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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59화 (59/181)

59화

검은머리 기사왕 59화

‘오러도 다룰 줄 모르는 자가 기사 흉내는 잘 내고 다니는군. 안 그런가?’

‘다 들리겠네, 이 사람아.’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가치를 증명해야 했던 젊은 시절, 나는 항상 조롱과 질투를 같이 겪어야 했다.

오러를 다룰 줄 모르는 태생과 검은 머리는 항상 추문의 대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참고 또 참았다.

아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게 있는 거라곤 왕의 종자라는 명칭과 아직 부족한 실력이 다였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들려오는 웃음소리.

대놓고 나를 모욕하는 이름 모를 기사들.

스스로 갉아먹기 시작한 자존감은 성취의 제동을 걸었고 나는 그렇게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때 조롱하는 이들을 향해 당당히 외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할 자리에 있던 재상은 나를 변호하고 그들을 혼냈다.

말 한번 나눠본 적 없던 기억하는 새가 타인의 명예를 위해 나서준 것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울었다.

혼쭐이 난 기사들이 도망쳐서가 아닌 내가 지닌 가능성을 믿은 그녀 덕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검을 다시 잡았고,

그 끝을 보았다.

펄럭!

딱딱하게 얼은 천막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아직 이른 여명과 함께 눈을 치우던 당직 병사가 내게 말을 걸었다.

“경,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다들 모였나?”

“예! 일찍들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시간만 맞춰 와도 된다 했는데 다들 어지간히도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본영 천막을 향해 걸어갔다.

사박, 사박, 사박.

지난밤, 눈이 많이 쌓였다.

그리고 밤새 쌓인 눈만큼이나 내 마음속 격정도 상당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참으로 웃긴 일이지 않은가.

수년간 응어리졌었던 설움이 겨우 따뜻한 손 하나로 멈추고 말았다니.

그동안 쳐놓은 난리를 생각하면 스스로 허탈할 정도로 짧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편했다.

나는 어쩌면 누군가 등을 밀어주기를 원했었다는 것과 나조차 모르는 마음을 눈치챈 눈투성이가 그 역할을 했다는 걸 말이다.

나는 오늘따라 가벼운 어깨를 펴며 기척이 느껴지는 천막 문을 열었다.

어제는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이었다면 오늘은 전쟁을 준비하는 군인이어야 했다.

펄럭!

“왔나.”

모두 모여 있었다.

지휘관들은 내가 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마주쳤고 가장 상석에 앉은 눈투성이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유일하게 입을 여는 회색 늑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멀지 않은 곳에는 의복을 바르게 한 기억하는 새와 거친 귀리가 서 있었다.

눈투성이가 입을 열었다.

“재상님 많이 피곤하시죠? 너무 이른 시간에 부른 것 같아 죄송하네요.”

“······말씀 낮추세요, 폐하.”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니 편하게 할게요. 그리고 아직 왕관도 못 받았어요, 헤헤.”

어젯밤 큰 도움을 받았던 기억하는 새는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기껏 풀어낸 분위기를 굳히기 싫은지 과하지 않은 애교를 부리며 사람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다들 표정이 나쁘지 않다.

기억하는 새를 바라보는 내 눈빛이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는 것은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긴 이르다.

아직 현실이라는 걸림돌과 함께 서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못 박았다.

“개인을 위해 전략을 바꿀 수는 없다. 이건 북방과 인간을 위한 전쟁이지, 우리 개인을 위한 전쟁이 아니다.”

지휘관이 어떤 전략을 짜고, 판단을 내리냐에 따라 사상자 숫자가 달라진다.

이런 수비적인 진을 짠 것도 최대한 피해를 줄여 승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개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굳이 이점이 없는 공세를 취한다?

위기에 처한 그 개인이 내가 된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허용할 수 없었다.

“······대의는 전체를 위한 것이지, 사욕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네 말이 옳다.”

그나마 나와 동등한 위치인 회색 늑대마저 동의를 보내오자, 자리에 모인 이들은 안타까운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반박할 말도, 명분도 없었기 때문이다.

너 한 줌, 나 한 줌.

누구나 공평한 생명의 무게.

그것을 망각한 순간 돌아오는 것은 명예를 더럽히는 위선뿐이었다.

그 점을 눈투성이는 순순히 인정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만 믿고 따라온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요.”

기억하는 새는 절망했다.

거친 귀리는 무거운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을 변호해주었던 눈투성이마저 저리 단호하니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 - - - - - -.”

