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검은머리 기사왕 61화
꿀꺽.
눈이 하얗게 쌓인 나무들이 짙어, 흰 뿔 사슴과 병력을 숨기기 딱 좋은 숲.
벌써 2시간째 자리에서 기다린 기병들은 굳게 닫힌 정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신호를 보내겠다.’
사실 미친 짓이라 생각했다.
수년간 함락되지 않은 저 굳건한 성문을 혼자 열겠다니! 아무리 검성이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는 법이다.
이대로 작전 실패는 고사하고 부러지는 검의 전사 소식만 들려오는 게 아닐까.
기병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도 연신 왕과 기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음, 그 당시는 썰렁한 농담도 많이 하셨습니다. 받아주느라 꽤 고역이었죠.”
“헤헤, 그건 스승님이 잘못하셨네요.”
하지만 왕과 기사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완벽히 위장을 한 채 시답지 않은 옛날이야기나 조용히 나누고 있었다.
왕과 기사님들은 떨리지도 않는 걸까.
사슴과 함께 엎드린 기병들은 근질거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뚝.
“- - - - - -?”
하지만 그 순간 소곤소곤 들려오던 대화 소리가 멈추고 침묵이 찾아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얌전히 엎드려 있던 눈투성이와 기사가 일어난 것이다.
의식이 될 정도로 바뀐 기류.
기다렸다는 듯 검을 쥔 그들.
온통 하얀 도시와 성벽에는 한 줄기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눈투성이가 재빨리 안장 위에 앉았다.
그러자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슴 위에 올라탔고 몸이 훈련을 기억하고 있는 기병들 또한 서둘러 탑승했다.
정말로 신호를 보내왔다.
그리고 왕과 기사들은 이런 결과가 당연하다는 듯 고삐를 쥐었다.
검성이 그리 말했으니 그러면 된다.
이들에게는 감히 필부가 알 수 없는 굳건한 신뢰와 믿음이 짙게 깔려있었다.
눈투성이가 입을 열었다.
“선두는 제가 맡겠습니다.”
이제는 보호받아야 할 후계가 아니다.
당당히 검을 뽑은 눈투성이는 하얀 바람 위에 올라타 허리를 박찼다.
그러자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 뒤를 따랐고 준비를 마친 기병들 또한 산발적으로 숲을 빠져나와 대열을 이루었다.
두두두두두두두 - - - -!!
점은 선이 되고 선은 열이 된다.
하얀 숲을 빠져나온 하얀 사슴들은 가볍게 흩어졌다 무겁게 뭉쳤다.
적의 피리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성벽 그 어디에도 시위를 당기는 오크 궁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검은 연기.
아직 열리지 않은 성문.
오직 태산처럼 커다란 스노우 가든은 우리를 무서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 - - -!
하지만 대열은 멈추지 않았다.
선두에 선 눈투성이는 한 치 망설임 없이 가속하고 또 가속해 성문에 모든 병력을 들이박을 기세로 고삐를 박찼다.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
눈투성이는 스승의 말을 되새겼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스노우 가든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기운을 실었다.
그것은 꿋꿋이 일어난 한 줄기 절개이며 운명이라는 더미를 불태운 불꽃이었다.
눈투성이는 외쳤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쿠르르르르릉 - - - -!!
거대한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깨를 짓누르던 기운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변화의 전조는 오직 하얀 사슴들이 이끄는 바람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스윽.
눈투성이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아직 덜 올라간 성문이 머리 바로 위를 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전율이 몰려온다.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린 눈투성이는 이전과는 다른 광경을 시야 한가득 담았다.
스노우 가든.
북방의 심장이자 숙명이던 그곳에 새로운 왕이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킁킁.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온다.
성문을 연 검성이 이미 깃발과 함께 오크 여럿을 잘라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저 멀리 길 끝에는 아직 죽음을 기다리는 오크 무리가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거창!”
흰 뿔 사슴 기병대 거(擧)창하라.
기사와 기병들은 기다렸다는 듯 창을 앞으로 내밀었고 하얀 바람은 형제들을 독려하듯 거세게 울부짖었다.
푸르륵!
두두두두두두두 - - - !!
적의 심장을 찌르는 기병 돌격!
이런 죽음을 예상조차 못 했던 오크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자리에 멈춰섰다.
저 돌격을 어찌 막는단 말인가.
대응할 수단도 도망칠 용기도 없었다.
쾅! 콰직!
성문으로 달려오던 오크 증원군은 달려온 기병대와 충돌해 그대로 갈라졌다.
사슴의 하얀 털을 적신 피와 살점이 무언가 격돌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었다.
수도 탈환.
눈이 소복하게 쌓인 새하얀 성벽 위에는 북방 왕국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 * *
쾅! 쾅!
콰직! 푹!
흰 눈, 피, 살, 내장, 고함.
