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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60화 (60/181)

60화

검은머리 기사왕 60화

둥 - - - - - 둥 - - - - - 둥.

저 멀리 작은 북소리가 들려온다.

발아래로는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고 심장은 눈치 없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병사는 자신과 같은 투구, 갑옷을 입은 전우들을 바라보며 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감상도 잠시일 뿐, 저 멀리 오크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새하얗게 깔린 평원에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무리가 진군했고 흉측하게 생긴 깃발들이 바람을 타고 휘날렸다.

“자자, 몸 굳기 전에 좀 움직여!”

“방패 내리면 큰일 난다! 내일까지 사람 구실 하고 싶으면 잘 버티자.”

지휘관들의 지시를 받은 퇴역병 출신 부장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흐트러진 대열을 정리하며 촘촘한 방진을 더욱더 뭉치게 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오크 군대다.

방진이 한쪽이라도 와해 된다면 원형으로 구축한 방어선은 금세 뚫릴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쏠림이 없는 균형을 지키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지휘관과 부장들은 재차 그 점을 강요하며 전의로 물든 북방군을 일깨웠다.

쿵! 쿵!

병사들은 지시를 따라 방패를 가슴팍까지 올렸고 궁수들은 따뜻하게 녹인 시위 위에 하나둘 화살을 걸어두었다.

척, 척, 척, 척, 척.

전쟁을 오래 끌 생각이 없는지 곧바로 방향을 바꾼 수많은 오크 군대.

대열에서 빠져나온 중기병들은 유일한 퇴로를 막았고 속보로 움직인 군대는 북방군이 구축한 원형진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노련한 지휘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한 오그마르는 족장들을 제 수족처럼 다루며 연합 부대의 단점을 가뿐히 상쇄해버렸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지켜본 회색 늑대는 한 치 동요 없이 앞으로 사슴을 몰았다.

원형을 이룬 모든 북방군은 그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냈고 귀를 기울였다.

북방과 인간의 운명이 대척점에 선 지금, 회색 늑대는 분명 웃고 있었다.

“적의 숫자가 너무 많다! 이런 시발, 많으면 많다고 이야기를 했어야지! 괜히 무게 잡다가 뒈지게 생겼구나!”

병사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품위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회색 늑대의 농담에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중요할 때 웃어도 되는 걸까.

병사들이 고민하는 사이 평소 장난이 많기로 유명한 한 부장이 크게 외쳤다.

“지금이라도 도망치지 말입니다!”

“너 이 새끼 얼굴 기억했어!”

하하하!

더 이상 눈치 보는 이들은 없었다.

병사들은 그들이 나누는 만담에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고 이내 왁자지껄 떠들며 마지막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들 중 누군가는 죽을 것이다.

죽은 이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하지만 병사들은 최후일지도 모르는 순간, 울기보단 웃고 싶었다.

“- - - - - - -.”

짧았던 시간이 지나 소란이 멈춘다.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던 병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비장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며,

회색 늑대가 입을 열었다.

“웃으니 좋구나.”

웃으니 좋다. 그 간단한 걸 잊고 살았다.

힘이 없는 자신을 탓하며, 불운한 이 운명을 저주하며 그렇게 웃지 못했다.

“왕이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그런 운명이 바뀌었다.

기꺼이 하늘을 거스르겠다고 말한 우리의 왕이 기어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채앵!

회색 늑대가 검을 뽑으며 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흰 뿔 사슴이 앞발을 들어 올렸고 시퍼런 검에 횃불 같은 오러가 맺혔다.

“이제는 우리가 지킬 차례다.”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북방군은 이 자리에 없는 기사왕을 위해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 * *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푸륵!

눈이 내리고 바람이 거세다.

하지만 한줄기 선이 된 기병대는 그런 악조건을 뚫고 앞으로 내달렸다.

전투마가 지나갈 수 없는 험준한 지형을 마치 평원처럼 내달리는 흰 뿔 사슴.

꼬박 3일이 넘게 걸리는 길을 우리는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이제 익숙한 지형이 보인다.

눈투성이와 함께 선두를 달리던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려 정지 신호를 보냈다.

“워, 워!”

“정지! 정지하라!”

기병대가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그리고 선회하는 선두를 따라 낮아지기 시작한 평지를 향해 고삐를 당겼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슴들과 눈썹과 머리 위에 서리가 어린 병사들.

하지만 선두를 향해 보내는 눈빛만큼은 사명감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퇴역 기사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경!”

“그래, 이 아래다.”

모든 길이 모이는 교통, 무역의 요충지이자, 가파른 절벽을 끼고 있는 천혜 요새.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외형은 스노우가든이라는 이름과 걸맞았다.

“······정말로 왔군.”

모든 투쟁과 추억이 남아 있는 수도다.

감회가 남다름을 느낀 나는 한동안 아련한 눈빛으로 스노우가든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감상은 여기까지다.

우리가 숨을 돌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회색 늑대가 이끄는 북방군은 오크 놈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나는 무기를 정비 중인 눈투성이와 퇴역 기사들을 불러 계획을 말했다.

“내가 들어가서 성문을 열겠다. 신호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몰아쳐라.”

기병으로 성벽을 넘을 수는 없다.

기동과 돌격이라는 이점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을 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눈투성이와 퇴역 기사들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반대했다.

“혼자서 가신다고요?”

“······무모합니다. 기사들을 대동하시지요.”

스노우가든을 지키는 오크 놈들이 아무리 두 부대뿐이라고 해도 숫자상 수백이다.

그런 성에 혼자 침입을 하겠다니, 사실상 자살을 하겠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내 옷깃을 강하게 붙잡는 눈투성이와 당장에라도 쳐들어갈 것처럼 검을 잡는 기사들.