그 말을 끝으로 기류가 변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눈투성이와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동안 풍겨왔던 왕의 재목이 이제는 농후한 향(香)을 넘어 형(形)을 이루고 있었다.

눈을 반짝인 눈투성이가 내게 말했다.

“모두를 구할 방법이 있다면, 저는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을 구하면 하책이다, 전쟁에서 이기면 중책이다, 개인을 구하고 전쟁에서마저 이길 수 있다면 그것은 상책이다.

눈투성이는 분명 상책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되물었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

이 순간부터는 한낱 스승과 제자의 대화가 아닌 지휘관의 설전이다.

나는 시퍼런 두 눈을 번쩍이며 일어선 눈투성이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하지만 우리의 왕은 스승인 나를 상대로 한 치 물러섬 없이 앞으로 나섰다.

“기병을 이끌고 적이 볼 수 없는 방향으로 우회해요. 그런 다음 뒤를 칠 거에요.”

“오그마르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전술이다. 내가 역으로 당할 위험이 크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네, 공격 시점이 일치하지 않으면 각개격파 당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말한 뒤는 본대가 아니에요.”

보통 기병을 우회 기동을 한다고 하면 방진이 없는 적의 측면을 노리는 작은 의미의 전술이나, 행군 혹은 진을 치고 있는 본대를 노리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그 전제부터 달리 봐야 한다는 듯 북방군 첩보 일을 전담하고 있는 푸른 손을 향해 물었다.

“경, 저희가 여태 점령하고 파괴한 숙영지 숫자가 총 몇 개죠?”

“······작은 곳까지 포함해서 말입니까?”

“예, 족장 깃발로 보면 쉽겠네요.”

“그렇다면 22개입니다.”

“척후병이 확인한 본대 깃발은요?”

“총 18개입니다.”

북방 숙영지 42개, 우리가 점령한 숙영지 22개, 북진하는 깃발 18개.

이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눈투성이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 하나를 다시 상기해주었다.

“오크는 부족 단위로 편제돼요. 서로가 고립된 북방 숙영지는 더더욱 그렇죠.”

“······본대는 18개의 연합부대다?”

길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크게 숨을 내뱉었고 회색 늑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수도가 비었다고?”

“정확히는 두 개 부대만이 있겠죠.”

작정한 오그마르가 두 개 부대만을 제외한 모든 오크를 끌고 북상했다.

단순하게만 본다면 그 엄청난 규모를 가늠하게 해주는 소식이었지만, 역설적으로는 놈들이 가진 취약점을 알려주기도 했다.

바로 총관인 수도가 비었다는 것.

눈투성이가 말하고자 했던 우회 기동은 오그마르 본대가 아닌 수도를 향하고 있었다.

푸른 손이 다급히 물었다.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요?”

“기병이면 가능하다. 소수가 잠입할 수 있는 길 또한 검성이 알고 있지. 기사단이 함께 가면 충분할 거다.”

스노우가든을 쌓아 올린 석재 개수가 몇 개인지도 알고 있는 나다.

더군다나 그 거대한 성을 지키는 수비대가 겨우 두 부대라면 나는 하룻밤 안에 오크 놈들 멱을 전부 따올 자신이 있었다.

총관이 위치한 수도를 탈환한다.

장담컨대, 아무리 전쟁 경험이 많은 오그마르라도 할지라도 최후방이 점령당한 전쟁은 이기지 못할 것이다.

꿀꺽.

모두가 눈투성이를 바라봤다.

우리의 왕은 이 모든 과정에 대미를 장식하듯 기억하는 새를 향해 말했다.

“추적에 능한 사냥꾼들을 데리고 가세요. 적 본대가 후퇴하는 즉시, 귀리 경과 함께 따님을 찾으시면 될 거예요.”

마무리까지 전부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는 조용히 두 눈을 감으며 눈투성이가 짚었던 수를 하나하나 되새겨보았다.

물론 중간중간 보완할 점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전장을 완벽히 이해하고 필요한 맹점을 제대로 짚었다는 것이다.

순간 의문이 든 나는 물었다.

“왜 진즉 말하지 않았니?”

“한 방울이 모자랐어요.”

“한 방울?”

“예, 그릇을 가득 채울 한 방울이요.”

겨우 한 방울 때문에 이런 좋은 생각을 아끼다니, 나는 그것이 겸손인지 아니면 극도의 조심성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도 잠시일 뿐, 빙긋 웃는 눈투성이의 시선을 쫓아가자 그 한 방울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수가 있었다.