모든 것이 한곳에 엉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끔찍한 전쟁을 형상화한다.
처참하고 또 처참하다.
디디는 바닥은 땅보다 시체가 많았고 얼어붙은 피는 닦이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살기 위해 죽어야 하는 인간들은 한 치 물러섬 없이 방패를 들었다.
그것은 도축을 기다리는 돼지가 아닌 자유를 갈망하는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예로 살지 않겠다.
인간으로 죽을 것이다.
한 늙은 오크 족장은 그 광경에 질려버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지독하군.”
오크들은 많은 전쟁을 치렀다.
수도 없이 많은 동족과 엘프, 그리고 인간들을 죽여왔으며 또 지배해왔다.
하지만 이토록 처절한 저항은 처음이다.
스스로 퇴로를 없앤 북방군은 그간 상대해 온 적과는 본질부터가 달랐다.
경험이 많은 족장들조차 이러한데, 도끼를 휘두르는 젊은 전사들은 어떠하겠는가.
가슴 속에서 펄펄 끓던 명예와 영광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역겨움이라는 굳은 기름 막뿐.
또 한 명의 오크 전사가 전쟁이 가진 본질을 깨달으며 시체 위에 시체가 된다.
서걱!
대검 위에 오러가 넘실거린다.
자신이 죽인 시체를 짓밟은 회색 늑대가 마치 한 마리 맹수처럼 거칠게 포효했다.
“으아아아아 - - - -!!!”
전투가 시작된 지 반나절이 지났다.
하지만 오크들은 잠시 숨을 고를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며 북방군을 몰아쳤다.
아아아악!
내 팔! 내 팔!!
원형 중앙에 부상병이 가득하다.
체력이 다한 병사를 교대해줄 수 없어 여전히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오크 전사, 하늘에서 빗물처럼 떨어지는 수많은 화살.
만약 지옥이 있다면 겨울과 핏물로 이루어진 이 전장 한복판일 것이다.
그리고 기약 없는 절정이 끝으로 치달아가던 그 순간 회색 늑대와 멀지 않은 방향에서 처절한 고함이 들려왔다.
“2번대다! 2번대가 뚫렸다!”
미리 준비한 예비대를 운용해 그동안 잘 막아내고 있던 원형진이었다.
하지만 피로 누적은 무시할수없는지 결국 한쪽 부대가 뚫리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북방군의 유일한 반격 수단인 기병이 없기에 벌어진 피치 못할 상황.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오크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회색 늑대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쿠웅!
서걱!
사라졌던 신형이 포탄처럼 날아온다.
속도와 힘을 동시에 품은 대검은 몰려오는 오크 무리를 반으로 갈랐다.
기회를 엿보고 들어왔다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오크들.
회색 늑대는 북방을 호령한 허스칼의 수장이 누구인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 - - - - -.”
그리고 오그마르는 아쉬운 탄식을 내뱉으며 침착하게 전쟁 상황을 주시했다.
그는 개전 때부터 들었던 의문과 예상이 확신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적의 기병과 검성이 보이지 않는다?’
북방군이 가진 사슴 기병대의 위용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오그마르다.
그렇기에 기마대를 조심스럽게 운용해 최대한 체력을 보존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쪽 진영이 무너질뻔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적 기병이 나타나지 않는다.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건가?
신중하기에 과감하지 못한 오그마르는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족장들이 달려와 사정했다.
“오그마르 총독! 곧 해가 질 겁니다!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리시지요!”
지금 저 진창에서 죽어가고 있는 이들은 다 숙영지 족장의 부족원들이다.
현재 입은 피해로도 피눈물을 흘릴 것 같은데, 북방군 진영은 함락되기는커녕 추위를 예고하는 어둠만이 찾아오고 있었다.
오그마르는 이를 악물었다.
검성이라면 반드시 자신이 예상 못 한 변수를 가지고 있을 텐데, 족장이라는 놈들은 제 병력이 아까워 발을 동동 구른다.
젠장,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오그마르는 어쩔 수 없이 저 멀리 혼자 날뛰고 있는 회색 늑대를 지목했다.
“족장들은 서전트를 보내 회색 늑대를 묶어라. 나는 우회해서 다른 방향을 치겠다!”
“알겠습니다, 총독!”
“부관! 너희는 주변을 다시 한번 정찰해 매복 중인 기병이 없나 확인해라!”
“명을 따릅니다!”
현재 북방군은 지칠 줄 모르는 회색 늑대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놈이라고 해도 손 하나로 두 개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오그마르는 결국 결단을 내리며 대기 중인 기마대를 빠르게 소집했다.
그러자 절정으로 치달았던 전장 분위기가 황혼과 함께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돌격하라!”
“놈을 붙잡아!”
오그마르의 지시를 이해한 족장들은 용맹한 서전트 무리는 일시에 출격시켰다.
