사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경들만 믿겠다.”
척!
눈투성이를 호위할 북방 기사들은 예를 취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곧바로 기수를 돌려 눈투성이와 함께 북쪽으로 사슴을 몰았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달아오른 애써 진정시키며 차가운 눈 위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시작이 있었다면 끝이 있는 법이다.
태동을 불러일으켰던 나는 드디어 그 끝을 보고자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 * *
두두두두두두 - - - - -!
“정면 적 기병대!”
앞서 달려가던 오크 척후병이 평원 너머에서 기병대를 발견하자마자 급히 외쳤다.
그러자 오그마르는 서둘러 평원으로 기수를 돌려 곧바로 교전, 섬멸을 명령했다.
“공격 준비! 여기서 놈들을 섬멸한다!”
드디어 북상하는 기병대와 마주쳤다.
여기서 놈들을 섬멸한다면 잃어버렸던 총관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세를 돌리기 위해선 이 방법뿐이다.
오그마르는 고민하고 잴 것 없이 부상과 노환을 떨쳐내며 고함을 내질렀다.
두두두두두두 - - -!!
마찬가지로 적은 발견한 북방 기병대는 평원을 한 바퀴 우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후퇴가 아닌 정면으로 맞받아치기 위한 돌격 대형이었다.
그래, 놈들도 이것이 결전임을 아는구나!
눈동자를 붉게 물들인 오그마르와 오크 기마대는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점점 가까워지는 적의 형체.
두 눈을 부릅뜬 양측 기병대는 500m도 채 남지 않은 상대를 노려보았다.
푸르륵!
말이 뱉은 입김이 물거품처럼 어지럽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거친 움직임과 함께 잠시 숨이 멈춘듯한 착각이 들었다.
삐이이이이이 - - - -.
지금은 때가 아니다.
기다린다, 또 기다린다.
그렇게 모든 소음이 이명으로 변하려는 그 순간 불어오던 불어오던 바람이 멈췄다.
지금이다.
뿌우우우우 - - - -!!!
격전을 알리는 전쟁 뿔피리!
오크와 인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날카로운 창으로 적병을 겨누었다.
그리고 달려오는 동안 받은 가속과 힘을 모조리 응축시켜 상대에게 쏟아낸다.
오크 기마와 인간 기병이 맞부딪쳤다.
쾅 - - -!!!
쿠웅! 콰직!
히히힝! 푸르륵!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튄다.
창을 맞은 오크와 인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즉사했고 가지런 했던 대열은 순식간에 처참한 난전으로 변했다.
챙! 채앵!
“크아아아아!!”
“죽어, 이 개새끼야!!”
안장 위라고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사라진 양측은 적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숫자는 거의 동수.
전력 또한 미묘하리만큼 같다.
이런 난전 상황에서 승기를 가져올 수 있는 요소는 바로 규격 외 존재인 오러였다.
“크아아아아아아 - - - -!!”
광폭 화에 빠진 오그마르는 오러가 넘실거리는 황금 도끼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그러자 평범한 기병들은 저항조차 못 한 채 목과 몸이 찢겨 죽어 나갔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후웅!
챙! 채앵!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한참 학살을 벌이던 오그마르는 본능적으로 도끼를 돌려 검을 막아냈다.
병사와는 차원이 다른 힘과 오러 능력!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한 검은 머리 소녀가 기사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오그마르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티그마 말이 맞았군. 검은 머리 기사왕이 정말로 돌아왔어! 친딸인가?”
“총독 오그마르.”
“그래, 내가 오그마르다. 북방 식민지를 지배하는 원수이자, 너희들의 원수다.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아왔나?”
원수(怨讐)이자, 원수(元帥).
조롱할 목적이 다분한 말장난에 기사들은 미간을 찡그리며 검을 들었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마치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동자로 오그마르를 노려보았다.
“낯짝이 질겨 보여 좋구나.”
“······뭐?”
“가죽을 벗겨 북으로 만들어주마.”
그 스승의 그 제자다.
앞뒤가 없는 도발에 오그마르는 순간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렸다.
감히 전장 한가운데서 나를 모욕해?
기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는 한낱 인간 계집이 나 오그마르를?
화르르!
뜨거운 분노가 들끓었다.
그리고 농축된 그 분노는 오러가 되어 순식간에 황금 도끼를 장식했다.
여기서 전쟁을 끝내겠다.
오그마르는 그대로 말을 몰아 왕의 후계인 눈투성이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쾅 - - -!
치지지지직!
목이 잘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은 기사들이 오러가 넘실거리는 검으로 도끼를 막은 것이다.
하지만 오그마르를 경악하게 한 것은 한 몸처럼 덤벼든 기사들이 아닌 그 검들 사이에서 번뜩이는 눈투성이였다.
츠즈즈즉, 츠즉.
소녀가 들고 있는 검에는 분명 이름처럼 하얀 흰색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
어머니 북방이 왕의 곁에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