기억하는 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진정이 섞인 눈물을 뚝 뚝 흘렸다.

눈투성이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그 한 방울은 오늘에서야 제 그릇을 찾았다.

‘세상이 너무 커요, 저는 너무 작고요. 이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큰 꿈을 꾸는 건 죄가 아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고는 한다.

눈투성이가 원하는 새로운 세상은 내가 평생을 쫓았던 이상보다 높고 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말이다.

‘그렇다면 큰 꿈을 꾸고자 합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나는 당돌한 눈투성이를 보며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 * *

눈투성이가 제시한 전략은 나와 회색 늑대가 열심히 굵직한 뼈대와 살을 붙여가며 검토하고 또 보완해주었다.

그러자 그럴싸한 작전 계획서가 완성되어 각 부대 지휘관과 부장들을 향해 짧은 메모와 구두로 급히 전달되었다.

하지만 급조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흰 뿔 사슴 기병대만 숙지하면 되는 내용이라, 본진은 자신들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인지만 하고 있으면 되었다.

우회한 별동대가 수도를 탈환할 동안 반드시 버텨주어야 하는 북방군들.

그들을 총지휘하게 된 회색 늑대는 비장한 얼굴로 내게 말했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버티겠다. 그러니 반드시 이들에게 돌려다오.’

‘수도와 희망, 그리고 재건을.’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영원한 숙원이었던 수도 탈환을 앞둔 우리는 벅찬 가슴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 한걸음, 겨우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인간을 위한, 그리고 의한 북방 왕국을 다시 한번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스르릉.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여전히 날카로운 날은 내 얼굴과 마음을 비춰 다짐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검집을 닫았다.

그리고 허리춤에 묶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슴 위에 망설임 없이 올라탔다.

푸르륵!

다각, 다각, 다각.

해가 지기 시작한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고삐를 당기자 작은 저항감이 느껴진다.

그간 함께 싸워온 흰 뿔 사슴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아는 모양이다.

투레질하는 녀석을 잘 달래고 나아가자, 주황빛으로 물든 세상은 어느덧 발굽들이 가득한 세상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그리웠던 과거도 망각한 회상도 아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기억하는 새였다.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추운데 왜 밖에 나와 있을까.

나는 천천히 사슴을 몰아 추위에 떨고 있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여기······.”

그러자 기억하는 새는 기다렸다는 듯 소중히 꾹 쥐고 있던 양손을 내게 내밀었다.

빨갛게 얼어붙은 그 손에는 거친 모직으로 만들어진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하하.”

전장으로 향하는 기사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는 유치 하고 오래된 장난.

하지만 무사히 귀환하라는 뜻이 담겨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검집을 내밀었다.

꽉.

그녀는 내가 앞으로 내민 검집 위에 직접 만든 손수건을 꽉 묶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공손하게 손을 모으며 무거울 수밖에 없는 고개를 푹 숙였다.

기억하는 새가 말했다.

“······당신을 버리고 홀로 도망쳤어요. 이런 제가 원망스럽지 않으셨나요?”

“원망했지, 당연히 미웠고.”

내가 당시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은 연모였고 존경이었으며 동시에 의지였다.

왕과 영웅이 떠나간 빈자리를 오직 기억하는 새만이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왕궁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내가 품었던 감정은 부러지는 검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검성, 정말 미안해요.”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검집을 굳건히 쥔 내 손을 움켜잡으며 지나간 날을 후회했다.

참으로 야속한 세월이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녹슬어가는데, 그녀는 행복했던 기억 속 그때와 변함이 없었다.

상냥하고, 현명하고, 따뜻했던 그때.

하지만 나는 맞잡은 손을 풀었다.

스륵.

“아······.”

나는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는 기억하는 새를 향해 환한 얼굴로 웃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고삐를 쥐며 그동안 가라앉았던 감정을 완전히 정리했다.

“네 잘못이 아니다. 결국, 각자 지키고 싶은 게 있었던 거니까.”

“······그런가요.”

“그래, 그런 거지.”

안장 아래 발을 박찼다.

그러자 흰 뿔 사슴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달려가며 미련을 전부 털어내었다.

고개를 숙인 새는 조그마한 점이 되었고 나는 눈 위를 질주하는 선이 되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흰 눈을 맞아 백발이 되었다.

검은 머리 이방인은 제일 행복했었던 그때, 그 자리에 놓고 떠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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