하지만 나는 흥분한 그들을 만류했다.

“은밀함이 가장 중요하다. 혼자면 충분하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준비해.”

“······알겠습니다.”

수도의 탄생과 몰락을 지켜본 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왕국의 창문이 몇 개인지 생생한데, 성문 하나 열지 못할까.

자만이 아닌 자신감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가벼운 몸을 풀며 차가운 검집을 강하게 쥐었다.

* * *

졸졸.

하수도는 도시의 핏줄이다.

영민한 기사왕과 재상은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포로로 잡은 엘프들에게 본국과 같은 시설을 만들도록 했다.

원래라면 중무장한 경비들과 기술자들이 24시간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수도를 점령한 멍청한 오크 놈들은 왕국의 자랑스러운 하수도 시설을 내버려 두고 흔한 관리조차 하지 않았다.

서걱!

코를 찌르는 악취와 녹슨 철창.

나는 그대로 검을 뽑아,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했던 두꺼운 방범창을 잘라냈다.

철컹!

깔끔하게 잘렸다.

그대로 하수도로 몸을 들인 나는 선명한 기억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찰팍, 찰팍, 찰팍.

조용하고 어두운 하수도 내부, 어디선가 불어오는 쿰쿰하고 차가운 바람.

벽을 더듬으며 걸음을 옮긴 나는 이내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배수로를 발견했다.

녹슨 사다리는 위험해 보인다.

가볍게 부서지는 파편을 내려놓은 나는 그대로 벽 틈새를 집고 기어올랐다.

그러자 차가운 바람의 원인이었던 배수로 틈과 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더러운 찌꺼기가 뭉쳐 있는 배수로 입구를 검집으로 힘껏 쳤다.

깡!

스르륵.

턱을 잡고 얼굴을 내밀었다.

다행히 주변은 조용했고 나는 능숙하게 몸을 틀어 지상으로 올라왔다.

휘이이이잉 - - - -!

아직 해가 중천인 점심이다.

하지만 스노우가든은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회색 폐허였다.

생소한 광경이었다.

수많은 북방 인간이 웃으며 살았던 왕국의 수도가 이제 한낱 폐허가 되었다.

수천 명이 생매장당했다고 했던가.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마치 억울하게 죽어간 북방인의 비명과 같았다.

어머니 북방이시여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재건의 영광을 지켜봐 주시고 먼저 떠난 이들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나는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 날의 비극을 가로지르며 먼저 떠난 이들이 어머니 아래 평안하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탁!

폐허가 된 지붕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저 멀리 왕궁과 함께 거대한 성벽의 중심일 수도 성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투성이 예상대로 병영에 보이는 부대 깃발은 단 두 개뿐이었고 성문을 지키는 오크 병력의 숫자도 훨씬 적었다.

저 정도 병력이면 충분하다고 예상한 건가, 오그마르답지 않게 신중하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려 성문까지 이어진 다음 지붕을 향해 몸을 날렸다.

탁, 탁, 탁, 탁!

몸과 발걸음이 가볍다.

엉성한 오크 순찰대들을 빠르게 지나친 나는 지붕과 지붕을 옮겨타 마치 한 줌 바람처럼 성문을 향해 날았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달리자, 더 이상 길이 되어줄 건물 지붕이 보이지 않았고 성문은 해자가 눈에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하지만 한가한 수도 내부와는 다르게 성문 앞은 상당히 시끄러운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한참 물건을 옮기는 오크들과 함께 수많은 물자가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보급품을 보관하는 물자 창고를 아예 성문 앞으로 옮겨버린 모양이구나.

물론 노동을 천시하는 놈들답게 능률은 바닥이었고 주변을 경계해야 할 오크 전사들조차 농땡이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 방심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

놈들을 차갑게 내려다본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려 지붕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오크 놈들과 물자가 모인 성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마침 보급 물품과 천막 앞에는 북방 식민지를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철컥, 스르르릉!

깃발 앞으로 다가가 검을 뽑았다.

그러자 대놓고 다가오는 인간을 발견한 오크 하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자 상자를 내려놓으며 읊조렸다.

“······인간?”

북방 식민지의 중심인 이곳 스노우 가든은 오크가 점령한 이래 단 한 번도 함락되지 않은 식민의 상징이자, 무덤이다.

하지만 그런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하듯 왜소하고 늙은 인간 하나가 당당히 걸어왔다.

인지 부조화가 온 머리, 찡그려지는 미간.

오크는 본능적으로 도끼를 쥐며 동료들을 불렀고 이내 무료함으로 젖어있던 오크들이 하나하나 무기를 챙겨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 왔지?”

“침입이다. 서전트를 불러와!”

순식간에 불어나, 주변을 포위하는 오크들.

굳이 놈들의 시선을 모은 나는 여전히 펄럭이는 깃발을 올려다보았다.

서걱!

그리고 한 치 망설임 없이 깃대를 베었다.

힘을 잃은 깃발은 힘없이 떨어졌고 내 발은 소복하게 쌓인 눈과 깃발을 짓밟았다.

“- - - - - - - -!!”

오크 놈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검 끝을 놈들과 굳게 닫힌 성문을 향해 겨눴다.

“비켜라.”

오욕의 세월이었다.

북방의 이방인으로 태어나 어머니의 사생으로 살았고 세월을 베어온 신념과 검조차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

왕을 잃은 기사요, 유훈조차 지키지 못했으니. 사는 것과 죽는 것, 그 무엇하나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증명할 것이다.

먼저 간 기사왕을 위해.

새로운 기사왕을 위해.

내가 왜 검을 들어야 했는지를.

“왕이 가실 길을 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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