당연히 회색 늑대는 기다렸다는 듯 오러를 뽑아 놈들을 상대했다.
“기마대는 따르라! 이랴!”
지금이 기회다!
오그마르는 적의 심장을 찌르고자, 기마대를 몰고 원형진을 우회했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주시하고 있던 방향을 향해 있는 힘껏 말을 몰았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지원을 나왔던 인간 예비군이 때마침 물러나, 작은 공백이 생겨버린 부대.
그 틈을 완벽하게 노린 오그마르는 기마병들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돌격! 적을 섬멸하라!”
흥분한 전투마가 말굽을 박찬다.
복창한 기마병들은 날카로운 창을 앞으로 내밀며 진영을 향해 돌격했다.
한 북방군이 다급히 외쳤다.
“기, 기마병이다! 기마병이 온다!”
이제 막 숨을 돌리고 피를 닦던 한 푸른 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오크 기마대가 드디어 돌격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놈들을 막아 줄 말뚝은 대다수 무너진 상태였고 회색 늑대 또한 바로 지원을 오지 못하는 판국이었다.
심지어 그 선두는 오그마르!
기마 돌격보다 무서운 것은 놈이 내뿜고 있는 오러와 힘의 파괴력이었다.
놈의 목표는 후방인 궁수부대다.
입술을 파르르 떤 푸른 손은 결국 활을 내려놓은 뒤 검을 뽑아 들었다.
“궁수부대! 내가 신호를 내리면 적 기마대 향해 일제 사격하라!”
“대장님! 어디 가십니까!”
콰앙! 콰직!
으아아악! 끄으으악!
서둘러 모인 방진이 기마대 앞을 막는다.
하지만 선두에 선 총독 오그마르 앞에선 속수무책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걱!
화르르!
불처럼 타오르는 오러와 괴물 같은 무력.
북방군 그 누구도 저 막강한 전사인 오그마르를 막으려 들지 않았다.
물론 죽음을 각오한 한 사람만 빼고.
“오그마르으으으으 - - - !!”
챙!
검을 뽑은 푸른 손이 몸을 날렸다.
그러자 흠칫 놀란 오그마르가 도끼를 들어 검을 막아냈고 고삐를 당겨 멈춘다.
도끼가 흔들릴 만큼 상당한 실력자다.
북방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인가?
기운을 정제한 오그마르는 앞길을 막은 푸른 손을 상대하려고 했다.
“일제 사격!”
하지만 그 순간 푸른 손이 기다렸다는 듯 후방 궁수부대를 향해 명령했다.
그것은 경로상에 있는 자신을 무시하고 화살을 발사하라는 명령이었다.
슈슈슈슈슈슈욱!
채쟁, 챙!
오그마르는 경악했다.
그리고 직사로 날아오는 화살을 바삐 막으며 적의 지휘관을 눈으로 좇으려고 했다.
순간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시간과 시야.
푸른 손은 날아오는 화살 비를 등진 채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방어도 검술도 아닌 오직 목숨만을 노리는 극단적인 공격이었다.
“- - - - - - !!”
챙! 쨍그랑!
오그마르는 오러 도끼를 휘두른다.
그러자 푸른 손이 휘두른 오러 검은 그대로 깨져버렸고 무방비한 가슴팍에 붉은색 실선이 날카롭게 그어지고 말았다.
서걱!
푸른 손의 심장을 제대로 베었다.
오그마르는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에 서늘함을 느끼며 순간 안도했다.
하지만 푸른 손이 노린 것은 처음부터 오그마르의 도끼가 아니었다.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을 지나, 날카로운 단검이 갑옷 틈을 뚫고 들어왔다.
푸욱!
“커억!”
무기술에 능한 허스칼답게 푸른 손은 부러진 검을 버리고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오그마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히히히힝!
그대로 말에서 낙마하는 오그마르.
무려 총사령관이 낙마한 상황에서 계속 공격을 명령할 미친놈은 없었다.
“오, 오그마르님!”
깜짝 놀란 기마대는 파상공세를 멈추고 오그마르를 향해 모여들었다.
“총독님을 구했다! 후퇴! 후퇴하라!”
서둘러 오그마르를 구해낸 기마대는 후퇴했고 덩달아 방진을 공격하던 오크 전사들 또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누가 예상이나 했던가, 그 막강한 오그마르가 인간 전사한테 찔려 낙마할 줄은.
북방군은 패닉 상태에 빠진 오크 놈들을 넋 놓고 바라보다 이내 방패를 내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대열 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울부짖음이 귓가에 윙윙 울려왔다.
“- - - - - - -.”
가슴팍이 베인 푸른 손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피 웅덩이 위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깨진 검을 내려놓으며 눈을 감았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먼저 떠난 이들이 느낀 죽음이.
아프지도 않고, 후회되지도 않는다.
잠시 행복한 꿈을 꾸었던 푸른 손은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허물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